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7화 (17/268)

< 6. 자리가 비어도 주인은 여전한 법 [1] >

중매를 서서 먹고사는 이들을 낮춰 부르길 뚜쟁이라 했다.

결혼이야 평민으로부터 귀족까지 누구나 하는 일. 그래서 뚜쟁이들은 그 계급이 확연한 편이었다.

기껏해야 이마을 저마을 사이에 둔 발 넓은 아주머니로부터, 큰 상인만을 상대하는 전문적인 치까지.

귀족도 그에 예외는 아니라, 전문적으로 중매를 서는 이들이 있었다.

원래 남녀 일이라는 것이 잘 되면 문제가 없으나, 안 되기 시작하면 그 원망은 이만저만이 아닌 법이다. 그럼 누굴 욕하겠는가.

그래서 부르는 말이 마담 뚜였다.

물론, 이 말을 그네들 앞에서 직접적으로 꺼내는 이는 없었다.

귀족들이란 보통 재화에 궁색한 일이 없으니 중매를 선다 해서 그러한 보상이 따르는 일도 아니다.

그저 그들은 명망높은 살롱의 마담으로서, 누가 누구를 엮었다더라, 누구랑 누구를 엮을 정도로 영향력과 넓은 사교력을 가졌다 하는 영예만을 누리는 여인들이었으니까.

마담들에게 밉보였다간 사교계에 어느 순간 악질적인 소문들이 쫙 깔려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국왕탄신연회는 온 왕국의 이러한 마담들이 전부 모이는 자리였다.

서로는 경쟁자이지만 또 같은 일을 하는 동료이기도 했다. 연회가 끝나면 마담들이 모여 정보 공유 따위를 하는 모임이 열리는 것도 꽤 오래된 전통이었다.

살롱에 한데 모인 마담들이 저마다 쌓인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누구는 주제도 모르고 어디 여식을 원한다더라. 엮어줄 때는 좋다더니, 저들끼리 갈라서곤 괜히 내 탓만 하더라.

“자. 여러분. 이제 슬슬 급을 나눠볼까요.”

이번 모임의 주최, 살롱의 주인되는 큰 마담이 부채를 펼치며 의제를 꺼냈다.

급을 나눈다. 마담들끼리의 극비문서로, 신랑감 신부감의 등급을 매기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매겨진 등급이 곧 그네들의 주선이 된다.

“이번엔 큰 이변이 있었지요. 가장 큰 건은 누가 뭐라해도 델피르 왕자님이실 거에요.”

그간 두문불출하던 왕자가 밖으로 나섰다.

왕족은 기본이 특급이었다. 심지어 하자가 있어도 원하는 이가 줄을 서니, 멀쩡한 왕자는 굳이 매기자면 특특급 쯤 되리라.

“허나 슈드릴 영애가 있으니······”

“알린 마마께서 의리를 저버리시는 분도 아니구요. 지금까지 왕자님을 모셔온 게 있는데 절대 내치실 분도 아니죠.”

“슈드릴 가문이 아주 운이 좋군요?”

카라렐 슈드릴. 슈드릴 가문은 지도에 점이라도 찍힐까 싶은 작은 영지를 소유한 가난한 귀족가였다. 심지어 너무 가난해서 직접 농사를 지을 정도라고 하던가.

슈드릴 영애는 씩씩하긴 하지만 귀족적이지는 않았다.

언젠가 큰 가뭄이 들었을 때, 카라렐 슈드릴은 굶주리는 가문과 영민들을 위해 왕성으로 향했다.

“운이라고 하기엔 슈드릴 영애가 헌신적이기도 했죠. 아시잖아요. 왕자님 성질머리.”

“하긴 슈드릴 영애가 고생도 많이 했고······”

“어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번에 뵈니 온화한 분이신 것 같았는데.”

신입 마담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러자 다른 마담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 보여도 상당히 포악하신 분이에요.”

“발작 때야 그렇다 치고, 아니실 때도 곧장 화를 내시는데, 시도때도없다고 해야하나.”

