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27화 (27/268)

< 8. 도적의 피와 살로 비어진 곳간을 채우리라 [2] >

“나무뿌리니까 그냥 파내자는데?”

“이게? 영 끄림직한데.”

“그럼 손이나 빨고 있을까. 안쪽에 한두명도 아니고.”

“후딱 끝내버리세.”

드워프들이 흐트브레카라타의 뿌리가 만든 회백색의 살벽에 다가갔다. 강철 곡괭이가 호선을 그린다. 푹, 물렁한 살점으로 이루어진 벽 속에 곡괭이가 깊이 파고들었다.

산 것의 몸을 꿰뚫는 야멸찬 촉감에 드워프가 몸서리를 치며 곡괭이를 뽑아낸다.

촤악. 뻥 뚫린 구멍 사이로 검은 액체가 뿜어져나온다. 드워프 인부가 흐트브레카라타의 체액을 뒤집어썼다.

“웩! 이게 무슨 냄새야!”

여름날 썩어 문드러진 시신에서나 날 법한 끔찍한 시취였다.

“욱, 냄새!”

“크크크! 저 꼴 좀 보라지!”

다른 광부가 웃음을 터뜨렸다. 또 다른 광부가 핀잔을 준다.

“안 파? 우리는 저 꼴이 안 될 것 같나?”

“젠장! 더럽게 이게 뭐야!”

푹. 푹. 촤악. 촤악. 드워프들이 곡괭이질을 하고, 어김없이 흐트브레카라타의 체액이 뿜어진다. 아무리 조심하려 해도 그 수압이 상당하니 결국 모두가 그렇게 뒤집어쓰고 만다.

악취는 물론이고 끈적하니 더럽기 짝이 없다. 왠지 피부가 따끔거리는 기분이 들기도.

그때였다.

치직······.

귓가에 나지막히 울리는 소리에 드워프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머리를 보호하는 광산모에서 나는 소리다. 드워프가 무슨 일인가 제 광산모를 확인한다.

“뭐여? 대체?”

드워프가 제 광산모를 소매로 쓱 훑었다. 그러자 뻥 뚫린 구멍이 보란듯이 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런, 젠장! 중지, 작업 중지! 아악! 으아아악!”

이미 늦었다.

흐트브레카라타의 체액은 대기와 만나 한 박자 늦게 산성을 띈다.

체액을 뒤집어 쓴 광부들의 피부가 녹아내렸다. 작업복이 녹고 살이 녹은 진물이 한데 섞여 뭉근한 덩어리로 뚝뚝 떨어졌다.

으아아아. 끄아아아.

순식간에 갱도 내부가 아비규환의 장이 된다. 온 몸이 녹아내리고 있으니 산채로 불타는 것과 다름이 없다. 바닥을 구르고 그저 몸을 털어내도 끈적한 체액은 집요하게 신체를 녹여냈다.

그리고 마침내 흐트브레카라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촉수를 뻗고, 흐물흐물하게 먹기 좋은 먹잇감이 웬일로 풍년이다. 살랑살랑 잔뿌리가 뻗어 먹이들을 붙들었다.

잠시 후.

티이 앙샬이 부랴부랴 특별 갱도로 돌아왔을 때, 세상 가장 끔찍한 장면을 목도했다.

잿빛 육벽 앞으로 녹다 만 드워프들이 반쯤 동화되어 붙었다. 눈구멍이며 코와 입, 귀 등등 신체의 구멍이란 구멍에선 지네와 같은 촉수가 튀어나와 꿈틀거린다.

으으······ 신음소리 여럿이 계속해서 울려퍼졌다.

뤼롱텔이 이죽거렸다.

“땅잡이 아주 뛰어난 판단이었구만.”

“이 빌어먹을 늙은, 빌어쳐먹을 개자식이!”

앙샬이 뤼롱텔에게 달려들었다. 거칠게 받혀 넘어진 뤼롱텔의 위로 앙샬이 올라타 주먹을 연신 휘두른다.

