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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망령재림-36화 (36/268)

< 11. 말괄량이 길들이기 [1] >

사안이 사안인 만큼, 역병지대에 들어가는 이는 시엔 혼자였다. 물론 봉쇄선까지야 호위를 받고, 교단과 합류해 돌입하겠지만은.

비설이 졸랐다.

“같이 가.”

“안 돼.”

“왜?”

“위험하니까. 엘프가 역병에 걸린다는 소린 들어본 적이 없긴 한데.”

“그럼 같이 가.”

“안 돼. 역병에 걸린 최초의 엘프로 기록되고 싶어?”

“칫.”

비설은 늘 그렇듯 문을 쾅 닫고 사라졌다.

출발 전날 밤엔 엘딘이 일찌감치 인사를 건네왔다.

“몸 성히 다녀오게나. 역병지대라니. 사서 고생을 하는군. 이상한 거 만지지 말고.”

“제가 애도 아니고, 이상한 걸 왜 만집니까?”

엘딘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시엔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시나?

어쨌거나 잘 다녀오라는 인사가 아닌가.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출발 당일, 시엔이 가방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 돼. 나와.”

“칫. 시엔, 나빠.”

비설이 커다란 짐가방에서 몸을 일으켰다. 적어도 가방 안에 숨어있으려면, 밖에서 잠궈줄 공범 한 명은 확보해야 하지 않았을까.

남부행은 지루하게 이어졌고, 봉쇄선 앞에서 교단의 인솔대와 마주했다. 베른닐은 호위단과 함께 봉쇄선에서 대기하기로 하였으니, 이젠 헤어질 시간이었다.

베른닐이 걱정어린 시선과 함께 손을 꼭 붙들었다.

“도련님, 무사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그, 절대 이상한 거 만지시면 안 됩니다.”

“아니, 이상한 걸 내가 왜 만지는데?”

“······아무튼 안 되는 겁니다. 아시겠죠?”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저를 무어로 알고 이상한 걸 만지면 안 된다느니 한단 말인가. 설마 엘딘한테 검을 배우더니 둘이 닮아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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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엔 님. 이걸 착용하시면 됩니다.”

신관이 흰 옷 꾸러미를 내밀었다. 네모반듯하게 접힌 새하얀 로브 위에 얼굴 전체를 가리는 커다란 가면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새 부리 가면이라 불리는 물건이다.

말 그대로 툭 튀어나온 커다란 부리가 특징. 거추장스럽게 튀어나온 부리 속에 축성된 솜과 허브를 채워넣었다. 그 끝에 숨구멍이 틔었으니 부정한 공기가 정화되어 몸에 들어온다.

로브는 또 어떠한가.

밑바닥을 재봉하고 손목과 발목을 죄니 어디 한 군데 바깥과 통하는 곳이 없어 답답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이렇게 고운 흰 색이라니.

개인적인 취향으로도 불호요, 원래 흰 옷이란 때가 쉬이 타고 절대 지워지지 않으니 사치 중에 사치라 할 것이 아니던가.

물론 역병 지대에서 혹여 묻은 부정들을 지나칠까 이리 새하얗게 만든 물건이긴 했다.

시엔이 한숨을 내쉬었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복장이었다. 여기서 나는 괜찮다며 설렁설렁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쩔 수 있으랴.

그나마 위안인 것은, 천 년 전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치 가벼워졌다는 것.

모양은 비슷한데 이리 가볍다니? 도대체 뭘로 만들어졌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시엔이 역병 의복을 이리저리 만져보고 눌러보고 당겨보고 뒤집어보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자 신관이 문을 두드리며 재촉했다.

“아직이십니까?”

“아. 금방 나가죠.”

시엔이 서둘러 의복을 차려입고 나섰다.

옷도 옷이지만, 가장 불편한 것은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신성이다. 성자 성녀라 불리는 이들이 가진 막대하기 그지없는 신성이었다.