“오죽하면 왕자님을 한번 꿰차보겠다고 들어간 귀족 시녀들도 전부 도망쳐 나왔겠어요.”

마담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던졌다. 그러자 큰 마담이 박수를 치며 상황을 정리했다.

“자자. 그만들 하시고. 그럼, 왕자님은 넘어가도록 하고. 자. 그래요. 시엔 티란디스 공자에 대해 할 이야기들 많으실 텐데요.”

“어유, 성질 급한 분들은 벌써부터 난리랍니다. 특히 여가주분들. 매파를 넣겠다는 분이 몇 분이나 계서서······.”

“아무래도 나이에 비해 귀여우시죠. 아담하고, 특히나 그 눈이 참. 사슴을 닮았다고 해야 하나. 토끼같기도 하고.”

“게다가 워낙에 순정남이시니. 귀족가 자제들 중 그 누가 자결을 할 정도로 한 여인에 목을 매겠어요?”

“이번에 보니 소심하단 말은 절대 못 꺼내겠더라구요. 아무래도 큰 일 겪고 느낀게 많았던 모양일까요. 장점이라면 장점이겠지만, 나름 수요가 있었는데 아쉽게 되었어요.”

“이젠 배경도 좋아졌으니까요. 일왕비 마마가 그리 총애한다 티를 내셨으니.”

“검위공을 내어주실 줄 누가 알았겠어요?”

“마마께서도 이제는 위상이 완전 다르시잖아요. 델피르 왕자님께서 왕권에 계시니.”

“티란디스야 전통과 역사를 가진 명문이니 두말할 필요도 없고······”

뒤로도 마담들의 호평이 이어졌다.

큰 마담이 마침내 정리를 내렸다.

“배경 좋고, 정치력 출중하고, 한 여인만 바라보는 순정에 외모까지 빼어나다라. 시엔 티란디스 공자는 3급에서 특급으로 상향 조정하도록 해요. 혹시 다른 의견 있으세요?”

큰 마담이 좌중을 둘러보며 선언했다.

“오랜만에 특급 자제분께서 나타나셨네요. 과연 저를 포함해 여러분들 중, 이 분을 엮어드리는 영예를 누가 가지게 될지 모르겠어요. 모두 힘내셔야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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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란디스 가의 복귀 행렬. 왕성으로 향할 때와는 달리 상당히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엄숙하게 대열을 지키며 행군해야 할 창공 기사단이 연신 한 쪽을 흘끗거렸다.

아예 대열 한 쪽이 미묘하게 어긋나있기도 했다. 정확히는 시엔의 마차 주변으로 기사들이 유달리 바짝 붙어있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시엔의 마차 안쪽.

시엔이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베른닐을 바라보았다.

분명 왕성으로 향할 때는 안 이랬는데.

시엔과 함께 마차 안에 드러누워 자다 깨다 자다 깨다 또 자다 깨며 몽롱한 상태를 유지하던 베른닐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은?

정명한 눈빛. 꼿꼿하게 펴진 허리. 기사의 표상이라 할 수준의 정돈된 자세였다.

“베른닐, 그러고 있으면 불편하지 않아?”

“아닙니다. 저는 도련님의 호위로 본분을 다할 뿐입니다.”

“뭐? 뭘 다해?”

“기사의 본분을 지키는 것이지요.”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도히려 말문이 막히는 모양이라더니. 시엔이 할 말을 잃은 사이, 껄껄 웃는 걸걸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허허. 훌륭한 젊은이로군. 내 창공 기사단에 대한 소문은 들었지만, 자네를 보니 전부를 알겠어.”

“과찬의 말씀입니다.”

“아닐세. 허허, 훌륭하군. 훌륭해.”

검위공이 흡족스럽게 웃었다.

베른닐의 표정은 딱 감격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양새였다. 눈가에 물기가 차오르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도 감격스러웠던 모양.

하기사 천공기사단의 실세인 카레네에게 기사도 아니란 폭언을 들었던 베른닐이었다.

