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바다를 멀리하고 숲을 가까이하라 [2] >
티란디스 후작은 가문 그 자체였다.
이 몸뚱이에 남은 기억 속에서도, 후작에겐 어떤 호불호조차 없었다. 사람이면 응당 가져야 할 취미나 취향조차 가지지 않은 이.
후작의 관심은 오로지 가문과 영지 뿐.
대단히 귀족적인 사내였다. 그 역시 사람이 아닌가. 제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가문만을 위해 사는 삶이란 존경할 만한 일이 분명했다.
한때 후작은 시엔에게 그저 싸늘할 뿐이었다. 가문에 어떤 도움조차 되지 않고, 오히려 그 명성에 누를 끼칠 뿐인 식충이.
그러나 지금 후작의 눈빛은 달랐다. 예전과 비교하면 따스함마저 느껴질 지경이었으니.
”영지의 일을 맡거라. 무엇이든 좋다.“
후작이 후계 후보로 인정한 자식만이 영지의 일을 도맡을 수 있었다. 그러니 시엔을 그 후보자로 인정하겠다는 뜻이다.
”꼭 맡아야 할까요?“
”무능은 참아도 무용은 참아줄 수 없지.“
무능한 이라 해도 결국 어딘가엔 써먹을 구석이 있기 마련. 그러나 쓸모없는 이는 다르다.
기어코 영지의 일을 맡기겠다는 뜻이었다.
시엔이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무엇이든 말입니까?“
”무엇이든. 허나 제 능력 밖의 일이라면 네 한계만 드러내게 될 뿐일 터다.“
”제 한계라. 뭐. 좋습니다. 그러면 제가 영지의 행정관을 맡을 수 있을까요?“
영지의 직책 체계는 저마다 달라 통일되지 않았다. 그러나 행정이라 하면 결국 그 부임지의 모든 대소사를 어우르는 말이기도 했다.
도시의 행정관을 시장, 점령지의 행정관을 총독이라 불렀다. 그러니 영지의 행정관이란 결국 그 모든 결정의 중심, 영주를 말함이 아니던가.
후작의 입꼬리가 말려올라갔다.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이다.
”언젠간 누군가 행정관을 맡게 되겠지. 허나 지금은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딱히 부행정관을 둔 적은 없었던 것 같군.“
”부행정관이라면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요?“
”그건 스스로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시엔이 히죽 웃었다.
장녀인 카레네는 병무관으로 병사와 치안을 도맡았다. 무력을 쥐었으니 권력은 강력하나 원래 병무라는 것이 잘 해야 보통이요, 못 하면 욕을 먹는 자리가 아니던가.
차남인 로우드는 재무관으로 영지의 금화를 관리하니 그 역시 강력한 권력을 가졌다. 허나 마찬가지. 돈이란 아무리 막아놓아도 스스로 빈틈을 찾아 빠져나가는 것이니, 대저 현상 유지만으로도 벅찬 것이 아니던가.
그에 비해 행정관은 참으로 편리한 직책이다.
수하의 공은 곧 그 주인의 공. 눈에 보이는 것이 바로 행정이니 영민들에게 조금만 혜택이 있어도 그 칭송이 하늘을 찔렀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영지의 관료들이 워낙에 우수했다. 그 후작이 뽑은 이들이니 오죽하랴.
그러니 그저 웃자리 차지하고 가만히만 있어도 절로 이름이 높아지는 달콤한 자리였다.
후작은 그런 시엔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서랍에서 문서 몇 장을 꺼내들었다.
”다른 직책이라면 얼마든지 허락하겠으나. 자리가 자리인 만큼 먼저 증명을 해야겠지.“
”어떤 일이죠?“
”이건 목림생산길드의 산계 보고서지.“
시엔이 서류를 받아들었다.
슬쩍 훑어보니, 올해 생산량이 채 절반이나 될까 싶은 수준이었다.
”문제가 있군요.“
”서리바람 숲에 문제가 생겼다. 이번 연회에 좋게 해결하려 했으나, 잘 안 되더군.“
어째 국왕 탄신 연회에서 얼굴을 잘 비추지 않는다싶더니, 그러한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후작이 말을 이었다.
”결국 내년 겨울엔 피를 보게 될 참이야.“
”전쟁입니까?“
”올해는 이미 봄이 가깝지.“
전쟁은 사람을 갈아넣기에 그 때를 잘 잡아야 했다. 봄에는 모종을 심고 가을엔 수확을 하니 결국 손이 비는 것이 겨울이라.
”피를 보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나, 그 전에 달리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최선인 법. 서리바람 숲의 엘프들에게 가 보거라.“
”피를 봐야 할 정도의 문제를 알아서 해결해 보라는 말이네요?“
그러자 티란디스 후작이 대답했다.
”꼭 해결하지 않아도 좋다. 네가 어찌하는지 한번 봐야겠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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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란디스령은 베인울프 수해를 끼고 그 벌목을 통해 막대한 양의 목재를 생산해냈다.
