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34화 (34/268)

< 10. 완장을 차고 손가락을 뻗으면 [1] >

왕국의 정세가 뒤바뀌었다.

티란디스가 미스릴을 가졌다!

미스릴이 무엇인가. 미스릴로 무장한 기사단은 자체로 끔찍한 병기가 된다. 활이 통하지 않고 창진을 피해 없이 돌파하며 방패를 그대로 뚫어버리는 최강의 창이다.

귀족들은 미스릴을 왕국 차원에서 관리해야 한다 주장했으며. 그에 티란디스 후작이 성명을 발표했다.

미스릴은 당연히 왕실에 진상해야 할 것이나, 현재 갱도가 불의의 사고로 무너져 채광 불가의 상태이다.

드워프와 엘프가 하나같이 앞으로도 채굴할 수 없다 보증했으니 나 역시 안타깝기 그지없다고.

귀족들이 들고 일어나 감사를 주장했다.

그리하여 왕실과 유력 귀족들이 모여 조사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미스릴 갱도를 다시 팔 수 없는 상태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티란디스는 살베지 영지 지하의 광물을 채굴하는 조건으로 3 대 7의 공급 계약을 채결했다.

티란디스가 3. 살베지가 7이었다. 게다가 광산 운영 비용을 티란디스가 전담하기까지.

생산량에서 운영 비용을 제하고 나면, 실상 광물을 그저 원가에 사 오는 수준에 그치게 되는 결정이다.

살베지가 북서부 탑클라우드 산맥 귀족 파벌을 형성하고 그 맹주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후작은 살베지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살베지 입장에선 광산 운영 비용이 들지 않으니 이전과 비슷한 생산량을 가져갈 수 있었다. 거기에 추가로 미스릴 한 수레를 삼키지 않았던가.

후작은 여러모로 영리한 인물이었다.

이로 인해, 귀족들은 티란디스가 질 좋은 강철을 가져감에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티란디스는 이제 광산을 가져 강철을 자체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전략 자원이란 내가 가지면 좋으나 남이 가지면 끔찍한 것이다. 돈을 줘도 팔 수 없는 것이 바로 전략 자원이 아닌가.

안 그래도 부유한 티란디스가 아니던가. 이제는 질 좋은 강철까지 가졌다는 데에 많은 귀족들이 한숨을 쉬었다.

게다가 결국 광산의 소유권은 티란디스의 것이다. 수틀리면 얼마든지 광물 전체가 티란디스에게 돌아갈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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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엔. 뭐 해?”

“숨 쉬는데.”

“재미없어. 그만하고 나가자.”

“안 돼. 숨 쉬는 걸 그만하면 어쩌자고?”

비설의 귀가 뒤편으로 비스듬히 쳐졌다. 그 모습을 보며 시엔이 생각했다.

저 귀의 형태가 보여주는 감정이라면, 음. 약간의 분노, 중간 수준의 실망과 의문 정도이려나.

“왜. 그 하름질이라도 하던가.”

“시엔이 여기 있잖아.”

“내가 있으면 못 하는 건가?”

“당연.”

“······대체 하름질이란 게 뭐야?”

비설이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나름 열심히 생각 중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이전과 같다.

“하름질은 하름질인데.”

“그럼 하나씩 물어보자. 그게 어떤 행위를 말하는 거야?”

“응.”

“심심해서 하는 일인가?”

“응. 아니.”

“그건 뭐야? 둘 중 뭔데?”

“상관없는 것 같아서.”

“엘프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문화인가?”

“몰라. 근데 저번에 인간이 하는 걸 봤어.”

“인간이 했다고?”

“아마도. 내가 봐서는.”

“······젠장.”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비설이 보여준 하름질이란 다음과 같았다.

물구나무를 서서 양발을 사납게 휘두르기.

화원의 수로 속에 누워, 물에 반만 잠긴 채로 입만 뻐끔거리기.

엘프 검 네 자루를 휘둘러 연무장 가운데에 낙서를 새기기 등등.

참고로 그 낙서는 비대칭의 기하학적 도형 집합체였는데, 그 속에 느껴지는 정연한 논리에 급히 베껴놓고 아직도 가끔 들여다보곤 했다.

“······저번에 물어봐야 했는데.”

시엔이 깊게 후회했다.

탑클라우드 구릉지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맞이한 탓에 다시 물어보는 걸 깜박하고 말았으니까.

“나 갈거야.”

“가.”

“간다고.”

“알았다니까.”

“쳇.”

비설이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린다. 시엔은 드디어 훼방꾼에게서 해방되었다.

시엔은 요즘 탑클라우드 구릉지에서 본 자신의 유해에 대해 생각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귀가 맞지 않았으니까.

뼈는 살 속에 있을 때나 단단하지, 밖으로 나와선 쉽게 삭아 바스러지는 물건이다. 어째 천 년이란 유구한 세월을 버틸 수 있었을까.

그건 뼈 속에 담긴 기운 때문인가?

허나 음차원 에너지란 본디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것. 그 주인이 사라졌으니 부정한 것은 부정 세계로 돌아가리라.