퍽. 퍽. 퍽. 주먹이 꽂히나 늙은 드워프는 저항하지 않고 그저 경멸에 찬 시선만을 거두지 않을 뿐이다.

뤼롱텔은 손재주가 모자라 실력 없는 장인이고, 체력이 달려 형편없는 광부였다.

뭐 하나 잘하는 게 없이 나이만 먹고 나니 돌아오는 것은 은근하거나 혹은 노골적인 따돌림 뿐. 원수나 다름없는 광산 식구들이니 처참한 꼴을 당해도 그저 인과응보 지벌이 내린 것이지 않은가.

“헉, 빌어먹을, 빌어먹을 늙은이.”

앙샬이 몸을 일으켰다. 살아남은 광부들이 이제 어쩌냐는 듯 땅잡이를 바라본다. 허나 그라고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그저 있다고 하면.

“젠장, 그 빌어먹을 꼬맹이!”

앙샬이 다시 갱도를 내달렸다.

티란디스의 공자는 분명 모든것을 알고 있었다. 듣도보도 못한 끔찍한 것을 심어 갱도를 막고 굳이 찾아와 떠보기까지 했다.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광부들의 끔찍한 꼴이 떠올랐다. 그걸 살아있다 말할까. 죽은 것도 아니니 죽도 살도 못한 처참한 꼴이다.

열이 오른 앙샬이 한달음에 광산을 올랐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제 방의 문을 부술 듯이 걷어찼다. 드워프의 발길질에 두꺼운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베른닐. 요즘 근무 태만이다? 삯을 좀 까야 하려나. 어째 호위가 시간만 나면 체력단련이나 하고 말야.”

“제 실력이 곧 도련님의 호위기사의 실력 아닙니까.”

“아니. 그래도 좀 혹여 모르는 위험에 항상 긴장하고 그런 모습이 좀 있어야지. 맨날 엉거주춤 기마 자세나 하고 말야. 그러······”

쿵!

문짝이 날아가는 소리에 베른닐이 지체없이 검을 빼어들었다.

검끝이 정확히 불청객에게 향하고, 단단히 잡힌 자세에선 흐릿하나마 굳센 기백이 느껴졌다.

확실히 늘긴 늘었네. 엘딘 영감이 가르치긴 잘 가르치는 모양이지.

시엔이 흐뭇하게 웃으며 갑자기 난입한 드워프를 바라보았다.

“드워프들은 문을 그렇게 열어요?”

“이 개자식이!”

“멈춰!”

앙샬이 달려들자 베른닐이 그 앞을 막아선다.

당장 칼날이 앞에 있으면 정신이 들기 마련. 거기에 슬그머니 오러가 서려있는 바에야.

앙샬이 방향을 틀었다. 제 책상으로 맹렬히 돌진하더니, 그 뒤에 걸린 거대한 양날 도끼를 움켜쥔다.

뭉뚝한 드워프의 체구와 같은 크기의 흉악하기 그지 없는 무기였다.

“오냐. 해보자 이거지. 산채로 묻어버려도 시원치 않은 인간 놈들!”

베른닐은 그저 표정을 굳히며 칼끝을 내밀 뿐이었다.

사실 같은 조건이면 인간은 여러 이종족들 사이에서 전투력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드워프는 선천적으로 용력을 타고나는 이들이라 지하의 암벽을 간단히 부수는 치들이 아닌가.

한 광산의 주인, 그러니까 땅잡이 쯤 되면 베른닐 수준에선 상대할 수 없으리라.

“잠깐. 우리 진정하자고.”

“진정?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아. 너무 무섭다. 나 그럼 이대로 도망칠 겁니다? 너무 무서우니까 아예 이쪽으로는 가까이도 오지 말아야지. 그럼 되겠어요?”

“무슨 개소리를!”

“음. 갱도 안에 아무도 없었나? 인질을 좀 잡을 생각이었는데 잘 안 됐나 보네요.”

