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6화 (16/268)

< 5. 결투결투 열렸네 [4] >

이 세상, 그러니까 현상 세계의 법칙은 엄준하나 또한 무르기 짝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 세상 속한 모두가 피할 수 없는 법칙에 매여 있으나, 이 법칙은 사소한 부분에서 개인의 힘으로 비틀 수 있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마법사는 이차원과의 연결을 통해 병렬정신세계를 구성하고, 세계가 편애하는 언어를 통해 기적을 부렸다.

신관은 신, 그러니까 초월적 존재의지와 접촉하여 그네들의 교리를 따라 이적을 행했다.

그렇다면 전사들은 어떤가.

안타깝게도 전사들의 이능에 대해서는 명확한 이론이 없는 편이었다.

에너지와 신성에 대해 고찰하고 정리하는 마법사와 신관에 비해, 전사들이란 하나같이 그냥 하니까 되더라 식으로 근원에 대한 자각이 없는 치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가장 유력하다 여겨지는 가설은, 개인의 의지가 공간을 지배, 특이점을 형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사들은 개인의 상상에 불과한 허구적인 전투술을 현실로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그 대표적인 힘이 오러.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으나 돌연 존재하는 맹랑한 힘이다.

‘음?’

생각해보니 벌써 천 년 전의 이론이다.

혹여나 그간 누군가 특이한 전사가 있어 오러에 대한 명확한 정리를 행하지 않았을까?

어차피 내 분야도 아니건만,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 마법사의 심리. 당장 궁금 반 기대 반으로 가까운 서관에 달려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시엔?”

“아. 미안.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너. 하. 기가 차는군······”

카레네가 인상을 찌푸리자, 시엔은 피부가 따금따금 저려옴을 느꼈다.

구현화 한 살기의 영향. 전사들의 살기는 상대를 적대하는 심상만으로 신체적, 정신적 상해를 유발한다.

그러나 음차원 에너지의 보호를 받는 시엔이야 그저 따끔하고 말 뿐이지만.

시엔이 픽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남을 시험하는 건 안 좋은 버릇이야.”

“뭐?”

“살기 좀 그만 뿌리라고.”

“너는, 하. 참······”

카라네가 고개를 저으며 시엔을 바라보았다. 신기함 반, 호기심 반이다.

“자격이라. 나도 티란디스인데 내게 자격이 없겠어. 자격은 내게도 있고, 카레네도 있고, 그리고 그 로우드 녀석한테도 있는 거니까.”

“그래서, 네 결정에 가문이 일방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거야?”

“시험은 됐다니까. 자격이 아니라 책임의 문제일 뿐이잖아. 내 결정이 해를 불러온다면, 가문은 날 내칠 테고. 그리고 나는 거기에 맞는 책임을 지면 되는 거고.”

카레네가 빙긋 웃었다.

“좋아. 아주 좋아. 시엔 티란디스. 갑자기 귀족이 되었구나? 역시 독을 좀 구해놔야겠어. 얼간이도 한 방에 새사람을 만드는 걸 보면.”

“네가 인정해봐야 뭐. 떨어지는 게 있나?”

시엔이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카레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있지. 아주 큰 선물이.”

“뭔데?”

“방금 네가 했던 실수에 대한 해결책이랄까.”

“실수라.”

“결투 말야. 뭐. 이쯤에서 한 번 져 주고 사과 한 번으로 흐레이그와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으니 나쁜 선택은 아니지만.”

“아니지만?”

“적어도 한 명은 박살이 날 게 뻔하잖아? 흐레이그의 대공자는 보기보다 쪼잔한 놈이라 분명 샹라 경에게 정도를 두지 말고 박살내라 주문할 테지.”

시엔이 흐레이그에게 한 번 져주고 이쯤에서 봉합하기를 원한다. 카레네는 그렇게 생각했다.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현재 가문 내에 거의 영향력이 없는 시엔이 내놓을 패라곤 제 호위기사인 베른닐 정도가 전부였으니까.

카레네가 알기로, 베른닐이 여섯 명 쯤 있어도 승률은 반반 정도.

어차피 명예랄 것도 없는 시엔이 굳이 결투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시엔이 물었다.

