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자리가 비어도 주인은 여전한 법 [2] >
천년 전.
왕자의 삶은 꽤 비참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조찬을 들자마자, 여러 분야의 왕사를 차례로 방문해야 했다. 배움으로 여는 하루다.
오전 수업은 군왕이 필수로 가져야 할 소양에 대해서다. 제왕학, 행정학, 전술학.
점심을 먹고 나면, 전란의 시대 군왕의 생존 기술을 익혀야 했다. 검술과 기마술, 궁술 등.
그렇게 한바탕 몸을 쓰고 나면 성대한 만찬이 열렸다. 그러면 어느새 태양은 지고 달이 떠올랐다.
태양은 이성이요, 달은 감성이다.
그리하여 감성적인 강의가 시작된다. 글, 그림, 건축과 조각에 이르는 예술 수업이었다.
본격적으로 어둠의 축복이 나타나고, 신비주의자의 사원에 가면 해방될 줄 알았다.
몇몇 과목을 가르쳤던 이들이 워낙에 참스승이라, 제자를 위해 그 오지까지 따라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을 줄은 몰랐지만.
그리하여 매일같이 어찌 수업 한 번 빼먹어볼까 머리를 굴렸던 왕자가 아닌가.
배움을 사양하는 데에 있어선 이미 전문가의 영역을 한참 지났다. 굳이 그 경지를 말하자면, 미지의 개척 영역에 선두에 선 선지자라 할 수 있겠다.
“오늘은 여기서 묵는 모양이네. 준비하게나.”
“예? 무엇을 준비하란 말씀이십니까?”
“내 말하지 않았나. 자네는 내게 검술을 배우게 될 것이라고.”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한껏 죄스런 표정이었다.
“세상에 검위공의 배움을 받고자 하는 이가 많아 줄을 세워 왕도를 몇 바퀴나 둘러도 모자랄 지경인데, 어찌 제가 그들 앞에 검위공의 배움을 받는다 하겠습니까?”
배우려는 사람 많은데, 왜 하필이면 애먼 사람 붙잡느냐. 난 배우기 싫다. 이런 뜻의 공손한 표현이었다.
엘딘은 요놈 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엘딘 역시 아는 이들 사이에 능구렁이로 통했다. 그럴듯한 말 몇 마디에 그러마 하고 뜻을 접을 위인이 아니다.
“귀족의 소양에, 말타기에 능하고 검을 쉬이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하지. 내 자네가 마음에 들어 자세만 조금 봐 주려 하니 부디 사양하지 않았으면 하네.”
“물론 그렇습니다만은, 검위공께 드리기 부끄러운 말씀이나 저 역시 나름 익힌 것이 있어 그 정도 소양에 부족함은 없습니다. 그러니 좀 더 영지와 가문, 나아가 왕국와 왕실에 이바지할 학문을 익히고자 하니 양해해 주십시오.”
“소양에 부족함이 없다? 과신일세. 세상은 넓으니 이 노구조차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실력자가 널렸다네. 과연 그들이 자네를 해하고자 하면 어찌할 텐가.”
“그런 실력자라 한다면 제가 아니라도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범인은 그 전에 그렇지 않을 수 있도록 힘을 써야겠지요.”
“허허. 인생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는 데 몸을 단련함은 그를 대비하는 방법이란 말임세.”
“그를 위해 기사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사는 주인을 지키고, 저는 그를 믿고 영민을 위한 제 일을 할 뿐이지요.”
“아이고, 답답이야.”
엘딘이 제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어째 젊은 놈이 혓바닥에 기름칠을 했는지, 하는 말마다 공손하고 또 맞는 말이니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검위공이 다시 우겼다.
“그럼 대련이나 한번 함세. 자네가 자신하는 실력이 괜찮다 하면 내 안심하고 가르침을 거둘 수 있겠네만은.”
“괜찮다 하시면 어느 정도를 말하십니까?”
“내게 의미있는 일격이라도 한 번이면 내 충분하다 여길 수 있겠어.”
