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도적의 피와 살로 비어진 곳간을 채우리라 [3] >
카쉬 뤼롱텔은 신이 난 듯 숲을 둘러보았다.
엘프의 숲은 드워프에게도 퍽 흥미로운 장소였다. 그네들의 작품은 광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엘프의 숲의 거대하며 곧은 나무들은 드워프의 눈엔 흔치 않은 중앙기둥감이 천지에 널린 셈이었으니.
허나 뤼롱텔의 반응을 보아하니 비단 그것 때문은 아닌 듯했다.
“오오. 내가 날고 있어. 세상에. 세상에.”
땅 위 혹은 땅 속에 사는 드워프에게 하늘을 나는 경험이란 대단히 신기한 모양. 뤼롱텔은 흥미 반 두려움 반으로 연신 하늘과 땅을 둘러보며 주억거리느라 바쁘다.
시엔이 늙은 드워프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네요.”
“흠흠. 허어.”
이상한 일이 아닌가. 잘은 몰라도 광산에서 같이 밥을 먹던 동료가 그 꼴을 당했건만 잘도 이런 기분으로 엘프의 나뭇잎을 타고 있으니.
뤼롱텔이 그제야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었어요.”
“거짓부렁엔 영 서툴러서 말이오. 사실 뭐. 맞을 놈이 맞았지. 지벌이 내린 걸세. 훔친 미스릴이라니. 끔찍하군. 그걸로 뭘 만들 수가 있다고.”
“드워프답네요.”
시엔에 말에 뤼롱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늙은 얼굴에 씁슬한 미소가 번진다.
“요즘은 그렇지도 않소. 다들 그저 뭐라도 만들 수 있으면 다 좋다고 하니. 그게 아니라도 이 늙은이는 원래가 드워프로 돼먹지가 않은 놈팽이라.”
“왜죠?”
“이걸 보시오. 내 혼신의 역작이라오.”
뤼롱텔이 등에 매고 있던 곡괭이를 끌러 내밀었다. 인간의 것보다 두 배는 무겁다.
계속해서 관리가 잘 된 오래된 물건이란 자체로 어떤 향수가 서리곤 했다.
빗금 빼곡하니 반짝이는 곡괭이의 날. 거기엔 땅과 숲과 그 아래 땅을 파는 드워프들이 음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이 분명한데 그 정교함이 아직 살아있으니. 작업 도구임에도 그 예술적 가치는 심상치 않았다.
“멋진데요?”
“그게 멋지단 말이오? 하긴 인간이니. 잘 모르겠군. 이건 말이오.”
뤼롱텔의 얼굴에 회한이 서렸다.
“이제 막 수염이 나는 애송이도 이 정도는 만들 수가 있다오. 내가 평생을 연마한 기술은 딱 그 정도요.”
시엔이 다시 곡괭이를 들여다보았다.
왕자가 배운 학문에는 예술이 포함되어 있었다. 시엔의 안목엔 예술작품이나 다름없는 물건임에도, 이게 겨우 애송이가 만들 작품이라고.
뤼롱텔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세상에 그보다 더 가벼운 곡괭이는 없을 거요. 타고나길 워낙에 허약하니 남들의 절반도 못 되는 반푼이라오.”
일반적인 곡괭이의 두 배는 무거운 장비. 휘두르긴 커녕 들고만 다녀도 힘이 빠질 곡괭이인데. 이게 가볍다고?
실력과 근력 모두 인간을 초월했으나 드워프는 그게 모자라다 자조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괴로움을 어찌 재단하라.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이 많으셨겠네요.”
“오래 살아서 좋은 꼴을 못 봤는데, 앞으로도 그럴 걸 왜인지 여기까지 살았소. 어쩌면 날 무시한 놈들 때문에라도 오기 때문에 살았지. 그런데 가는 데는 순서 없다더니.”
뤼롱텔이 킬킬거렸다.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오?”
“증언만 해 주시면 되죠. 광산에서 티란디스 아래를 판 일. 미스릴의 출하량. 그리고 살베지 백작이 관여했다는 거. 이거면 충분해요.”