“그래서?”

“내가 네 대전사로 나가 줄게. 어때?”

“동생 대신 얻어맞는 누이 역할이라도 할 셈이야?”

“그럴 리가 있어? 나가면 이겨야지.”

“샹라 경을 이길 자신이 있다고?”

“그야. 샹라 경은 야만인 중에서도 칼라콤 출신이거든.”

“그게 왜?”

“칼라콤의 사내들은, 여자를 공격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치욕이라 생각하거든.”

카레네가 눈을 찡긋했다.

시엔이 기가 막혀서 눈만 꿈벅거렸다.

“아니. 지금 그걸 무기로 삼겠다고?”

“그게 뭐 잘못이야? 사내는 원래 힘이 쎄고 더 민첩하니 원래부터 기사가 되는 데엔 그 쪽이 유리했던 거 아냐? 그런데 내가 내 유리한 무기를 쓰는 건 비겁한가?”

“기사들이라면 그렇게 말하겠지.”

“윽.”

시엔의 말에 카레네가 답지 않게 움찔했다. 그리곤 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것이다.

“뭐. 나는 후작이 될 사람이지 기사는 아니니까. 그럼 상관없잖아?”

이미 후계자가 정해졌다는 투였다. 확실히 가장 유력하다곤 해도, 저 정도 자신감이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가.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고맙지만 선물은 다른 걸로 받을게.”

“뭐? 왜?”

“나도 나름 생각이 있으니까.”

“그렇다면야. 그리고 선물은 원래 무르기 없는 법이야, 시엔. 굳이 싫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바꿔주는 법은 없다?”

“그래? 개인적으로 샹라 경에게 한 수 배우고 싶은 것도 있었는데. 아쉽게 됐네.”

“원한만 사지 않을까?”

“어차피 내 기사도 아닌데 뭐 어때.”

오누이가 사이 좋게 낄낄거렸다. 그러다 카레네가 주변을 살펴보곤 한 걸음 물러났다.

“흠. 네 손님이 꽤 있는 것 같은데. 누이란 여자가 눈치없이 여기에 붙어 있네.”

“뭐?”

“잘해봐. 그럼.”

카레네가 어깨를 툭툭 쳐 주곤 자리를 떴다.

무슨 뜻인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자리를 뜨자마자 세 여인이 나타나 말을 걸어왔으니까.

누구인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알린 왕비를 똑 닮은 세 사람이다.

아니, 생각 없다니까 또 기어코. 뭐. 그래도 연회란 이래야 또 재미가 있는 법이긴 하다.

시엔이 미소를 띄웠다.

이제야 좀 연회에 온 것 같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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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는 서로의 명예를 놓고 겨루는 승부다.

결투에는 본인 혹은 본인을 대신할 대기사가 나선다. 그래서 명예가 걸린 것이다.

명예로운 이를 위해선 고결한 기사가 기꺼이 대기사를 자청하니, 더욱 더 드높은 명예를 가진 이가 승리한다.

딴은 그러했다.

말이야 그렇지, 실상은 더 강력한 수하를 둔 편이 일방적으로 유리했다.

그걸 뒤집기 위해선 고명한 전사를 초청할 만한 막대한 자금력이나, 혹은 제 기사를 내어줄 강대한 후원자가 필요했으니까.

그래서 사실 결투의 성립은 드물다.

결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명예롭지 못한 일이라 손가락질 받지만, 흐레이그의 대공자가 티란디스의 6공자에게 내민 결투는 사실 받아들이지 않아도 누구든 별 신경쓰지 않으리라.

첫째로 시엔 티란디스가 그리 명예로운 인물이 못 된다는 것.

둘째로 둘의 전력차가 워낙에 뚜렷하니 굳이 결투로 승패를 겨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엔 티란디스가 이를 받아들였고,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궁금해졌다.

도대체 유약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시엔 티란디스는 어떤 수를 동원하려는 것일까.

어떤 귀족은 시엔 티란디스가 독으로 안 되니 새로운 자살법을 찾는 게 아닌가 하는 심각한 의견까지 내어놓을 정도였으니.