비단 그 양 뿐만 아니라, 질에서도 월등했다.
오죽하면 대륙의 대표적 목재 생산지랴.
왕국을 넘어서 전 대륙으로 수출되는 가장 고급 목재들이 바로 티란디스의 특산품이었다.
양질의 목재가 생산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서리바람 숲에 자리잡은 엘프들 덕분이었다.
초대 티란디스는 당시에도 아름다운 비경으로 유명한 서리바람 숲에 영주성을 짓고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서리바람 숲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어떤 강력한 영기를 품은 신령한 숲이었던 것이다.
이때 고향을 잃은 한 무리의 엘프가 찾아와 살 곳을 찾았다. 자비로운 초대 티란디스는 기꺼이 도시를 비우고 숲을 내어주었다고.
”인간은 여기가 아니라도 살지만, 저들은 그렇지 않으니 이 양보로 서로의 삶이 오래도록 이어지리라.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가문의 역사서라 해봐야 쓰는 사람 마음인 게지. 게다가 살 땅을 구하는 치들이 얼마나 필사적이었겠나. 엘프들과 숲에서 싸운다? 차라리 용의 소굴을 터는 편이 낫겠군그래.“
”지금 한 가문의 초대가 질 것 같으니 집을 비워주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 상당히 현명한 분이셨음은 틀림없네. 숲의 영구 대여라. 엘프에게 숲을 내어주면서도 그 땅의 주인이 따로 있음을 정확히 해 둔 셈이 아닌가.“
엘딘이 그리 말했다.
시엔 역시 그에 동감했다. 어쩌면 그냥 빼앗길 수도 있는 땅을,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로 만들었으니 이 얼마나 지혜로운 양반이랴.
특히나 엘프처럼 받아낼 것이 많은 이들에겐 더욱더.
엘프는 신령한 숲에 세계수를 심어 그 터전을 마련했다.
세계수란 그 거창한 이름만큼이나 신비한 나무였는데, 그저 땅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것만으로도 홍수와 가뭄을 막고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기상천외한 능력을 가졌다.
그 뿌리가 끝도 없이 뻗어나가며, 다른 나무들과 접붙어 상생하는데, 그렇게 제게 속한 수목들은 해로운 벌레가 끼지 않고 생명력이 넘쳤다.
서리바람 숲의 세계수는 그 뿌리를 베인울프 수해까지 뻗어 영향력을 미치니, 티란디스의 목재를 최고급으로 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세계수라.“
시엔이 입맛을 다셨다.
세계수는 그 영능을 간직한 본 줄기와 그 위에 자라나는 기생목들로 이루어졌다.
기생목은 딱히 해롭진 않으나 그렇다고 이롭지도 않아 엘프들은 주기적으로 이를 쳐내 제거하곤 했다.
이게 바로 요정목으로, 인간이 구할 수 있는 목재 중 가장 비싼 것이었다.
가볍고 튼튼하며, 스스로 금을 메워 치료하는 성질이 있다. 불에 강하며 단열이 좋다. 벌레가 꼬이지 않으며 짐승이 해하지 못한다. 게다가 어지간해선 썩는 일이 없다.
그 효능만 열거해도 요정목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엘프들은 이 값비싼 목재를 세계수의 거름으로 줘 버릴 뿐이니 인간이 요정목을 손에 넣기란 쉽지 않은 노릇.
그런 요정목을 티란디스는 집세 대신 꼬박꼬박 받아내고 있으니 초대 티란디스의 혜안이 과연 대단하다 할 수 있겠다.
‘가지 하나만 얻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시엔이 입맛을 다시는 이유였다.
겨우 기생목의 효능이 저럴 진데, 본가지는 어떻겠는가. 세계수로 만든 마법 지팡이는 정말로 부르는 것이 값인 보물 중의 보물이다.
특히 세계수의 가지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본체의 의지에 따라 시들어 썩어버릴 수 있었다.
그러니 그 주인에게 제대로 양도받지 않으면 손에 들어오는 즉시 쓰레기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빼앗지도 못해, 비싸고 귀해 살 수도 없어. 그러니 그저 꿈꾸고 바라며 군침만 흘려야 하는 바로 그런 환상적인 보물이었다.
시엔이 쩝쩝 입맛만 다시고 있을 때였다.
마차가 서며 마부가 공손이 문을 열었다.
”도착했습니다. 나으리.“
”오. 이게 서리바람 숲인가? 과연 절경이로다. 엘프의 숲은 난생처음 보는구먼.“
가장 먼저 마차에서 뛰어내린 엘딘이 한 편을 보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일단 엘프의 숲은 목질이 크다. 그냥 큰 게 아니라, 일반적인 나무보다 5배, 크게는 10배가 넘게 자라니 그 앞에 인간은 그저 미물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런 거대한 나무들이 휘지 않고 올곧게 자라 무리를 이루니 거인의 세상에 떨어진 난쟁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럼 여기서부터는 어째야 하나?“
”엘프들이 마중을 나올 겁니다.“
”흠. 그럼 잠깐 시간이 남겠구먼. 그리고 시간이 남을 때엔 몸을 움직이는 것이 최선이지.“
”일 없습니다.“
시엔이 엘딘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다.