멀지 않은 거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음차원 에너지가 딱딱히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벌써부터 머리가 슬금슬금 아파온다. 괜히 왔나 하는 후회를 해도 이미 늦은 것을 어찌하랴.

뷔아 샤인 세러하드.

현 교단에서 가장 강한 신성을 가졌다고 들었다. 그와 같은 힘을 가졌던 이가 교단의 긴 역사 속에서도 드물다 했던가.

후작은 그녀가 교단에서도 그 추종자가 무수한 인물이라며 특별히 조심하라고 했다.

그리고 베른닐의 정보도 받았다.

베른닐이 말하기를, 음. 예쁘다던데.

시엔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베른닐은 성녀에 대해 말이 많았다. 그런데 그 전부가 결국 예쁘다는 말이었다.

교단으로 오는 연서가 너무 많아서 겨울에 장작 대신 태워도 남아서 버린다고도 했고.

한 번 보고 사랑에 빠져서 상사병에 앓아누운 치를 모아 쌓으면 성벽이 된다고도 하고.

그녀를 보기 위해 너도나도 성전사며 신관을 지원하는 바람에, 교단 역사상 지금이 가장 성세한 시기라던가.

다시 생각해도 온통 쓸모없는 정보뿐이었다. 베른닐은 역시 베른닐이니까. 새삼 놀라거나 실망할 일도 아니지 않나.

성녀는 한 눈에 봐도 성녀였다.

온 사방이 새 부리 가면 천지에서 당당히 머리카락을 드러내고 있는 이가 단 한 명인데 누가 성녀일까.

천 년 전 파릴리 이오라는 마법사가 주장하기를, 성자 성녀의 신체는 신성과 결합하여 성체라고 부르는 초월 상태에 있다 했다. 그러면서 당당히 인간보다 우월한 상위종으로 분류해야 한다 우겼다.

아예 못 들어줄 헛소리는 아닌 것이, 성자 성녀는 기본적으로 모든 독과 질병이 통하지 않고, 인간의 신체능력을 월등히 뛰어넘으며, 쉬이 늙지 않으니 여러모로 인간 이상의 존재라 부르기에 충분했으니까.

물론 파릴리 이오가 종의 우열을 구분하여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야 한다 주장하는 미친놈 중의 미친놈이라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지만.

시엔이 억지로 생각을 이어가며 쓰린 속을 달래고 있을 때였다. 성녀, 뷔아가 몸을 돌려 시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음. 예쁘긴 예쁘네.

눈코입 하나하나 떼서 보면 아름답다 하겠다. 그게 조화롭게 한데 모이니 더욱이 아름답다.

흔히 성자와 성녀를 숨쉬는 기적이라 부르는데, 그녀는 얼굴이 기적이라 해도 믿을 정도.

그런데 속이 너무 안 좋다.

시엔이 메슥거리는 속을 억지로 달랬다.

흑마법사와는 상성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다.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쑤시고 속이 막히고 머리가 아파온다.

그러하니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해악하기 그지없는 것이라.

“어머, 안녕하세요?”

성녀가 살포시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눈이 마주치자 속이 한층 막히는 기분이었다. 시엔이 겨우 대답했다.

“우웁, 안녕하십니까, 성녀님. 시엔 티란디스 입니다.”

“티란디스 경이시군요.”

“시엔으로 좋습니다. 성녀님.”

“그럼 저도 뷔아로 충분하답니다.”

성녀가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근처에 있던 새 부리들의 끝이 일제히 성녀를 향한 채 떨어질 줄 모르고 있었다. 성녀를 보기 위해 교단에 들어가는 자가 많다는 소문은 아무래도 조금 믿어도 될 것 같았다.

“어머. 시엔. 목을 잘못 잠그셨네요.”

뷔아가 성큼 다가와 시엔의 목 어귀를 붙들었다.

“아니, 제가 할 수 있습니다만, 우읍.”

“어머, 속이 안 좋으신가요. 잠시만 가만히 계셔요. 제대로 잠그지 않으면 부정이 침투할 수 있답니다.”