“너 이······”

으득. 앙샬이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그 뿐, 분노한 표정은 그대로이나, 그 거대한 양날 도끼를 이내 땅바닥에 내던져버리고 만다.

“당장 저 빌어먹을 괴물을 치워!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나?”

“괴물이라뇨. 누구 말로는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멋진 나무라던데요.”

“개 같은 소리 집어치워! 당장 뽑아내지 않으면······”

“안 뽑으면 뭐요? 이상하네. 내 땅에 내가 뭐 심는 것도 문제가 되나?”

“그래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선을 넘었어! 너는 선을 넘었다고 이 사악한······!”

“선을 넘었다라······”

시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도둑질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지. 그럼 그 정도 각오도 없이 남의 집을 털었단 말야? 빵을 훔치면 매를 맞고 금화를 훔치면 광장에 매달지. 그럼 미스릴을 훔쳐간 천하의 도둑놈들에겐 그만큼 특별한 형벌이 필요하지 않아?”

그러자 베른닐이 뜨악한 표정으로 시엔을 바라보았다.

“미, 미스릴 말입니까?”

“베른닐은 지금 낄 때 아냐.”

“아. 옙.”

베른닐이 다시 사나운 표정으로 검을 겨눴다. 이제 와서 다시 그런다고 해도 이미 꽤 위압감이 상하고 말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건 알 바 아니고.”

“허나 정도를 넘었어! 이건 너무 심했다고!”

“심하긴.”

시엔이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난 분명히 기회를 줬어. 짚히는 게 있었으면 바로 실토를 했어야지. 그때까지도 내 눈치만 보고 있더라? 얘가 알고 이러나 모르고 이러나 하고.”

시엔은 이미 두 번이나 자비를 베풀었다.

처음 왔을 때엔 좋게 물어봤고, 두 번째에도 실토할 기회를 주었다. 그렇다면 세 번째는 필요가 없다. 몇 번이나 기회를 주어도 이후론 마찬가지일 테니까.

“뭘 원하나.”

앙샬의 목소리가 떨린다. 절제되지 못한 분노가 여실히 스민 그런 음성이었다.

“훔친 물건은 돌려줘야지. 일단 광산에서 난 모든 미스릴을 티란디스에게 반납할 것.”

“모든 미스릴이라고! 그럴 수는 없다!”

“그럴 수는 없다고? 어째서?”

“우리가 캔 미스릴이다! 우리가 발견하고 우리가 캔 거야! 우리가 아니었음 네놈은 거기에 그게 있는줄도 모르고 있지 않았나!”

“하핫. 그거 참신한 개소리인데.”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도둑에게 도둑질한 수고비를 챙겨줘야 하지? 힘겹게 도둑질했으니 그 몫을 좀 남겨둬야 하나?”

“네놈들은 몰랐다! 땅 아래 보물을 두고도 거기에 뭐가 있는지조차 몰랐다고!”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다. 드워프.”

마침내 시엔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너희는 알았잖아. 그럼 티란디스에게 알렸어야지. 그런데 안 그랬지.”

“그건······”

“나는 티란디스로 여기에 왔고, 죄인을 즉결 심판할 권리가 있어. 드워프가 땅 속에 생매장을 당하면. 음. 그리 억울하진 않겠네. 땅 좋아하잖아?”

“그런 법은 없다!”

“여긴 살베지 영지니까 없긴 하지. 허나 티란디스의 땅에선 있어. 죄인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지.”

“허나······”

“미스릴과는 별도로 죄인을 풀어주려면 보석금을 받아야지. 일단 죄인의 숫자부터 알아야겠네. 갱도 안에 몇이나 갇혀있어?”

“그건.”

“아냐. 됐어. 내가 맞춰볼께. 42명. 맞지?”

“그걸 어떻게······.”

“다 아는 수가 있다구. 그러니까 날 속이려 들면 안 돼. 42명이 너무 많다 싶으면 당장에라도 반절로 줄여줄 수가 있으니까.”

