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바다를 멀리하고 숲을 가까이하라 [4] >
“좀 더 챙겨주지. 그렇게 안 봤는데······.”
시엔이 손에 든 나뭇가지를 내려다보았다.
그야말로 손에 힘주면 똑 부러지는 잔가지였다. 손이 뭐야. 사마귀 몸통도 이것보단 더 두껍겠다.
길이도 겨우 손바닥 크기 남짓하니, 거기에 달린 이파리 세 장도 소담하니 귀엽기 짝이 없는 꼴이었다.
겨우 얻어낸 세계수의 가지가 이 모양이다.
‘당신같이 강대한 이에게 힘을 더할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어요?’
한별은 그렇게 말했다. 나이를 먹으면 고집이 세어진다더니, 천 년을 묵은 엘프가 과연 어떠하랴.
그나마도 이번 일을 최대한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쓰겠다는 명목 아래 받아낸 것이었다.
그래도 이게 바로 그 세계수의 가지였다. 이걸 자랑할 데가 없으니 이렇게 애석할 수가.
시엔이 연신 헤실거렸다.
그러자 베른닐이 옆에서 슬그머니 물어왔다.
“도련님. 그게 그렇게 좋으십니까?”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해? 이게 바로 세계수의 가지라구. 세계수의 가지. 세계수의 가지라니까?”
“음. 잘 모르겠습니다만.”
베른닐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시엔이 눈을 빛냈다. 마침 입이 근질근질한데, 요 작은 잔가지 하나가 어떤 의미인지 설명을 해 줄 기회였다.
“이건 보물이야. 베른닐. 이거 하나면 성 한 채는 살 수 있을 걸?”
“예?”
“이게 성 한 채라고.”
“이게 말입니까?”
베른닐은 영 못믿겠다는 표정이었다.
답답해진 시엔이 요 작은 가지의 가치에 대해 설명하려 할 때였다.
부유 나뭇잎, 시름요를 조종하던 비설이 슬그머니 제 물건을 내민다.
“나도 있는데.”
팔뚝보다 조금 짤막한 긴 봉이었다. 제대로 가공된 세계수의 가지였다. 끝에는 반투명한 붉은 구체가 달렸는데, 비대칭으로 못생긴 저 구체는 바로 세계수의 과육이다.
시엔이 들고 있는 잔가지와는 달리, 진짜 제대로 만들어진 세계수 완드.
세계수 완드라니. 가진 것만으로도 마법사의 격을 서너 단계나 올려주는 신물이다.
드워프도 변하고 하플링도 변하고 수인도 변했다는데, 어째서 엘프만이 오로지 저들의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지 알 만한 일이었다.
결국 스스로를 지키는 힘은 무력인 것을.
시엔이 정색했다.
“뭐지? 자기과시?”
“어려운 말은 몰라.”
“자랑이냐?”
“응. 자랑이야.”
이리 무구하게 나와버리면 오히려 맥이 빠진다. 시엔이 애써 생각했다.
남의 궁전보다 내 오두막이 소중한 법. 괜히 미련 갖지 말고 내 거나 잘 챙기자. 잘 챙겨야 하는데. 음. 아. 부럽다.
게다가 엘프들은 세계수 완드의 힘을 반의 반도 끌어내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이름 높은 희대의 명검으로 고기나 써는 꼴이었으니.
시엔이 입을 다물자, 비설이 슬금슬금 눈동자를 굴렸다.
제가 뭔가 실수를 한 것 같긴 한데, 그게 도통 뭔지 모르겠으니 눈치나 살피는 모양. 그러다 어색하게 다시 말을 꺼냈다.
“영감. 강하더라.”
“영감? 엘딘?”
“싸웠는데 오현이 졌어.”
“오현은 또 누군데?”
“유격대장. 한별을 빼면 제일 강한 사람.”
기어코 엘프 유격대원들과 대련을 벌이고 만 엘딘의 이야기였다. 과연. 아무래도 갑자기 나타난 도전자가 기존 챔피언을 꺾어버린 모양.
“오현이란 엘프가 그리 강한가?”