그런 이유로 결투 당일, 왕성 근위기사단의 대연병장엔 땀내 대신 귀족들의 향수들이 뒤섞인 화사한 향이 흘렀다.

심지어 한 편에 놓인 상석에 왕족들이 자리를 잡고 있기까지 했다.

일왕비와 그 태생의 공주들, 그리고 갑자기 사교계에 나타난 일왕자. 이왕비와 그 태생의 왕자들. 그리고 왕의 첩실들까지.

국왕은 제가 보고싶더라도 직접 나설 자리가 못 되고, 삼왕비와 자제들은 원래 공식 석상에 얼굴을 보이는 것을 꺼려했다.

그걸 감안하면 올 수 있는 왕족은 전부 다 모였다는 뜻이었다.

페시번 흐레이그는 흐뭇했다.

‘고모님이 판을 잘 깔아 주셨구나.’

아버지는 페시번의 고모, 그러니까 이왕비께 최대한 많은 이들이 결투를 볼 수 있게 해달라 부탁했다.

어차피 이길 싸움이라면 최대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가문의 건재함을 과시할 요량.

그리고 겸사겸사 시엔의 비참한 모습을 한 명이라도 많은 이들의 눈앞에 직접 들이밀고 싶었으니까.

‘빌어먹을 놈. 감히 시엔 주제에.’

감히 시엔 주제에. 페시번이 더 격분하는 이유였다. 제 약혼녀를 빼앗겼음에도 그 어떤 항의도 없이, 심지어 독을 삼켜버린 머저리가 자신에게 감히 그럴 수는 없었다.

“작은 주인님. 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 진정 그리해도 될런지요.”

“책임은 내가 질 거야. 경은 누가 나오건 처참하게 박살을 내면 돼. 그 누가 나오건, 다시는 펜보다 무거운 것을 잡지 못하도록 만들어 놔. 아니. 아예 잘라버려.”

“알겠습니다. 흐흐.”

작은 주인님의 뜻이 그러하다면야.

샹라는 피를 즐기는 야만 전사다.

빌어먹을 대족장 놈의 농간으로 자살에 가까운 남벌이 이뤄졌다. 결국 부족이 멸망하고 나서 저를 구해준 이가 바로 흐레이그 공작이었다.

흐레이그 가는 생명의 은인이자, 자신을 문명 세계로 이끌어 준 운명의 은인이었다.

문명 세계는 안락하고 즐거운 신천지였으나, 단 하나 손맛을 볼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손맛. 적의 살을 가르고 뼈를 부수는 그 감각. 오랜만에 그 기회가 왔다.

샹라의 몸에서 붉은 혈기가 피어올랐다.

오러라 불리는 힘이었다.

벌써부터 피 비린내가 풍기는 듯한 모습에 페시번 역시 흐뭇한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이제 그 빌어먹은 자식만 오면······’

때마침 웅성거림이 커졌다.

이제와 사람들이 수군거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페시번이 급히 앞으로 나섰다.

저편에서 시엔이 걸어오고 있었다.

시엔은 느긋하게 걷고 있었고, 뒤에서 베른닐이 불안한 표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도련님, 도대체 그 대기사가 누구인지는 모르겠는데, 이미 내뺀거 아닙니까?”

“아니.”

“아니, 그런데 지금까지도 안 나타나면 어쩌잔 겁니까. 혹시 원래부터 저였던 거 아닙니까? 제가 나가는 겁니까?”

“아니라니까. 와. 저이가 샹라 경인가? 벌써부터 장난 아닌데?”

시엔이 핏빛 오러를 피워올리고 있는 샹라 경을 보며 감탄했다.

“베른닐도 저런 거 할 수 있어?”

“저도 저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오. 그럼 결투 나가도 되는거 아니야?”

“······저렇게만 할 수 있습니다. 저러고만 있어야 하죠.”

“억지로 짜낸다는 거네?”

“그것도 대단한 거란 말입니다. 애초에 저거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뭐. 베른닐이 그렇다면야.”

시엔이 페시번에 앞에 섰다.

기다렸다는 듯 이죽거림이 날아온다.