뷔아가 시엔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단추를 채 주는 것 치고는 너무 가깝지 않나? 속도 안 좋은데 좀 떨어져 줬음 좋겠는데.

시엔이 애써 생각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거의 끌어안듯이 달라붙은 뷔아가 시엔의 귓가에 속삭인다. 아름다운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지금 말해두겠는데, 관짝에 못 박는 소리 그 안에서 듣고 싶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뭐 만지지도 말고 기웃거리지도 말고.”

상당히 험악한 소리였다.

몸이 안 좋은 나머지 환청이 들리나?

시엔의 생각과는 별개로 성녀가 계속 속삭였다.

“그리고 절대 나한테 추근대지 마. 꼬맹아. 네 알량한 귀족 작위 따위 관심도 없고 통하지도 않으니까 그딴 걸로 들이댈 생각 하고 있으면 지금 고이 접어서 태워버리세요. 안 그러면.”

꽉. 우악스러운 힘이 목줄기를 틀어쥐었다.

성녀의 악력이란 인간을 초월한 것이다. 순식간에 숨이 탁 막히니 머리에 열기가 확 치솟는다. 성녀고 뭐고 한 대 후려치고 싶지만 마법사의 냉철한 이성이 시엔을 말렸다.

대신 시엔이 팔을 뻗어 뷔아의 뺨을 야무지게 틀어쥐었다. 시엔은 여자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 그대로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기자 탄력 있는 피부가 쭉 늘어난다.

뷔아가 으름장을 놓았다.

“으야, 이그 으안 느아?”

“큭, 먼저 놓으시지.”

“느으라그, 으엉?”

“그럼 동시에 놓지. 셋 하면 놓는 거다.”

“즈아.”

뷔아가 동의했다. 시엔이 숫자를 읊조렸다.

하나. 둘. 셋.

“느으라고, 느아.”

“켁······, 그쪽이야말로.”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저, 성녀님?”

신관의 목소리에 둘이 후다닥 떨어졌다.

“아. 다 되었네요.”

“실례했습니다. 얼굴에 벌레가 붙어서 말입니다.”

“아니요. 제가 감사하지요.”

뷔아가 우아하게 뺨을 가리며 대답했다. 아마 손바닥 안쪽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으리라. 그러니 미소지으면서도 그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른다.

시엔이 보란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가면에 가려 그 조소를 보여줄 길이 없어 애석한 일이다.

“그럼, 아무쪼록 몸을 살피시길. 아무쪼록 천신의 가호가 있기를 기원드릴께요.”

“저야말로 제 영민들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미소 아래 감춰진 험악한 심상이 오간다.

시엔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어디 한 번 두고 보자. 어느 쪽에서 먼저 매달려야 할지 가르쳐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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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드란드는 수해와 직접 맞닿은 도시였다. 벌목이 이루어지는 곳이니 꽤 성세한 곳이리라. 하지만 거리엔 사람 그림자도 없이 썰렁하기만 했다.

시엔이 치료소에 들어섰다. 원래는 시청 건물을 하던 곳이나 지금은 환자가 가득하니 신음소리만이 계속해서 귓가를 맴돈다.

시엔이 바닥에 뉘인 환자 옆에 앉아 상태를 살폈다.

환자는 의식이 없었다.

총체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이는 상세에 독하기도 어지간히 독한 병이라.

역병이란 아무리 잡아도 또 슬그머니 변장해 정체를 감추고 나타나는 법이다.

역병에 있어선 전문가인 시엔도 천 년 동안 변하고 변한 녀석을 한눈에 알아볼 수는 없다.

시엔이 혀를 찼다.

“쯧쯧. 죽지 않는 게 신기할 지경인데.”

“허나 죽지는 않는단 말이지.”

또각또각. 발소리와 함께 새 부리 하나가 시엔에 곁에 자리를 잡았다.