“14검수야.”
단검 14자루가 자유자재로 날며 공격한다 생각해 보라. 14검수란 14자루의 검을 다룬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검위공이 그런 상대를 이겼다는 뜻이었다. 이전에 엘프를 상대해 본 적이 없다고 했으니, 그 기괴한 검술을 상대로 승리를 따내기는 더욱 어려울 터.
“괴물인 건 알고 있었지만······”
시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엘프의 검술은 비검이라 불렸다. 정령과 소통하며 검을 띄워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것이다.
재림 전, 마법사들 사이엔 꽤나 의견이 분분한 주제기도 했다. 정령 마법으로 검을 날려서 싸우면, 그게 검술이냐 마법이냐 하는 분류의 문제 때문이었다.
아주 소수의 의견이지만, 엘프의 검은 인간 분류상 단검에 속하기 때문에 단검술이라 불러야 한다는 얼간이도 있었고.
“한별을 제외하면 제일 강하다고? 한별은 어떤데?”
“몰라. 지금까지 살면서 30자루까진 날려봤다는데, 그 이상은 쓸 필요가 없었대.”
“괴물이네. 너는?”
“나? 나는 이래.”
비설이 제 등을 들이밀었다. 사선으로 맨 검대를 보라는 뜻이었다. 줄줄이 엮인 단검이 총 5자루였다.
시엔이 대답했다.
“4검수네.”
“······어떻게 알았어?”
“한 자루라도 더 날리고 싶은 거 아냐? 그러니까 하나는 훈련용이겠지.”
“시엔, 똑똑해.”
“4자루라. 그렇게 뛰어난 건 아니네?”
“그래도 쟤는 이겼어.”
비설이 베른닐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베른닐이 펄쩍 뛰었다.
“제가 아직 낯설어서 그렇습니다! 익숙해지기만 하면 제가 이길 수 있습니다!”
“실전이었음. 너. 죽었어.”
“대련을 통해 성장하는 거다!”
“그럼 더 성장해. 지금은 죽어.”
“큭······.”
음. 검술로도 말빨로도 못 이기는 건가.
베른닐이 아직 갈 길이 멀었구나. 허나 분한 눈빛 속에 투지가 활활 타오르는 듯한 낯을 보니 그래도 마음가짐만은 벌써 천하제일이다.
아직은 덜떨어진 게 맞긴 하지만.
엘딘이 이 꼴을 봤으면 당장 대련이라며 흠씬 두들겨 주었을 것이 분명했다. 아쉽게도 지금 엘딘은 엘프 도시에서 그 좋아하는 대련을 신나게 펼치고 있었으니.
그렇게 시름요를 타고 날아가길 두 시간여. 순간 시야가 탁 트였다. 그 크기가 첨탑와 같은 나무들이 일시에 사라진 탓이었다.
겨울이나 누렇게 죽은 잡풀들이 우거진 산등성이를 타고 날아 올라가자, 마침내 끝없이 높은 절벽과 거기에 뻥 뚫린 거대한 동혈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워프들의 광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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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이 앙샬이요. 인간들하곤 달리 성씨가 앞에 있으니 그냥 앙샬이라 부르시오.”
티이 앙샬은 광산의 총책임자로, 드워프 용어로는 땅잡이라 부르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흠.”
“왜 그러시오?”
“아무것도 아닙니다.”
드워프도 하플링도 이젠 인간이 되었답니다. 문득 한별의 말이 스쳤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러면 확 느낌이 오고 만다.
재림 전, 천 년 전엔 드워프가 이런 식으로 제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가문의 시작 지역과 그간 만들어 낸 걸작을 줄줄 읊어내고 난 다음에야 이름이 나오지 않았던가.
굳이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었다.
무슨무슨 산맥의 몇 번째 자손이며, 위대한 무구 하나와 둘과 셋과 넷을 만들어낸 티이 가문의 앙샬이오.
거창한 자기소개였지만, 제 혈통과 조상, 그리고 그들이 이룩한 업적에 담긴 자부심이 담긴 훌륭한 인사법이었다. 천 년이 지나 그게 사라지고 만 것일까.