엘딘은 성에서의 대련 이후로 시간만 나면 대련을 하자고 난리였다.
책만 보고 배웠다는 실력에 솔직하게 감탄하며 재능이 있다 추켜세우는데, 시엔의 입장에선 영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사실 천년 전에 좀 배웠습니다만, 뭐 이리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정 심심하시면 베른닐이나 데리고 노시죠.“
”에잉. 그 아까운 재능을 왜 그리 썩히는지 모르겠군. 쯧. 아쉬운 대로 요놈이나 좀 두드려야겠다. 이놈아, 뭐해.“
”옙!“
베른닐이 힘차게 대답했다.
요즘 세상 가장 행복한 사람을 뽑으라면 바로 베른닐이 분명했다.
눈두덩이에 시퍼렇게 멍이 든 채로 바보처럼 웃는 모습이 진짜 천치나 다름없다.
엘딘의 대련은 상당히 험한 것이라 하루하루 몸 성할 날이 없이 푸른 멍울만 계속 늘고 있는 베른닐이었다.
그래도 뭐. 본인이 좋다는데야.
아무래도 취향을 좀 의심해봐야 하지 않을까.
”느려, 둔한 놈!“
”예, 검위공!“
”아래가 비잖아! 하체! 하체! 하체! 머리!“
딱! 베른닐이 바닥을 굴렀다.
시엔이 엘딘과 사서 고생하는 베른닐과 대련, 대련을 빙자한 구타를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돌연 조근조근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대단히 흥미로와. 저게 인간의 사랑이지?“
”사랑이라. 왜 그렇게 생각해?“
”고통을 가하는 것을 즐기는 인간이 있고 또한 고통 자체를 즐기는 인간이 있다 들었어. 둘이 만나면 서로 즐거울 수 있잖아. 그게 사랑 아냐?“
”꽤 합리적인 추론이긴 한데, 논리의 비약이 좀 있는 것 같다. 시엔 티란디스. 너는?“
”비설. 상등위 유격대 대장의 비설이야.“
풀빛 눈동자가 시엔을 지긋이 바라본다.
피부는 희다 못해 투명할 지경이고, 윤기 있는 청록색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매달린 말간 이파리가 싱그럽다.
비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엔. 인간이 맞아?“
”초면에 꽤 심한 소리를 하는걸.“
”이상하다. 인간이 아닌데. 뭔가 더 대단한.“
비설이 시엔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킁킁 냄새 맡는 소리가 들린다. 개도 아니고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하려 냄새를 맡을 필요가 있나 모르겠지만.
”어헉! 도, 도련님! 위험합니다! 언제 여기까지······!“
베른닐이 문득 이쪽을 바라보다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엘딘이 그 모습에 혀를 찼다.
”쯧쯧. 둔한 놈이 누가 오는 지도 모르고. 조금 쓸만해 졌나 싶더니 그것도 아니고. 에잉. 호오. 엘프 아가씨께서 오셨군? 나는 엘딘이라 한다네. 레이디.“
”엘딘 티란디스?“
”허허. 그리 보이는가. 아쉽게도 저이와는 다른 핏줄이라네. 엘딘 허슨드라 하네. 혹시 아시는가?“
”허슨드? 몰라.“
검위공의 명성은 딱 인간에게까지였다.
하기사 숲에 저들끼리 사는 엘프들이 그걸 알아 무에 쓰겠는가. 엘딘 역시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럼. 안내할게.“
엘프, 비설이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이라 해야할까. 허밍과 휘파람이 섞인 묘한 음색이 듣기 좋았다.
이내 거대한 이파리 한 장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땅에서 무릎 높이쯤 위에 뜬 채로 곧게 펼쳐졌다.
인간은 다룰 수 없는 정령 마법이다.
시엔이 익숙한 듯 그 위에 앉자, 엘딘도 신기함을 감추지 않은 채 옆에 자리를 잡았다.
베른닐이 머뭇거렸다.
”어. 이거 괜찮은 겁니까?“
”안 괜찮으면. 안 타려고?“
”아니, 그게 아니라. 도련님, 이거 나뭇잎 아닙니까?“
”나뭇잎이네.“
”그러니까, 나뭇잎이면 그리 튼튼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혹여 찢어지기라도 하면······“
”고놈 참 말이 많네.“
”옙! 타겠습니다!“
어째 베른닐이 누구의 기사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제 주인이 타고 있는데도 머뭇거리더니, 생뚱맞은 영감이 한마디 했다고 정자세로 올라탈 정도면.
”그럼 출발할게.“
비설이 둥실 떠올라 나뭇잎을 이끌었다. 이내 엘프 한 명과 인간 세 명이 거대한 숲을 가로질러 날았다.
< 7. 바다를 멀리하고 숲을 가까이하라 [2]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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