게다가 방화광이 어떻게 음차원 에너지를 끌어다 제 마법에 응용을 한단 말인가.

남의 열쇠로 제 집의 문은 열 수가 없는 법.

아케인 에너지와 음차원 에너지는 한데 묶어 마력이라 부를 뿐, 명백히 다른 것이라 절대 섞이지 않는다.

그게 가능하다면.

‘불도 뿜고, 벼락도 치고, 망령도 부리겠네.’

잠깐 상상을 해 본다.

땅에는 불이 치솟고, 하늘엔 광풍이 불며 연신 벼락이 내리친다. 그 사이에 망령과 마물이 날뛰니 온 세상에 대적할 군세가 없다.

허나 누구 하나 그러한 연구를 하진 않았다.

심장에는 단 하나의 마력만이 깃든다. 이미 허수 세계와 소통하여 에너지를 받아든 이상 겸직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이상한 건 그뿐만도 아니고.’

제 뼈에 깃든 음차원 에너지는 농담으로도 많다 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러나 헤인트는 그걸로 제 경지를 몇 단계나 족히 끌어올리지 않았던가.

‘방화광은 껍데기만 남았고.’

사정을 알고 있을 방화광은 정신 세계가 불타 백치가 되었다. 한 줌 기억이 남지 않았으니 이제 세상에 존재가 없다.

헤인트는 전범으로 티란디스에게 이송되었다. 자아가 존재하지 않은 순수한 육체 역시 흥미롭긴 마찬가지라 연구할 가치가 있다.

허나 그건 실험체로서의 가치. 받아봐야 뭐 알아낼 것도 없고.

살베지는 용병 시장에서 비싸게 주고 데려온 이라 했지만, 심증이야 어디서 나왔는지 뻔한 일이다.

‘흐레이그에 언제 방문을 해야겠는데.’

흐레이그 공작가. 어차피 살베지를 지원할 세력이란 거기뿐이지 않은가.

악연으로 얽혔으니 지금 당장이야 무리라지만, 언제고 명분이야 만들면 되는 것이니.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열라 하니 베른닐과 엘딘이 나란히 방으로 쳐들어온다.

“순찰 갈 시간입니다. 도련님.”

“이런 젠장.”

시엔이 인상을 구겼다.

탑클라우드 구릉 건을 해결하곤, 한동안 방에 박혀 살았다.

엘프 생태 관찰도 하고, 명상과 사색을 즐기고, 지난 1000년간 인류가 쌓아 올린 도서를 탐독하며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다.

가끔 엘딘이 쳐들어 와 강제로 대련이라며 끌고 나가는 것만 빼면. 그럴 때면 카레네가 은근슬쩍 구석에 자리를 잡고 간절한 눈빛을 계속해서 보내오는데, 불편하기가 가시방석이 따로 없다.

후작도 그만한 성과를 올렸으니 놔두겠거니 싶었는데, 그걸 또 못 보고 주에 세 번은 순찰을 돌라 시키지 않는가.

‘무능한 이는 참아도 유능한 이가 노는 것은 참을 수 없다.’

후작은 그렇게 말했다.

저번엔 무능한 이는 못 참는다고 했으면서. 나이 먹고 말이나 바꾸다니. 사람이 그러면 못 쓰는데.

그러나 어쩌랴. 속으로 이를 갈고 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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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흐드러지게 피어올랐다.

허나 세상이란 공평하지 않으니. 이 따스한 봄마저 외면하여 슬쩍 피해 가는 곳이 있었다.

바로 천막촌이었다.

직할도시 체른노아의 빈민가는 봄이 되면 더욱 비참해졌다.

겨우내 얼었던 오물이 녹아 지독한 냄새를 피웠다. 그중 무엇보다 지독한 것이 시취, 시체 썩는 냄새라. 얼어 죽고 굶어 죽은 가엾은 영민의 시체가 봄이 되어 썩어가고 있었다.

천막을 들추면 시체가 있고, 살을 파먹은 벌레가 부화하여 온통 들끓는다.

이 정도면 나은 것이리라.

죽은 이의 천막에 또 빈민이 들어가니, 안에 있던 것을 밖으로 내버린다. 입구 앞에 시체를 버려두곤 그 안에서 웅크려 모진 삶을 이었다.

“도련님이 보실 것이 아닙니다.”

“됐어.”

베른닐이 어떻게든 이 참상을 막아 보고자 애를 썼다. 은근히 자리를 잡는 뒤편에 역한 광경이 있으니 제 몸으로 해악한 것을 막는 노력은 제법 기특하다.

허나 시엔만큼 죽음에 익숙한 이가 있으랴.

“안 되겠네. 안 되겠어.”

“겨울이 지나서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이라 다들 이렇게 죽어가죠.”

“잘 아네?”

“그야 여기서 살았으니 알고 있습니다만.”

“엥? 베른닐이 빈민 출신이었어?”

“그게 아니라, 기사단 신입은 천막촌에서 일주일을 사는 게 전통이라서요. 저도 그땐 이게 웬 지독한 짓인가 했는데, 지나고 보니 뭐.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흠.”