기사 중의 기사. 왕국 최고의 기사. 대륙에 명성이 자자한 검의 달인인 검위공의 칭찬을 받으니 유달리 북받치는 것이 있을 테지.

“쯧.”

시엔이 혀를 찼다.

평소대로 행동하면서 칭찬을 받아야 의미가 있지. 노인네 한 명 동석했다고 참기사 행태를 하고 반짝 칭찬을 받아봐야 그게 무슨 소용이라고.

알린 왕비에게 그냥 대기사가 필요하라 했을 뿐이었다. 그랬으면 결투에서 볼일 다 본 게 아닌가? 왜 여기에 타고있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굳이 갖다붙이자면, 알린 왕비가 티란디스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겠지만.

사실 검위공씩이나 되는 위인이 대기사로 나서준 것만 해도 이미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과시였다.

검위공 정도의 달인이 일개 귀족 자제들의 결투에 나서는 것도 남사스러운 일이고, 체면이 상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굳이 티란디스의 지지와 거기에 따르는 알린 왕비의 후원을 이런 식으로 알릴 필요까지도 없건만.

“휴가는 참으로 오랜만이이. 티란디스령에 좋은 숲이 많다고 들었네만.”

명목이야 휴가라지만.

어쨌거나 검위공이 말을 걸어오는 이상 대답은 해야했다.

“맞습니다. 티란디스령은 왕국 내 최대 목재 생산지인만큼, 유명한 숲은 저희 영지에 다 모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호오. 그 중 요정목이 유명하다 들었네.”

“서리바람숲을 말씀하시는군요. 초대 티란디스공이 엘프들에게 대여한 숲입니다.”

“거기 가 볼 수 있나?”

“티란디스의 소유이니 가 볼 수는 있습니다만······”

시엔이 말끝을 흐렸다.

엘딘이 대답을 재촉했다.

“왜. 안 되나?”

“세를 놓았으면 집주인이라 해도 함부로 들어가선 안 되는 법이지요. 엘프들은 숲 전체를 집으로 여기는 이들이라서요.”

“아아. 늙은이가 주책을 부렸군그래.”

시엔이 잠시 엘딘을 바라보았다.

실없는 이야기로 빙빙 도는 것은 성미에 안 맞았다. 궁금하면 물어보면 될 터.

“검위공께서 함께하심은 마마의 배려입니까?”

시엔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엘딘은 그럴 줄은 몰랐다는 듯 시엔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이내 개구쟁이같은 미소를 짓는다.

“나는 직속친위대의 장을 맡고 있는 사람일세. 아무리 마마께서 부탁하신다 한들, 함부로 전하의 곁을 비울 수는 없지.”

“그러하시면.”

“내가 움직이는 이유는 둘 뿐이라네. 전하께서 명하셨던가. 아니면 내 스스로 오고자 했던가. 자네는 어떤 것 같은가?”

“······사실 모르겠습니다.”

사실 기꺼운 손님은 아니었다.

이제 이틀차. 앞으로 닷새는 더 가야 할 복귀 행렬에 불편한 손님을 코앞에 모셔야 하는 처지가 아니던가.

그게 굳이 시엔에게 이득이 되는 일도 아니고.

“나는 전하의 기사이며, 왕가의 수호자. 그리고 델피르의 대부라네. 보아하니 델피르가 자네를 꽤 따르는 모양이야.”

“안 될 말씀이십니다. 장차 왕위에 오르실 분이 누굴 따른단 말씀이십니까. 그저 친우일 뿐이지요.”

“내 보기에 그렇단 말임세. 대부가 어떤 자리인가. 대자를 친자처럼 보살펴야 하는 의무가 있지. 대자가 어떤 이를 따르는지는 봐 두어야 하지 않겠나?”

한 마디로 시엔이 어떤 이인가 알아보기 위해 따라붙었다는 소리였다.

엘딘이 말을 이었다.

