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바다를 멀리하고 숲을 가까이하라 [3] >
엘프의 도시는 넓지 않으나, 엘프는 사방 천지에 널려 있었다.
면적 당 인구의 차이점이었다.
인간의 도시는 수평으로 뻗으나, 엘프의 도시는 수직으로도 뻗어나가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나무의 몸통마다 위아래로 길쭉한 집들이 붙어 군체를 이룬다. 낮은 것은 지상으로부터 높은 것은 성탑보다 높은 곳에 지어지기도 했다.
테라스 구조의 현관에 하나씩 매달린 튼튼한 나무 밧줄들은 아마 계단 대신이라. 줄줄이 지상까지 드리워 내린 밧줄들.
땅에는 얕은 강의 지류가 수십 줄기로 나뉘어 흘렀다. 이 겨울에도 얼지 않아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한편에선 새의 지저귐과 같은 기이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둥글게 모여 노래를 부르는 엘프들이 보였다.
어린 엘프들은 맑게 웃으며 나무를 타고 지상을 뛰며 달음박질을 치고, 연인은 걷고 친구들은 날며 어울리니 꺄르르 경쾌한 소리가 온 사방에서 울려펴졌다.
“허허.”
엘딘이 그저 웃으며 엘프들의 도시를 바라보았다. 감탄에 겨워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살면서 엘프의 도시에 발을 들이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시엔 역시 재림 전에 한 번 방문해 본 적이 전부였으니.
그렇다고 엘프들이 딱히 폐쇄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엘프가 다른 종족을 배척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
나뭇잎을 타고 날아가는 동안 말을 붙여온 엘프만 몇 명이었던가. 지금도 어린 엘프들이 깔깔거리며 뒤를 쫓고, 나무 위에선 연신 어서 와, 인간들, 하고 인사가 쏟아졌다.
그러나 엘프의 도시를 방문하기는 어렵다.
엘프의 숲은 자체로 감각을 뒤트는 미로. 초대받지 않은 이는 온전히 밖으로 되돌아 나온다.
근데 초대를 해 줘야 말이지.
넓다란 광장 중앙, 유달리 작아 보이는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띄었다.
작아 보인다뿐이지, 실상은 장정 서넛이 손을 잡고 끌어안아야 할 아름드리 거목이다. 다른 나무들이 워낙에 크니, 정상적인 형태의 나무가 오히려 작게 보이는 것이다.
세계수였다.
나뭇잎은 세계수 앞에서 멈추었다.
엘프 구경꾼들이 어느새 광장에 몰려와 둥근 원을 이루었다. 엘딘이 허허 웃음을 흘리고, 베른닐은 부담스러운지 어깨를 움츠렸다.
비설이 시엔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시엔은 숲지기 님을 만나러 갈 거야.”
“공자만인가?”
“응. 너희는 쉬고 있어. 돌아다녀도 돼. 안내인을 붙여 줄까? 음. 아. 거기 현아! 이리 좀 와 봐!”
비설이 한 곳을 보며 외치자, 엘프 청년 하나가 만세를 부르며 뛰쳐나왔다. 잔뜩 신이 난 모양새였다.
“야호! 나다! 고마워, 설! 인간들, 안녕! 어디부터 볼래? 버섯농장? 곰 사육장? 이 계절이면 이끼 설대도 참 볼만 할 텐데. 아. 참. 난 유현이야. 인간들은?”
상당히 수더분한 엘프였다.
시엔이 엘딘에게 슬쩍 말했다.
“잘됐네요. 여기 오실 때부터 엘프의 숲을 찾으시더니. 이참에 제대로 관광이나 하시죠.”
“에잉. 그때는 그냥 아무 말이나 던진거지.”
“아니. 왜 아무 말이나 던지고 그러십니까? 난 또 검위공께서 숲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지.”
“거야 자네가 입 다물고 한마디도 안 할 기세였잖나. 그러니 나오는대로 지껄여 본 거지. 나무야 실컷 봤는데 뭐하러 나무를 더 보나?”
“그럼 그냥 방이나 하나 내 달라 하시죠. 이참에 잠이나 푹 주무시지.”
“것보다 더 좋은 생각이 있다네. 엘프 검사들은 기묘한 검법을 익힌다던데. 이 참에 내 한번 봐야겠어.”
시엔이 혀를 쯧쯧 찼다.
하여간 전사들이란. 대체 어디서건 몸을 못 움직여 안달인 치들이다. 심지어 이 평화로운 엘프 도시를 보고서도 대련을 할 생각이 든단 말야?
하여간 머릿속까지 근육이 차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나저나 세계수가 참 실한데 어떻게 가지 하나 얻을 방법이 없을까? 아직 제대로 된 연구결과도 없으니 한번 파 보고 싶은데. 이파리 같은 거 한 장만 달라하면 주려나?
“시엔. 이쪽.”
비설의 말에, 시엔이 정신을 차렸다.