“검위공께서 이미 거장으로 일파를 이루셨으니, 재능 없는 자는 평생을 매진해도 그리할 수 없다 합니다. 그러니 어찌 제가 알량한 실력으로 검위공께 닿을 수 있겠습니까?”
상대를 치켜고 저를 낮추는 화법. 딱히 흠잡을 데 없는 예절. 말에 틀린 내용도 없었다. 엘딘이 또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 어쩌랴. 일단 한발 물러날 수밖에.
그런데 이 영감은 왜 못 가르쳐서 안달이람? 시엔이 다시 의문을 가졌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검위공씩이나 되는 달인이 누굴 가르치겠다 하면, 시야 끝까지 줄을 선 희망자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찍기만 해도 되는 일이다.
그런데 굳이 자신이란 말인가?
이 상황에서 시엔이 떠올린 이유는 일단 두 가지였다.
음차원 에너지의 효용을 모르는 검위공이 보기에 시엔의 체질이라 여겼을 터. 그것이 궁금해 가르쳐 보고자 한다?
그렇다기엔 너무 적극적인 것 같은데.
너무 튕겼더니 얄미워서 더 그러는 건가?
아니면 검위공이 여기에 동승한 이유. 그러니까 왕비가 정치적 이득을 위해 검위공에게 내린 지시일 수도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시엔을 지원하라는 식의.
‘알아보면 되지.’
전자인지 후자인지는 알 방법이 있었다.
시엔이 입을 열었다.
“검위공께서 저를 염려하시는 마음을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 안위를 지키는 이는 따로 있으니 정히 베푸시려거든 제 부족함이 많은 기사에게 한 수 가르침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갑자기 화살이 베른닐에게 향했다.
검위공 앞에 잘 보인다고, 하루종일 정자세를 지키던 베른닐이었다.
허리로부터 엄습하던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무념무상 마음을 비우던 도중 제대로 화살을 맞았다.
“헙. 쿨럭, 쿨럭! 딸꾹!”
놀란 베른닐이 숨을 삼키다 사례가 들리고 더불어 딸꾹질까지 터졌다. 그 와중에서도 떨리는 눈동자가 시엔과 엘딘을 바쁘게 오갔다.
엘딘은 잠시 생각하다 결국 떫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젊은 친구가 아주 영리하구먼. 자네 말이 일리가 있으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리곤 뒤이어 베른닐에게 손짓을 건넨다.
“자. 가자. 이놈아.”
“검, 검위공? 저, 저 말씀이십니까?”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구 또 다른 기사가 있나? 주인이 모자르다 할 정도면 많이 모자란 녀석 아니냐. 쯧. 한번 어떤지 봐야지.”
“영광! 영광입니다!”
베른닐을 끌고 나가는 엘딘의 표정이 그리 밝지는 않다. 늙은이가 성질이 마냥 좋아보이진 않으니 아마 아주 호된, 호오오오된 가르침이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베른닐의 표정은 그저 환희에 들어차 눈부신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베른닐에게 대박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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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의 모든 검사는 검위공의 제자가 되는 것을 꿈꾼 적이 있을 것이다. 혹은 아직도 그런 꿈을 꾸고 있거나.
그래서 티란디스의 복귀 행렬 동안, 엘딘이 베른닐에게 직접 지도하는 모습에 기사단 전원이 눈을 빛냈다.
마차가 서기만 하면 으레 대련이 벌어졌다.
시엔도 한 번 구경을 한 적이 있었는데, 지도는 개뿔 대련을 빙자한 구타의 자리였다.
그간 베른닐은 무수히 얻어맞고 내동댕이쳐지며 흙바닥을 수없이 굴렀다. 그런 와중에도 입가엔 미소가 끊이질 않고, 눈빛에는 지금까지 본 어떤 때보다 강렬한 기쁨이 비쳤다.
그래서 시엔은 베른닐을 다시 보게 되었다.
어떤 이는 고통에서 쾌락을 느낀다던데.
혹시?
베른닐이 누구인가. 창공 기사단의 문제아가 아니던가. 베른닐도 지도받는데, 우리도 받을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 믿을 수 없는 행운은 오로지 베른닐만이 누릴 수 있었으니.