“신입인가? 목소리를 보니 아직 어린 친구인데. 잘 배웠나 한번 들어보자구.”

시엔이 새 부리 사내를 바라보았다.

다 같은 흰 로브에 가면을 쓰니 서로가 누구인지 알아볼 방법이 없다.

신성이 느껴지지 않으니 신관은 아니라. 아무래도 의사 선생인 모양. 신관 아니더라도 의사란 선생이라 불리는 귀한 몸이 아닌가.

그럼에도 이 위험한 곳에 와 있으니 역병 의사란 그만큼 고귀한 이라.

시엔이 환자의 상태를 읊었다.

검은 실핏줄이 전신에 오르니 간장에 손상이 있다 볼 것이다, 몸은 퉁퉁하게 부어있으니 순환계에도 문제가 있다. 눈과 코에서 피가 섞인 물이 흐르니 점막 출혈까지.

“내 살다 이런 지독한 녀석을 또 처음 봤어. 그게 일주일 짜리야. 멀쩡한 놈이 일주일 만에 그 꼴이 되어 누웠어. 쯧쯧.”

“일주일 말입니까? 발병 후입니까?”

“잠복기가 따로 없어. 한번 걸리고 눈을 붙이면 반나절 안에 이 꼴이야. 아레린토스의 변종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레린토스의 변종치곤 내출혈 반응은 일어나지 않는군요.”

“허나 그걸 제외하면 비슷하지. 발증기도 상세도 비슷하고.”

“아까 죽지는 않는다 하셨죠? 현재까지 사망자는 어떻게 됩니까?”

“······그건 이상하게 별로 없어. 이 상태로 한 달 이상 누운 놈도 있다니까.”

“그럼 바리바라의 변종일 수도 있겠군요.”

“바리바라? 그건 300년 전에 벌써 퇴치가······. 아냐. 일리가 있어. 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히야. 자네 제대로 배웠구만. 내 제자 녀석하고는 천지 차이야.”

시엔이 주변을 살폈다.

새끼 의사라 불리는 의사 도제가 보이지 않았다. 본디 도제란 어떻게든 눈에 불을 켜고 하나라도 더 보려 애쓰는 작자들이 아닌가. 여기 없는 것이 이상하여 시엔이 물었다.

“그 제자분은······.”

“여기 있잖아. 이게 내 제자였어. 그리 깔끔을 떨더니만, 가면을 벗지 말라 그리 말했는데 기어코 세수를 하겠다더니 이 꼴이야. 쯧. 멍청한 놈. 더 두들겨 팼어야 하는데.”

그리 말하는 의사의 목소리에 연민과 자책이 가득하다.

“이거 통성명도 안 했구만. 나는 벨티 아모르세일세.”

“시엔 티란디스입니다.”

“티란디스? 허미, 티란디스?”

의사가 화들짝 놀라고 만다.

이내 간드러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그. 티란디스 자제분이셨군요. 헤헤, 그 어쩐지 신수가 훤칠하신 게 보통 분이 아니다 귀인이시다 어쩜 이리 잘생기신 분이 있을까 그리 생각은 했지만은 말입니다. 헤헤헤.”

시엔이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가리켰다.

까마귀 가면을 쓰고 있으니 면상이 보일 리가 없다.

“헤헤헤 느낌적인 느낌이지요, 공자님. 밖을 보고 속병을 채는 이가 의사인데 가면을 쓰신다 하여 모르겠습니까? 헤헤헤.”

갑자기 비굴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시엔이 당황하고 말았다. 귀족과 평민 사이라곤 해도 도가 지나치지 않은가.

몰랐으니 함부로 하대하여 죄송하다 하면 세상 귀족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는 이가 없으리라. 오히려 그리하지 않는 이가 치졸하고 옹졸하다 욕을 먹어 마땅하니.

아까까진 고귀한 이로 보였으나, 까고 보니 갑자기 간신배가 드러났다.

아니, 이 치는 또 뭐야?

< 11. 말괄량이 길들이기 [1]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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