세계수의 앞으로 다가가자, 밑동이 좌우로 갈라지며 지하로 뻗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참 걸어 내려가자 넓은 방이 나타나고, 단아한 인상의 엘프 여인이 몸을 일으켰다.
“숲지기 님. 여기 티란디스.”
“고마워요. 비설.”
“그럼 나 여기 있어도 돼?”
“안 됩니다.”
비설의 귀가 축 쳐졌다.
“조용히 있어도 안 돼?”
“안 돼요.”
“윽. 숲지기 님. 나빠.”
비설은 그렇게 말하고 몸을 홱 돌렸다.
밖으로 나가나 싶더니, 쾅! 하고 부서져라 문을 세차게 닫았다. 엘프 여인이 킥킥 어울리지 않는 개구장이 같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다시 말했다.
“비설. 안 돼요.”
쳇. 안 통하네. 문 너머에서 비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밖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모양.
“어서 오세요. 흑마법사.”
“시엔 티란디스야.”
“한별이에요.”
엘프의 예법은 인간과는 다르다.
상대를 존중한다면 존대건 평어건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제 편한 대로 말하고 제 편한 대로 들으니 이 얼마나 편리한 삶인가.
“시간 앞에 모든 것들이 잊혀지고 사라져가죠. 허나 지금 제 앞에 이미 없어지고 말았다 여긴 이가 나타났네요.”
“엘프들은 잊지 않았나?”
“잊었어요. 이제 기억하는 이는 아마 저 혼자랍니다. 다른 엘프들은 몰라요. 세상에 이미 사라진 것을 굳이 가르칠 필요가 없으니 그렇게 잊혀져버린 거지요.”
“혼자 알고 있다고?”
“저는 그 시절부터 살아왔으니까요. 인간들이 재앙이라 부르는 전쟁 이전부터. 참으로 오래 살았죠.”
“재앙?”
“아주 오랜 시간 전, 한 명의 흑마법사가 제국과 전쟁을 벌였지요. 그 이후로 인간은 큰 두려움이 생겼어요. 혹시나 그와 같은 존재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본인 이야기를 남의 입에서 듣는 기분이란.
시엔이 괜히 쑥쓰러운 미소를 짓는 사이, 한별이 말을 이었다.
“저는 그이를 제 눈으로 본 적이 있답니다. 아주 강대한 영혼이었지요. 다시는 그와 같은 이를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과연.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흠흠. 오래 살았네.”
엘프는 오래 산다. 인간의 세 배 정도였다.
허나 숲지기라 불리는 한 도시의 수장은 달랐다. 그네들은 세계수와 함께 살며, 스스로 자리를 넘겨주기 이전에는 항상 그 운명을 함께했다.
그렇다고 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영생이 가능하다 뿐이지, 그네들 역시 다른 엘프들과 비슷한 시간을 살며 숲지기를 물려주곤 했으니까.
한별이 그윽한 미소를 띄웠다.
“아까 그 아이를 보셨나요? 엘프답지 않게 말수가 별로 없는 아이죠.”
“인간은 아예 다 다른데 뭘. 인간답지 않다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니까.”
“엘프도 그렇답니다. 제겐 아직 삶이 즐겁고 소중하고. 아마 살아온 시간만큼 더 살고, 그 때에 또 그만큼 더 살아도 마찬가지겠죠. 이상한가요?”
“아니. 별로. 그래도 신기하긴 하네.”
“저 역시 그래요. 흑마법사를 다시 볼 줄은 몰랐으니까요. 허나 지금 흑마법사로 방문하신 건 아니시잖아요? 작은 티란디스.”
“시엔이면 돼.”
“좋아요. 작은 시엔.”
“작다는 말은 좀 빼 줘.”
농담이라도 싫은 건 싫은 거다.
시엔이 눈살을 찌푸리자 한별이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천 년을 살았다면서 참 답지못한 웃음이다.
“드워프들이 숲 아래에 땅굴을 파고 있답니다. 이미 세계수의 뿌리가 상당 부분 상했어요. 제가 나서서 이야기를 해 봤지만, 들어 주질 않네요.”
“드워프들이?”
“네. 숲 바깥에 위치한 구름마루 봉우리 어귀에 그들의 광산이 있어요.”
“탑클라우드 산맥? 살베지 영지의 광산이군. 그런데 거기서 요 아래까지 파고들었다고? 그 거릴?”
서리바람숲은 티란디스 영지의 가장 외곽, 영지와 영지의 경계선 안쪽에 딱 들어와 있었다.
서리바람숲까지는 티란디스 영지. 그리고 그 북쪽의 산악지대는 살베지 백작의 땅이었다.
“드워프들이야 두더지 사촌쯤 되는 이들이잖아요? 숲 아래에 도대체 얼마나 굴을 파 놓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랍니다.”
“하지만, 왜? 굳이 남의 숲 아래를 파면서까지 광산을 넓힐 이유가 있나?”
“그건 잘 모르겠어요. 허나 이대로라면 꽤 곤란하잖아요. 세계수가 뿌리를 제대로 박지 않으면, 그 가호가 널리 미치지 못할 테니까요.”