“부끄럽지만 한 수 가르침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호오. 티란디스가의 영애가 검재를 타고났다는 이야기는 내 이미 들은 참이네만. 젊은 나이에 기세가 출중하니 왕국에 새로운 검성이 나올지도 모르겠어.”
“과,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카레네 티란디스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시엔은 물론, 이 몸뚱이에 남은 기억 속에서도 한 번조차 남아있지 않는 해사한 미소였다.
형제자매들중 누구보다 먼저 후작에게 인정받아 영지의 집행관 직책을 따냈을 때도 저만치 기뻐하지는 않았던 모양인데.
그러나 그도 잠시, 엘딘의 이어진 말에 이내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영애에겐 미안하지만, 내 배운 것은 기사의 검술뿐이라네. 그러니 내 가르침이 영애에게 도움이 될 수 없고, 또 그리할 수도 없는 노릇임을 알 걸세. 안타깝게 생각하네.”
“아······.”
시엔은 기가 막혔다.
아니, 저 늙은이는 나한텐 못 가르쳐서 안달이 아닌가.
정작 배우겠다는 이에겐 기사가 아닌 귀족에게 지도하기엔 정치적 이유로 불가능하다는 소리를 뻔뻔하게 내뱉을 수가 있단 말인가.
카레네는 그렇게 돌아섰다.
매사 당당하던 카레네의 어깨가 축 쳐진 모습은 또 처음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시엔은 알린 왕비의 노림수를 깨달았다. 시엔 한 사람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것이었다.
엘딘이 시엔에게 딱 붙어 본인 혹은 그 수하에게만 가르침을 베푸는 모습이 어떻게 보이겠는가.
일왕비와 직접적인 한편으로 묶인 이는, 현 티란디스 가문이 아니라 시엔 본인에게 있음을 확실히 못 박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당연히 사교계는 물론, 가문 내에서도 시엔의 입지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이왕비는 흐레이그의 핏줄. 티란디스로서는 결국 일왕비 이외의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그 연줄을 쥐고 있는 이가 시엔이라면?
‘이런 식의 정치를 하는 사람이었나.’
철저한 편애를 통한 정치질이었다.
하기사. 델피르가 그 모양임에도 왕가 친위대의 수장을 자신의 신하처럼 움직인다.
기사는 저를 믿어주고 신뢰하는 이를 섬기니 알린 왕비는 최고의 주인이긴 할 테지.
편애라 하면 어감이 나쁠 뿐, 제 사람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보상이라 한다면 또 양상이 달라지는 법이었다.
하물며 그 ‘제 사람’ 속에 속하게 되었다면야.
델피르 왕자에게 해 준 일은 이런 보상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 그저 같은 운명을 가진 왕자에 대한 연민, 혹은 선배로서의 책임 같은 것이었을 뿐.
허나 이렇게 됐으니 뭐. 고맙게 받아야지.
다만 받기만 할 수는 없다.
세상 모든 것엔 대가가 있기 마련이다. 나중에 큰 굴레가 돌아오기 전에 알아서 이 빚을 깎아내야 하리라.
그건 그렇고.
“베른닐. 땀 냄새나는데 슬슬 그만하지?”
“그것이······”
“창문 열면 춥단 말야. 또 열어야 하잖아.”
“그러하시다면.”
베른닐은 마차 안에서 기마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점심 식사 후로부터, 영주성에 도착해 늦은 저녁을 먹겠다며 거의 당도한 지금에 이르기까지 있는 땀 없는 땀 전부 쫙쫙 빼고 있는 중. 아닌 게 아니라 땀내가 난다.
그리고 달아오른 몸에서 퍼지는 온기도 사실 적잖이 불쾌한 참이다. 사내놈의 온기라니.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데 그걸 직접 쬐고 있으니.
시엔이 마차의 고급 좌석에 아무렇게나 누워 핀잔을 주었다.
베른닐이 머쓱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엉덩이를 내려놓으려 할 때였다.