“없는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닌데 뭐 문제겠소.”
“동족을 고발하는 일이 될 텐데도요?”
“내 말 들었잖소.”
“그래도 다를 텐데요.”
시엔이 조용히 뤼롱텔을 응시했다.
그거 잘 됐다 냉소나 흘리고 있는 것과, 그걸 아예 고발하는 일은 달랐다. 대저 내부의 고발자란 양심을 지키는 대신 증오를 사는 일이 아니던가.
늙은 드워프는 경멸을 받았을지언정 증오를 사진 않았으리라. 바로 이런 뜻이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게 아니겠소. 어차피 하나 죽일 놈 될 거면 있으나 없으나 한 치를 보냈다 이거 아니오.”
“흠.”
시엔이 곡괭이를 살펴보았다. 고작 곡괭이로 쓰기엔 너무나 아까운 작품이 아닌가.
“그래서, 이후엔 어떻게 할건데요?”
“글쎄. 어디 산속에 처박혀 살아야겠지. 어차피 갈 데 없는 몸이 될 거 아니오. 뭐. 이태까지 그래왔던 것도 아니니 새삼.
”갈데가 왜 없어요. 실력 있는 장인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내 말했지만, 내 실력은······“
”드워프 기준이야 뤼롱텔 맘대로 하시고, 인간 기준에선 충분히 존경받을 실력이에요. 그러니 나랑 일이나 할래요?“
후작 성의 대장장이야 실력이 뛰어나긴 해도 드워프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러니 드워프 하나를 데리고 있으면 여러모로 장점이 많았다.
”고마운 말이외만 사양하겠소이다. 인간들 눈에야 대단해 보이더라도 내 실상을 아는데 그게 기꺼운 일이 될 수가 없다오. 이 늙은이가 더 비참해지는 꼴이니 야속하다 생각하지 말았으면 하오.“
뤼롱텔의 말이 맞았다.
본인이 괴롭다면 강제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말구요. 난 영지의 부행정관이에요.“
”그러시군. 흠.“
”모르겠어요? 부행정관이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내가 조만간 공사를 몇 개 해야 하는데, 나는 유능한 감독이 필요하죠. 대장장이가 아니라요. 뤼롱텔. 토목이랑 건축도 자신이 없어요?“
드워프의 특기란 비단 정련이나 무구 제작 수리에 있지 않았다. 건축과 토목의 달인들.
절벽에 길을 내고 땅에 굴을 뚫는 이들. 못 없이 집을 지으며, 망치만으로 절벽 안에 요새를 파내는 종족이 바로 드워프가 아니던가.
뤼롱텔의 표정이 미묘하다.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하니 아무래도 확답을 하기는 애매한 모양.
”흠. 흠. 내 생각해 보겠소이다.“
결국 시간이나 달라고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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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롱텔의 첫 증언은 세계수의 안, 한별의 앞에서 이루어졌다.
”결국, 숲 아래에 미스릴이 있었네요. 시엔은, 아니, 티란디스는 어떻게 할 건가요?“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아니요. 미스릴 말이에요.“
”아.“
엘프 입장에선 명확히 정리된 것이 없는 셈이었다.
처음엔 드워프가 땅굴을 팠으나, 이제는 인간이 땅굴을 파게 되었으니까. 도시 아래를 누군가 파먹고 있다는 건 달가운 일이 아니다. 세계수의 문제도 있고.
”내가 생각해 봤는데, 일이 끝나면 아마 갱도가 무너지지 않을까 싶은데.“
”무너진다구요?“
”왜 있잖아. 새로 심은 나무가 특이해서 통제가 안 되는 거지. 세계수의 힘이 있어도 말야.“
시엔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한별이 되묻는다.
”어째서지요? 시엔에겐 미스릴이 필요하지 않나요? 인간에겐, 아니 누구에게나 있어서 비교할 데 없는 보물이 아닌가요?“
”그야 뭐.“
시엔이 말끝을 흐렸다.
흑마법사에게 미스릴은 영 달갑지 않은 물건이다. 스스로 신성을 품어 마수며 악령에게 치명적인 금속이 아닌가.