“네 뒤에 선 기사가 대기사인가? 샹라 경이 힘조절에 미숙해서. 크큭, 무사하면 좋겠군.”

“얘가 나갈 거 아니니까 걱정 말고.”

“그럼 누가 나가지? 주변엔 아아무도 안 보이는데? 설마 직접 나설 생각이냐?”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페시번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는 시엔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걸어서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마라. 샹라 경이 오늘 아주 거칠 테니까.”

대답은 다른 곳에서 돌아왔다.

“허허. 아주 거친 친구라. 그거 재미있겠군. 이 노인네가 기대를 해 봐도 되겠나?”

어느 새 나타난 백발의 기사가 껄껄 웃었다.

정수리까지 머리가 벗겨지고, 나머지는 볼품없이 듬성듬성 흰 머리가 난 노인이었다.

그러나 그 외엔 노인답지 않았다.

얼굴엔 검버짐이 잔뜩이나 주름은 별로 없어 피부가 팽팽하고 살굿빛 혈색이 돌았다.

떡 벌어진 어깨며 곧게 펴진 허리가 웬만한 사내의 두 배는 될 법하니 누가 그를 노인이라 할 수 있을까.

웅성웅성. 사람들의 동요가 커졌다.

페시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이 크게 뜨이고, 입이 떡 벌어졌다.

“검, 검위공? 검위공께서 어쩐 일이신지······?”

“기사가 결투장에 왜 왔겠나?”

“그, 그 말씀은······”

“내가 이 젊은이의 대기사라네.”

그 말에 구경꾼들이 서로를 보며 급히 떠들기 시작했고, 페시번의 표정은 와장창 무너졌다.

검위공 엘딘 허슨드.

명실공히 왕국 제일의 기사이자, 직속친위대의 수장. 전 대륙에 그 명성을 날린 검의 달인이자 소드 마스터라 불리는 11명의 초인 중 일 인이 아닌가.

시엔이 엘딘을 보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시엔 티란디스입니다.”

“오. 자네가 시엔인가? 내 대자의 은인이라지? 전에 진작 고맙다 인사를 했어야 하는데, 이 늙은이가 원체 바빠서 말일세.”

“이리 나와주신 것만도 감사합니다.”

왕국 제일의 기사이자 왕가의 수호자인 그는 일왕자의 대부이기도 했다.

시엔이 상석을 바라보며 슬쩍 목례를 건넸다. 알린 왕비가 눈웃음으로 인사를 받았다.

공주 대신 대기사를 한 명 빌려달라는 시엔의 청에, 왕국 제일의 기사를 보내준 것이다.

엘딘이 신기하다는 듯 시엔을 바라보았다.

“호오. 젊은이가 벌써부터 현기가 있으니 왕국에 큰 복이로세.”

“현기라니. 가땅찮은 말씀이십니다.”

“아니지. 내 이 경지에 이르고 나서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른 것이 있다는 걸 알았네.”

“제가 아직 그 경지가 되지 않아 모르겠습니다만.”

“본인은 모르는가?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자네는 특별하네. 이런 적은 처음이니 나도 잘 모르겠지만 말일세.”

늙은이가 껄껄 웃었다.

검위공은 그 역시 인간 한계의 저변 너머에 위치한 위대한 종사. 감각을 뛰어넘어, 시엔에게 무언가를 느낀 것이었다.

시엔도 내심 놀라는 중이었다.

시엔이 본 이들 중 이만큼이나 강대한 영혼을 가진 이가 몇이나 될까.

“아차. 결투를 앞에 두고 늙은이가 주책이구먼. 나는 준비되었으니, 언제든 시작하시게.”

엘딘이 연병장에 서서 말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결투의 결과 따위 누가 궁금하랴.

심지어 샹라 경마저 피워올리던 오러를 감춘 채 당혹스러워하는 중이었다.

‘팔을 잘라? 작은 주인님이 미쳐도 단단히 미친 모양이군. 저분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벨 수 있을까.’

상대해야 할 샹라조차 이런 생각이었으니.

그리하여 흐레이그 가의 대공자는 시엔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 수많은 귀족이 보는 앞에서였다.

< 5. 결투결투 열렸네 [4]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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