“어허. 실력은 개뿔 앞날이 까마득한 놈이 이젠 수련도 그만두려고? 그나마 근성이라도 있으니 조금 두들겨 주지, 그거라도 없으면 내가 붙잡고 있을 이유가 있냐?”
“아, 아닙니다!”
“그렇지?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만 더 힘을 내 봐.”
“알겠습니다!”
반대편에 시엔과 비슷한 자세로 누운 검위공의 말에, 베른닐이 다시 기마 자세를 취했다.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베른닐. 도대체 누가 주인이야?”
“저기, 그것이······”
“어허. 저녁 먹고 또 한 번 몸이나 풀어볼까 했더니.”
“아닙니다!”
시엔의 명령보단 검위공의 가르침이 더 절박했던 모양. 베른닐이 결국 기마 자세를 풀지 않았다.
“아니 뭐 이딴 걸 기사라고······”
“그러니 실력부터 기사로 만들어놓고 보세.”
“검위공 입장에서나 그렇지 베른닐도 나름 기사단의 정예입니다만?”
“이런 게 정예인가? 창공 기사단도 거품이 많이 낀 모양이구먼.”
“아니, 애초에 실력만 출중하면 뭐합니까? 기사도 정신. 기사 하면 그거 모르십니까?”
“그것도 주인 되는 이가 주인다워야 발휘가 되는 게 아닌가. 기사가 인생 둘도 없는 기횔 맞이했는데 땀 냄새 좀 난다고 걷어차려 하면 그게 말이 되겠나?”
“아니, 이 영감이 진짜······”
“뭐? 영감? 피도 안 마른 게. 허허.”
시엔과 엘딘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알린 왕비의 명령이 어쨌던가는 별개로, 시엔은 엘딘이 자신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애초에 누군가 제게 가진 호감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지간해서야 누구나 알아챌 수 있는 어떤 인류 보편적인 감각이 있는 법이었으니.
굳이 이유를 꼽자면 엘딘이 델피르 왕자의 대부이기 때문인 모양이라는데.
친아들도 아니고, 피도 안 이어진 대자의 광증을 치료해 준 것이 무에 그렇게 고맙나 싶긴 하다.
뭐 늙은이가 손자뻘 되는 왕자를 대자로 뒀으니 어떤 자식과 같은 애정을 품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
그런데 이 영감, 모든 왕자 공주들의 대부 아닌가? 뭐. 아픈 손가락이 더 신경이 쓰인다고, 델피르에 대한 정이 각별하기라도 했나 보지.
시엔은 원래 친한 이와는 격의 없이 지내는 것을 좋아한다. 베른닐과의 관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시엔은 인간관계의 방종과 예의 사이의 선을 슬금슬금 드나들며 끝내 경계를 허물어버리곤 했다.
길었던 복귀 행렬이 곧 끝나는 긴 시간동안 매일같이 또 온종일 얼굴을 마주한 엘딘이다. 벌써 저도 모르게 이미 선을 반쯤 넘어왔다.
“체른노아의 정문이 보인다! 잠시 멈춰서 의장을 고치도록!”
창밖으로 카레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작성이 위치한 직할도시 체른노아에 이제 다 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기사단과 호위 정병들이 체른노아 입성을 위해 의장을 정돈하느라 잠시 행렬이 멈춰서고, 이내 다시 마차가 움직였다.
성문이 열리고, 도시 안 대로에 들어서고.
창문 너머로 체른노아의 정경이 계속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동부대로, 시엔이 제집처럼 드나드는 도박장, ‘인생의 전환점’이 창밖으로 스윽 미끄러져 넘어가는 때였다.
“음?”
“왜 그러나?”
“아닙니다. 그냥,”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려한 ‘인생의 전환점’ 간판 아래에서 옆으로 외진 구석. 난쟁이 하나가 넝마를 걸친 채 기도에게 얻어맞고 있는 중이었다.
기도의 바짓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며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악을 쓰고 있는데, 그 얼굴이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
“쟤는 왜 또 저러고 있어?”
거지꼴을 한 채 연신 걷어채이는 그 하플링은, 바로 도박장의 주인 엘모였으니까.
< 6. 자리가 비어도 주인은 여전한 법 [2]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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