그러니 세상에 풀면 풀수록 제 약점을 더 늘리는 꼴이었다. 아무리 금화가 좋다고 해서. 자기 약점을 그렇게 풀어놓으면 머저리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그리 말하기는 좀 그렇고.
”엘프는 오랫동안 티란디스의 일부였으니까. 초대 티란디스 때부터 쌓아온 신의를 황금으로 저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흠, 흠.“
말하고 나니 궁색하기 짝이 없다. 애초에 티란디스와 엘프가 뭐 신의라고 할 게 없었던 까닭이다.
엘프는 그냥 숲에 살 뿐이고, 티란디스는 엘프가 그냥 살기만 해도 얻는 이득을 취했으니.
요정목은 세계수의 허물 같은 것이니 엘프들에겐 원래 쓰레기나 마찬가지. 인간이 달라 하니 그냥 내어주는 것 뿐이고. 세계수 덕에 재해를 막고 영지 내 목질이 좋아지지 않았나.
여기 어디에 신의라고 할 게 있단 말인가.
허나 한별은 크게 감명받은 표정이었다.
”신의라. 시엔은 그리 생각하고 있었네요. 부끄럽기 짝이 없어요. 전 사실 그렇게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어. 응.“
시엔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사실 시엔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티란디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엘프는 엘프고, 티란디스는 티란디스였잖아요? 우리는 일부가 아니었어요. 초대 이후 수백년이나 말이예요.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잖아요?“
”그렇지. 뭐.“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우리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어요. 그렇지요?“
한별이 시엔을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시엔이 다음 티란디스가 되길 빌어야겠네요.“
”어. 그래. 고마워.“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드워프가 한 마디 툭 내뱉었다.
”저기 말이네. 그 괴물인지 나무인지. 거 마음대로 조종할 수가 있는 거요?“
”어느 정도는요.“
”암반층을 두 개나 뚫고 순식간에 갱도를 틀어막은 놈이 아니오. 그 정도로 힘이 좋으면 그냥 그걸로 끌어 올리는 건 못 하는 거요? 미스릴 광맥을 덩어리로 부숴다 지상으로 끌어올린다거나.“
드워프의 시각은 달랐다.
엘프가 나무를 보고 사랑스러워하듯이, 드워프는 그 기능에 주목했다.
”어?“
마수를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는 건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흐트브레카라타는 상급 마수다. 언데드로 따지면 데스나이트나 데미 리치 급의 전략병기라 할 수 있었으니.
세상에 데스나이트로 집을 짓거나 하는 흑마법사가 어디 있을까. 상급 마수로 광맥을 캔다는 건 흑마법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아주 위대한 발상의 전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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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때는 셋. 돌아올 때는 다섯.
뤼롱텔은 광산에서의 사태를 증언해 줄 증인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비설이 따라붙었다. 나름 명목을 가진 동행이었다.
”엘프 대사라. 생각지 못한 성과로군.“
”대사라기보단 중개인에 가까운 거죠. 실질적으로 어떤 교류는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티란디스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티란디스 후작의 집무실. 서리바람 숲에서 돌아온 시엔이 후작과 독대하는 중이었다.
”숲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이는 별로 없는 법이다. 허나 엘프들은 알고 있지. 좋다. 허나 네 일이 그게 아니었으니. 보고하도록.“
”뭐 별다른 일은 없었지만요.“
시엔이 서리바람 숲에서의 사건을 풀었다.
서리바람 숲 아래에 미스릴 광맥. 살베지 영지의 탑클라우드 산 광산 아래 드워프들이 그걸 알았고, 그 결과 도광을 하는 중이었다.
흑마법 이야기는 쏙 뺐다.
마수는 엘프들의 도움으로 슬쩍 포장했다.
그리하여 결국 미스릴 갱도를 차단하고 42명의 드워프를 현지 구금했다. 두당 금괴 하나의 보석금을 선언했고, 그간 채굴한 미스릴 세 수레의 반환을 약속받았다.
도광을 한다는 심적 의심은 있었다.