시엔이 빈민가를 거닐었다.

누더기를 걸친 자들의 눈을 본다. 비굴하고 나약하니 그 안에 희망조차 없어 이미 죽은 것과 같다. 껍데기만 남은 헤인트는 아름답기라도 하나, 이들은 병들고 늙거나 어렸다.

문득 재림 전 스승이자 벗이었던 이가 떠올랐다.

천 년 전, 왕자는 은근히 깔끔을 떨었다. 더럽기 짝이 없는 빈민가를 치우라는 어린 왕자의 말에 하란돌 영감은 답지 않게 무게를 잡았다.

가장 가엾은 치는 제 의무를 치를 기회조차 없는 이들입니다. 그러니 연민하고 또 연민할 줄 아시지요. 저들 중 당신의 백성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더럽다구요? 방이나 치우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면 좋겠습니다만. 왕가에서 새로운 사업으로 돼지를 치려는 줄 알았습니다. 대체 그게 방입니까? 돼지우리지.

하여간 한 마디를 안 지는 노인네였지.

시엔이 씁쓸하게 웃으며 결정을 내렸다.

“안 되겠네. 싹 밀어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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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구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늙고 병들고 어린 이는 더욱이 그러했다.

일단 의무를 다하려면, 적어도 하자가 있는 상태로는 곤란하다.

그리하여 대규모 사업안이 완성되었다. 막대한 금화가 소모되는 일이었다.

후작의 결재에 앞서, 재무관인 로우드 티란디스의 협조가 필요했다.

사실 강행하고자 하면 로우드야 뭐 무시해도 된다.

후작은 결재를 내릴 것이 분명했다.

시엔이 본 후작이라면, 사업의 이면에 취할 이득을 꿰뚫어 볼 것이 분명하니.

그렇게 후작의 결재를 받아버리고 나면, 제가 뭐라고 거기 반대를 하고 뻗대겠는가.

허나 그렇게 절차를 무시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 하여 협조를 요청하는 척이나 하려 로우드에게 들른 참이었다.

“어. 시엔······.”

평소에 시엔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로우드였다. 그러니 절대 안 된다 펄쩍 뛰는 그림을 예상했던 시엔이었다.

허나 반응이 미적지근하다.

“뭐야?”

“아니. 음. 무슨 일이지?”

“사업안이야. 재무관 결재가 필요해서.”

“어. 그래. 응.”

로우드가 사업안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멍하니 내려다보다, 이내 펜을 들어 바로 서명을 해버리고 말았다. 읽어보지도 않은 채였다.

“돈 많이 들 건데. 그렇게 결재해도 되겠어?”

“어차피 이상한 거면 아버지가 자르실 테고. 그게 아니면 내가 반려한다고 어차피 가져다 쓸 거 아니냐.”

“흠.”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의 치졸한 독기는 온데간데없고, 애수에 찬 슬픈 눈망울이 촉촉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뭐 좋은 사이였다고 신경을 쓰나.

시엔이 사업안을 돌려받고 나가려던 참이었다.

“······저기 시엔.”

“왜?”

“그. 미안하다.”

“뭐?”

시엔이 귀를 의심했다.

잘못했다고 한 것 같은데. 잘못했다는 걸 잘못 들은게 아닐까. 하지말 뭘 잘못들어야 잘못했다고 잘못들을 수가 있나?

“네가 그 유르반 영애랑 안 좋게 되고 나서 말이야.”

“유르반 영애?”

그건 또 누구야?

시엔은 잠시 생각 후에야 이 몸뚱이가 독을 마실 만큼 연모했던 여인이 바로 그런 이름이었음을 기억해냈다.

“아아. 유르반 영애. 맞아.”

“질질 짜고 다녀서 병신같다고 생각했는데. 거기다 자살까지 했다고, 그랬는데.”

시엔도 그리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허나 속마음을 감추고 일단 맞장구를 쳐 준다.

“그랬는데?”

“가슴이 아파. 너도 이렇게 아팠니?”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또 무슨?

“어머니께서 왜 그랬는지 알아. 어머니께서 날 사랑하시는 것도 알아. 그건 이해하겠는데, 비설 양을 생각하면, 어떻게 해도 어머니를 용서할 수가 없어.”

이건 또 웬 재미있는 소리람.

시엔이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어머니가 보통이신 게 아닌데, 거기서 비설 양이 어떤 수모를 겪었을까. 모멸감에 몸을 떨지는 않았을까. 나 너무 걱정되는데, 또 미안해서 얼굴을 들 수도 없고······”

수모? 모멸감? 비설은 그때 보석을 선물받았다 좋아서 자랑까지 하러 오지 않았던가. 비설의 마음속에서 후작 부인은 좋은 사람에 속해 있으니.

“힘들겠네. 그래서? 그래서 어쩌려고?”

시엔이 눈을 반짝이며 재촉했다.

재미있을 것 같은데, 오늘은 일도 많이 했겠다. 이걸로 시간이나 때울 속셈이었다.

< 10. 완장을 차고 손가락을 뻗으면 [1]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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