“큭······”

“자. 그동안 얼마나 캤어? 내 땅에서 내 것을 얼마나 훔쳐갔는지 좀 들어보자.”

“그건, 그러니까······”

앙샬이 머뭇거렸다.

하여간. 시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봐, 땅잡이. 지금 상황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지금 네 눈앞에 전쟁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구. 전쟁 말야. 고작 42명? 겨우 그 알량한 목숨 따위가 중요한 것 같아?”

앙샬이 움찔 몸을 떨었다.

“내가 아직도 양보해 주고 있잖아? 티란디스는 이제 그냥 밀어버리기만 해도 돼. 명분이 여기에 있으니까. 살베지 백작이라고 무슨 수가 있어서 너희를 보호해 줄 수 있겠어?”

“젠장. 내가 졌소. 내가 졌다고······”

앙샬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간 맴돌던 적의가 사라지고 그저 뒤늦은 후회의 그림자만이 짙게 드리운다.

항복 선언이었다.

세력이 있다는 게 바로 이런 건가.

문득 시엔이 생각했다.

천 년 전, 제국에겐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혼자였기 때문에.

고독하고 외로운 전쟁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전부 왕국이 불타버린 때문이다. 내 왕국, 내 땅, 내 백성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의무를 다하지 못한 이가 제 권세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러나 천 년이 지나 지금. 시엔에게는 권세가 있었다. 권세가 바로 이러한 것이었구나. 의무와 권리를 저버리지 않은 이가 누려야 할 마땅한 것이 바로 이것이로구나.

천년 전, 대륙 제일의 현자가 정성을 다해 키웠던 제왕의 씨앗이 점차 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래서. 미스릴이 총 얼마야?”

“세 수레요.”

“정련된 미스릴 괴로?”

“그렇소.”

미스릴이 세 수레라. 많이도 해먹었군.

이미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다.

“살베지 백작은 알고 있나?”

“그렇소. 이제 와서 말하지만, 우리라고 해서 처음부터 그리하려던 건 아니었으니까.”

“둘이 짜고 빼돌렸네. 뭐. 좋아. 이제 됐어.”

앙샬이 시엔의 눈치를 보았다.

“그럼 광부들은······”

“미스릴 세 수레가 반환되고, 그리고 머리 하나당 금괴 한 개씩의 보석금을 매기겠어. 그 전까지 죄인은 구금에 처할 거야.”

“하지만! 그 때까지 광부들이 버틸 수가 없단 말이오. 정녕 그들이 다 죽어야······”

“에이, 걔네가 다 돈인데 죽으면 되겠어?”

시엔이 키득거렸다.

“뿌리는 치워줄게. 길이 뚫리면 그 안에서 굶어죽을 걱정은 없잖아? 허나 죄인은 티란디스의 땅에 계속해서 머물러야 해.”

“······그렇게 하리다.”

“또 수작을 부릴 생각은 말고. 죄인 하나라도 티란디스의 땅을 벗어나면 광산 전체를 무너뜨리겠어. 그게 가능한지 의심되면 한 번 해 봐도 좋고.”

드워프 광산은 넓으니 고작 흐트브레카라타 한 그루로 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니까 즉 허세, 거짓말이었다. 카드 게임에선 뻥카라고도 하는 기술이다.

허나 이리 일러두면 제가 어찌 딴 마음을 먹겠는가. 이미 마음이 꺾였으니 감히 어쩌지 못하리라.

“내 약속하겠소.”

“믿을 수가 있어야지. 하여간. 그리고 증언을 해 줄 드워프 한 명이 필요해. 땅잡이가 직접 가 주는게 최고지만, 광산을 통제해야 하니 그건 무리고.”

“한 명 보내드리리라. 이제 되었소?”

앙샬이 순순히 대답했다.

시엔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제 되기는. 겨우 이제 시작일 뿐인데.

< 8. 도적의 피와 살로 비어진 곳간을 채우리라 [2]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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