엘프들이 지하에 드워프가 땅굴을 판다는 진정서를 보내왔고, 그로 인해 세계수에 문제가 생겨 목림생산길드의 산출량 감소도 눈에 두드러졌다.
허나 심증만으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래서 왕성에 가서 전쟁을 사소한 분쟁으로 포장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지 않았던가. 그 결과로 내년 겨울엔 칼을 뽑을 생각이었다.
시엔을 보낸 것은 사실 엘프들에게 보내는 편지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티란디스가 손을 놓은 것이 아니니 인내심을 가져 달라는 뜻.
능력이 있으면 전쟁에 필요한 명분이나마 조금 보태 가져올 수 있을까 싶었더니.
아예 혼자 해결까지 보고 온 참이 아닌가.
후작의 눈이 온화한 빛을 뿜었다.
티란디스에 어울리지 않는 얼간이가 죽다 살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 유능한 이는 가문을 키우고, 가문은 유능한 이를 키우니 앞으로 티란디스는 더욱 더 날아오르리라.
”미스릴 세 수레라. 반환은 언제지?“
”거기서부턴 후작님께서 나설 문제라서요. 두 수레는 드워프들이 반환하겠지만, 나머지는 살베지 백작이 먹었더군요.“
”말로는 안 통하겠군.“
미스릴은 전략 자원이다.
미스릴로 무장한 군대는 그 자체로 전쟁의 판도를 바꿀 최고의 병기가 된다.
사슬 갑옷을 짜면 칼이 들지 않고, 판금 갑옷을 입히면 화살비 속에서도 다치지 않는다.
미스릴로 랜스 끝을 보강하기만 해도, 기병의 돌파력은 그렇지 않은 것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니까.
그렇기에 미스릴은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이웃에겐 팔 수 없는 물건이다. 살베지 백작이 도광을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리라.
이제 와 반환을 요구한다고 해서 당연히 돌려줄 리가 없다. 오히려 훔쳐간 미스릴로 제 군대를 강화할 것이 뻔했다.
”내년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게 되었군.“
후작이 말했다.
전쟁은 당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승패에 가문의 영화가 갈리고, 그렇게 새로 짜인 판은 누군가에겐 달갑고 또 누군가에겐 달갑지 않다.
그렇기에 티란디스와 살베지의 전쟁은 꽤 길어질 예정이었다. 왕성의 개입은 막았으나, 그러한 만큼 여러 귀족가가 끼어드니 병력은 늘어나고 전쟁은 길어지며 피는 계속해서 흐르게 된다.
하지만 이만큼이나 확연한 명분이 있다면 다르다. 누구의 잘못인지 훤한 싸움에 가해자의 편을 들기는 쉽지 않은 선택이니까.
그리고 제3자의 개입이 없다면, 티란디스와 살베지의 전력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굳이 창칼을 맞대지 않아도 이미 이긴 상황이다.
”좋다. 시엔. 네 능력을 증명했구나. 현 시간부로 영지의 부행정관으로 활동하도록.“
”예, 후작님.“
시엔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 용건은 다 끝났나 싶었는데, 후작이 문득 말을 이었다.
”시엔.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할 것 같나?“
”흠. 글쎄요.“
시엔이 턱을 매만졌다.
”제가 경험이 모자르니 혹여나 모를 놓친 여죄가 있을 수 있겠죠? 누군가 조사를 해야 할 텐데.“
”호오. 그래서?“
”사안이 사안이니 기사단이 조사에 나서야겠고, 미스릴이 얽힌 일인데 아주 자세하게, 천천히 차근차근 조사를 해 봐야겠죠.“
시엔의 생각이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광산에 병력을 보내 무기한 점거.
그에 따른 피해를 이기지 못한 살베지 백작이 교섭에 나서거나 혹은 병력을 배치하길 기다리는 것이다.
후작의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이내 들어본 적 없는 자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좋다. 부행정관은 나가 보도록.“
”예. 후작님.“
시엔이 고개를 숙였다.
< 8. 도적의 피와 살로 비어진 곳간을 채우리라 [3]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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