“자네 말대로 델피르는 왕위에 오를 이라네. 왕에겐 좋은 친우가 필요한 법이나, 그만큼이나 위험한 치가 악우가 아니겠나. 만약 자네란 사람의 됨됨이가 미치지 못한다면 큰 일이 될 테니 어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나.”

그리곤 엘딘의 전신에서 무형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샹라 경이 보여주었던 핏빛의 오러와 같으나, 그 색이 없어 투명한 것이었다.

시엔이 베른닐을 살폈다.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초점 없이 어딘가를 노려보는 중이다. 딱 보니 슬슬 허리가 아파와 고통을 느끼고 있는 꼴이었다.

베른닐에게는 엘딘이 뿜어내는 오러가 느껴지지 않는 모양.

소드 마스터들의 능력이란 하나같이 제멋대로다. 제가 개인적으로 믿는 무리를 현실에 구현하는 치들이니 오죽할까.

엘딘의 투명한 오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게 이 노인네의 장기라면, 호방하게 생긴 외양과는 달리 꽤 음흉한 구석이 있는 것이리라.

이내 엘딘의 오러가 시엔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에겐 이것만으로도 온 몸이 저리고 숨이 막히는 공격이 되리라.

물론 부정 세계의 원기, 음차원 에너지가 흐르는 시엔에게야 통하지 않았다. 그래도 멀쩡히 버티고 있기엔 모양새가 좀 이상하다.

“으으······”

시엔이 부러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엘딘이 크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웃어대는지, 배를 잡고 허리를 숙여 마차가 들썩거리도록 몸을 떨며 박장대소를 하는 것이다.

한참 후에야 엘딘이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그, 자네. 연기를 참 못하는구만.”

“그리 보였습니까?”

“자네 같은 이는 처음일세. 검술을 익힌 자는 아닌데, 오러에 감각이 터 있는 모양이네. 흠.”

그건 제가 흑마법사라서 그렇습니다라 해 봐야, 흑마법사가 지워진 세상에 이해할 리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시엔은 이럴 때에 어찌 대처하는지 알고 있었다.

“세상이 넓은데 저 같은 이 하나 없겠습니까?”

“흠. 신기하군. 신기해.”

시엔의 대답은 이랬다. 그냥.

그냥 그렇다는 말은 의외로 굉장히 설득력이 있는 법이었다. 그냥 그렇다는데 뭐 어쩌랴.

워낙에 여러 가지 뜻이 함축되어 있는 탓이기도 하고.

“그래서 말일세. 내게 검술을 한 번 배워 보겠나?”

헙. 옆에서 숨 넘어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슬쩍 보니 베른닐의 눈동자가 거의 튀어나오기 직전이다. 그리고는 이쪽을 바라보는데, 두 눈 가득 부러움이 넘쳐 뚝뚝 흐를 지경이었다.

무려 검위공이 직접 검술을 지도해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왕국의 검을 쥔 모든 이들이 꿈꾸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엔에겐 아니었다.

이제 와서 무슨 검술이랴.

한 사람이 품을 수 있는 기운이란 한 가지 뿐이라, 음차원 에너지가 흐르는 시엔이 아무리 수련한들 오러를 얻을 수도 없었다.

“죄송하지만 검술에는 뜻이 없어서요.”

허어업. 옆에서 또 숨 넘어가는 소리, 아니 아예 숨을 못 쉬고 새파랗게 질려가는 베른닐이 보였다. 시엔과 마주친 눈빛에는, 도련님 미친 거 아닙니까 하는 불경함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내 말실수를 한 모양이네.”

“실수라니요. 가땅치도 않습니다.”

엘딘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친근한 할아버지 같은 표정으로, 검위공이 말을 이었다.

“아니. 말을 잘 못 전했다는 뜻일세. 그게 아니라. 자네는 검술을 배우게 되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시엔의 눈썹 사이로 선명하게 금이 새겨졌다. 뭐라는 거야, 이 늙은 영감탱이가.

< 6. 자리가 비어도 주인은 여전한 법 [1]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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