시엔이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자, 드워프의 표정이 점차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시엔이 급히 말했다.
“시엔 티란디스입니다. 수염이 참 멋지네요. 보다 보니 그만 넋을 잃었네요.”
“하핫! 티란디스가의 귀한 분이셨군! 미처 몰라뵈서 실례를 했소이다. 이러실 게 아니라 들어가서 이야기하지요.”
대저 인간의 권력이란 다른 종족에겐 그저 그런가보다 싶은 것이라. 티란디스의 이름 아래 냉큼 자세를 바꾸는 드워프라니.
역시나 생소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시엔이 광산 입구로부터 조금 안쪽의 방으로 안내를 따랐다. 동굴 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쾌적한 실내. 광산 기술만은 아직도 그대로인 모양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 대충 짐작이 갑니다만. 아마 저 귀쟁이의 헛소리를 듣고 오신 계지.”
“뭐야. 지저분한 게.”
비설이 눈을 부라렸다.
앙샬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거 다 헛소리요. 우리가 뭐 집어먹을 게 있다고 귀쟁이네 지하를 판단 말요.”
“거짓말.”
비설의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앙샬이 못 들은 척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인간들은 거 민감하지 않소이까. 우리도 뭐 마음대로 팔 수 있는 게 아뇨. 계약에 따라 개발한 광산이고. 살베지 백작님이 혹여라도 티란디스령 방향으론 곡괭이질도 하지 말라 할 정도였으니.”
“우리 영지에 침범하지 않았다는 거네요.”
“아무렴. 그렇고 말구.”
앙샬이 제 가슴을 통통 두드리며 말했다. 진심이라는 제스쳐였다.
“흠.”
시엔이 잠시 생각했다.
엘프는 땅 밑에 드워프가 땅굴을 판다 했다.
드워프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심적으로는 엘프가 맞다 생각이 들긴 했다. 어쨌거나 지하를 무언가 파헤치고 있고, 세계수의 뿌리가 상하고 있다 했으니. 한별이 그걸로 거짓말을 할 인물도 아니었고.
허나 드워프가 굳이 시침 뚝 떼고 숲 아래를 팔 이유가 있을까? 게다가 앙샬이 워낙에 당당하니 거짓말을 하는 낯도 아니었다.
드워프가 아니라면? 드워프는 그냥 살베지 영지 아래를 얌전히 파먹고, 엘프의 땅 아래엔 무언가 다른 것이 존재할 수도 있겠지.
물론, 확인해 보면 알 일이었다.
“광산을 좀 볼 수 있을까요?”
“뭐 굳이 그러시겠다면야 그러시오. 허나 흠. 일정을 넉넉히 잡으셔야 할 거요. 지금 여기가 지하 72층까지 뚫렸거든.”
“그렇게나 깊게요?”
“귀하께선 모르겠지만, 이리 깊게 팔 수 있는 광산은 드물다오. 그리고 땅 아래란 깊을수록 더 귀한 것들이 나오는 법이니.”
“둘러보려면 꽤 시간이 걸리겠네요. 며칠이나 걸릴까요?”
“층이라곤 해도 매 층마다 지류가 뻗진 않았으니 한 달이면 충분히 둘러보실 거외다만, 별 추천하진 않겠소.”
“왜죠?”
“지하는 지상과는 완전히 다르거든. 저 아래로 내려가시면, 동서남북이며 위아래가 완전히 다르다고 느끼실 거요. 오직 드워프만이 방향을 잡을 수가 있지.”
“과연. 그렇군요.”
시엔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지하에선 방위를 확인할 그 어떤 수단도 없다.
광맥이 자리를 잡은 이상 나침반도 무용이요, 그저 제 몸뚱아리의 운신을 각도 단위로 기억하는 수밖엔 없으니.
“그래도 둘러봐도 된다는 거죠?”
“굳이 그러시겠다면야. 안내인을 붙여 드리오리까?”