티란디스 영지엔 가뭄도 홍수도 없다. 세계수가 보호하는 땅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영지 남쪽의 정글, 베인울프 수해의 목질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세계수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니, 당연히 영지의 목재 생산량에도 타격이 갈 수밖에.
“하지만 이상한걸. 드워프들이 탐욕스럽긴 해도 인간보단 훨씬 말이 통하는 족속들이잖아. 하지 말라면 보통 안 하지 않아?”
“이상하네요. 인간이 아직도 그리 생각하나요? 물론 아주 오래전엔 그랬었죠. 지금은 그렇지가 않지만.”
“그게 무슨 뜻이야?”
한별이 묘한 눈빛을 보내왔다.
“오래 전, 산맥엔 산의 종족들이, 숲에는 숲의 종족들이 살았어요. 그때의 드워프는 드워프로 살았고, 엘프는 엘프로 살아왔지요. 허나 지금은 그런 이들이 많지 않아요.”
“많지 않다고 하면?
“거의 엘프만이 엘프로 살고 있답니다. 드워프도 하플링도 수인들도 모두 인간이 되었어요. 생김새만 다른 인간들이죠.”
“흠.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네.”
한별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번에도 그래요. 드워프들은 자기네들은 티란디스의 땅에 광산을 파지 않았다고 주장해요. 자기네들은 살베지와 계약했다면서.”
“그렇겠지. 여기까지 광산을 팠다면 그건 침략이나 다름없으니까. 다름없는 게 아니라, 실제로 침략이지. 남의 땅에 광산을 파고 그 자원을 약탈한 거니까.”
“하지만 숲 아래엔 분명 토굴이 있어요. 그것도 상당한 규모랍니다. 실제로 세계수의 뿌리가 계속 상하고 있으니까요.”
한별이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시엔이 되물었다.
“증거는 있어?”
“제가 느끼고 있으니까요. 저는 세계수의 수호자랍니다. 그 정도는 느낄 수가 있지요.”
“그거뿐이야?”
“눈에 보이는 증거는 없답니다. 그저 제 느낌일 뿐이에요. 땅속을 들여다보는 재주는 없답니다.”
“흠······”
살베지 영지의 광산에서, 티란디스 영지의 숲 아래까지 파먹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드워프들은 그런 일은 절대 없다 잡아떼고, 엘프의 숲지기는 오로지 느낌만으로 그들이 범인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이대로면 엘프가 곤란해질까?”
“사실 녹색 바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베인울프 수해라 부르는 곳에 서서히 영기를 키우고 있는 중이랍니다. 앞으로 천 년 정도면 그곳 역시 엘프가 살 수 있는 땅이 되겠지요. 동족이 살 땅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잖아요?”
“지금은 딱히 불편한 게 없다는 뜻이네.”
“티란디스들은 조금 불편하겠지만요. 세계수의 가호는 함께 누리는 사이잖아요?”
“그래서 내가 여기 온 거고.”
“이번 티란디스를 본 적이 있답니다. 꽤 독특하신 분이었는데.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으시겠죠. 그분께선 뭐라 하시던가요?”
“피를 봐야 할 때는 피를 봐야 한다더라.”
한별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제 고운 머리채를 쓰다듬다, 거기 돋아난 이파리를 한 장 떼어 야금야금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거 뜯어내도 되는 거였어?”
“머릿잎이요? 한 장 드실래요?”
“그거 간식이었어?”
“너무 달아서 보통은 안 먹지만요.”
엘프의 생태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일단 궁금하니 한 장 받아 잘게 뜯어 입에 넣어보았다.
“윽.”
세상 느껴본 적이 없던 떫은 맛이 입안을 점령했다. 혀가 통제를 벗어난 것처럼 혼자 경련을 일으킬 정도였으니.
끄흑, 꺄하하하. 맑디 맑은 미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앞을 보니 한별이 팔걸이를 탕탕 두드리며 웃음을 터뜨리는 중이었다.
“꺄핫, 죄송해요. 하지만, 재밌잖아요.”
“······난 재미 없는데.”
“하지만 큽, 생각해 보세요. 당신 같은 강대한 분께서 머릿잎을 씹고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면. 아, 아흑, 꺄하핫.”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린 한별이 눈가를 훔쳤다. 진정된 듯 하더니 아직도 어깨가 간혹 들썩거리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재미있기도 했던 모양.
한별이 이내 웃음기를 지우고 말했다.
“또다시 전쟁은 겪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여기 온 거지. 피를 봐야 할 때는 피를 봐야겠지만. 그게 내 영민의 피여선 안 되니까.”
“과연. 믿음직한 티란디스가 나타났네요. 그렇다면 저희도 적극 협조하도록 하지요.”
한별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시엔이 마주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세계수 가지 하나만 주면 안 될까? 많이는 안 바라고 조금만, 아주 잔가지라도 상관없으니까······”
< 7. 바다를 멀리하고 숲을 가까이하라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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