“아뇨. 괜찮아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오히려 믿음이 가네요. 그래도 나름대로 조사 차 왔는데, 아무것도 안 하긴 그렇고. 둘러보는 척은 좀 해야지. 언제든지 둘러봐도 상관없는 거죠?”
“하긴. 그렇긴 하오. 둘러보는 거야 언제든 상관없소이다.”
“그러면야. 바쁘신데 실례했습니다.”
시엔이 미소지었다.
듣고싶은 말은 다 들었다.
땅잡이의 방을 나서는데, 슬쩍 누군가 소매를 붙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비설이다.
검지와 약지로 시엔의 소매자락을 슬쩍 붙잡고는, 그 얼굴은 불퉁하니 뺨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솔직히 조금 귀엽긴 하다.
“왜?”
“끝?”
“그렇다잖아.”
“저거 거짓말.”
“별로 사기꾼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한별은 시엔보다 똑똑한 사람이야. 거짓말은 안 해.”
“그러면 뭐? 광산에라도 들어가 보자고?”
“응.”
“소용없어. 엘프의 숲에 초대받지 않은 인간이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데?”
“헤메다 얌전히 나가지.”
“여기도 마찬가지야. 드워프들이 작정하고 파 놨으면, 대놓고 숲으로 땅굴을 내서 우리가 거길 직접 통과해도 도무지 알아챌 수가 없거든.”
“칫.”
그러자 비설이 뾰로통하니 등을 돌려 가버렸다. 베른닐이 난감한 시선을 보내왔다.
“도련님, 이제 어쩌죠?”
“어쩌긴. 광산을 조사해야지.”
“하지만 방금 말씀하졌잖습니까. 해봐야 소용 없는 일이라고.”
“그것도 그렇지. 아. 베른닐. 얼른 가서 비설 좀 잡아놔. 저거 삐친 것 같던데, 하는 거 보니까 저 혼자 나뭇잎 타고 날아가는 거 아닌지 몰라.”
“맞습니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베른닐이 격렬히 동의하며 급히 비설을 쫒았다. 시엔이 킥킥대다, 저 안쪽으로 깊숙히 뚫린 드넓은 터널의 끝을 응시했다.
‘샤-드 카하라. 르뵈 셴 퍄마 시엔. 세-트라 페엥 블랑셰.’
시엔의 눈동자가 검게 물들었다. 음차원 에너지가 들불처럼 번져 시엔의 몸을 휘감아 돌고는 이내 세계수의 가지로 흘러들었다.
아무리 잔가지라도 세계수의 가지는 엄연히 신물에 속하는 것. 음차원 에너지가 가지를 통과하며 더 깊은 어둠 속 어둠 색으로 정련되어간다.
그렇게 정순해진 음차원 에너지가 강대한 악령을 깨웠다. 어둠 속에서 요요히 빛나는 녹색의 사령석. 악몽을 주관하는 악령 해피 드리머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흑마법사를 함부로 초대해선 안 되지.”
앙샬은 분명 제 입으로, 그리고 제 의지로 말했다. 언제든 둘러봐도 상관없다고.
한번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약속이 되어 얼어붙어 역사가 된다. 그러니 입조심은 아무리 해도 과한 것은 아니니.
망령은 자연스러운 것이나 악령은 부정한 것. 부정한 것은 기본적으로 이 세계에 거부당한다. 그러니 악령은 자유롭지 않다.
흑마법사가 사역하는 악령은 음차원 에너지를 받아 그 제약을 어느 정도 뛰어넘을 수 있었다.
게다가 시엔은 경지에 비해 음차원 에너지가 워낙에 적은 상태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 장소의 주인 된 이가 출입을 허락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가서 둘러보고 있으렴. 내 필요할 때에 너를 다시 부를 터이니. 내 항상 너를 지켜보고 있으마.
심령이 연결된 악령이 시엔의 의지를 전달받았다.
해피 드리머가 투명한 로브 자락을 펼치며 나래를 편다. 그리곤 아득히 뻗은 광산의 통로 너머로 훨훨 날아가기 시작했다.
< 7. 바다를 멀리하고 숲을 가까이하라 [4]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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