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결투결투 열렸네 [3] >
결투가 성립되고 나면 보통 한 쪽이 퇴장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된다. 허나 연회는 아직 시작도 안 한 참이었다.
탄신일 주체인 국왕과 그 일가가 아직 도착도 하기 전이었으니까.
시엔이야 먹성을 부릴 때라 굳이 물러날 생각도 없고, 흐레이그의 노소도 은근슬쩍 연회장 한 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때에 왕가가 입장했다.
“왕가의 행차가 있겠습니다! 페벨룬의 주인, 영명하신 레이알드 셉텐 페벨룬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연회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궁중 서기장의 목 건강이 걱정될 정도였다. 아니면 목소리 큰 이가 서기장의 자격인지도 모르고.
뒤이어 왕비들이 입장하고, 그 뒤엔.
“제 1 왕자, 델피르 프린 페벨룬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여기저기서 놀라는 기색이 완연했다. 국왕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군거리는 소리마저 들려올 지경이었다.
지금까지 공식 석상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왕자였으니 오죽할까. 게다가 광증에 걸린 왕자라는 소문도 있지 않은가.
베른닐이 알고 있을 정도라면 이미 알 만한 귀족은 전부 다 들어봤다는 뜻이리라. 생각해 보니 이 몸뚱이의 전 주인은 베른닐보다도 아는 것이 없었던 모양이고.
“모두 고개를 드시게들. 좋은 날이니만큼 이번엔 불미스러운 일이 없이 즐거이 즐겼으면 좋겠구려.”
이번엔. 국왕이 지난 연회가 아직도 앙금에 남은 듯 특별히 강조했다. 아마 지금쯤 페시번 녀석이 속으로 진땀을 흘리고 있으리라.
그러나 귀족들의 관심은 온통 소문 무성한 일왕자에게 향했다. 왕실의 적자이나 지금까지 태자가 되지 못했던 바로 델피르 왕자.
귀족들이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왕은 늙었고, 머지 않아 결국 왕태자를 결정해야 하리라. 그러나 자격이 있는 일왕자에겐 흠결이 있으니, 이대로라면 다른 왕자에게 그 자리가 돌아갈 터였다.
그런 이유로 상당부분 이미 파벌이 조성된 이후였다.
흐레이그 가의 왕비 태생인 이왕자, 사왕자. 그리고 먼 나라에서 온 신비한 3왕비 태생의 검은 머리 삼왕자까지.
이런 상황에서 일왕자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새로운 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럴 때는 빠른 사람이 유리했다. 델피르 왕자의 주변에 귀족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왕자 전하, 소신 롯드 배트인 인사드립니다. 너희들도 인사드리거라. 어서.”
“어허, 배트인 백작. 저번에 보니 흐레이그 백작하고 친해 보이던데. 아. 왕자님. 저는 슈하 게인세이라고 합니다.”
“어머, 전하. 안녕하세요.”
“건강하시니 다행입니다. 신 아젤······”
이제 막 사교계에 입문한 왕자가 이 상황에서 무얼 하겠는가. 그러나 데뷔하는 귀족에겐 언제나 후원자가 있는 법이었다.
“이렇게 보니 좋군요. 델피르 인사드리렴.”
“체이스빌이라. 밀로 유명한 지방이로군요.”
“이번에 귀하의 상단께서 큰 수익이 나셨다던데.”
“아무쪼록 모자란 아이나마 잘 부탁드리지요.”
알린 위피 페벨룬 타스테스테.
그녀는 타스테스테 왕국의 치열한 왕위 쟁탈 정치에서 간발의 차로 패배하였으며, 그 대가로 이웃 왕국의 왕에게 첩으로 보내졌다.
사실상의 국외 추방.
그러나 한 때 여왕을 눈 앞에 두던 그 수완이 어디 가랴. 당시 영 정치적으로는 소양이 모자란 데에다 미혼이기까지 했던 왕을 도와 왕비의 자리를 제 손으로 거머쥔 여자였다.
인사를 붙이는 귀족들을 맞아, 알린 왕비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처음 듣는 생소한 지명의 위치로부터, 심지어 하급 귀족들의 근황조차 언급하는 안부 인사를 통해 그들을 기쁘게 만들어주었다.
귀족들의 눈빛이 바쁘게 오갔다.
늦은 감이 있지만, 왕비에겐 저력이 있었다. 이만하면 따로 정보를 두는 곳도 있는 것임에 틀림없고.
한때 왕의 책사로 불리던 재녀가 자식 농사에 실패한 이후 죽은 줄 알았더니, 아직 현역으로 쌩쌩하게 살아있었다.
‘이번만큼은 안 지지.’
알린 왕비가 재차 다짐했다.
이번에는 왕쟁에서 패배하지 않으리라. 최악의 경우, 그 빌어먹을 친정에게라도 무릎을 꿇고 동원해서 기필코 이 아이를 왕으로 만들고야 말리라.
그러는 동안 델피르 왕자는 제게 쏟아지는 관심이 불편했다. 지금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이들이 난데없이 찾아와 친한 척 구는 것도 불쾌하기 그지없다.
알린은 머지 않아 스스로 해야 할 테니 어미를 잘 봐두라 했지만, 어째 보면 볼수록 자신감이 떨어졌다.
난 저렇게 못 한 것 같은데. 정말로. 델피르 왕자가 떨리는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어떤 귀족들은 그 모습에 주목했다.
치마폭에 쌓여있을 뿐, 미숙한 왕자.
왕위에 오른다면 다루기 쉬울까? 그렇다면 얻는 것도 많아질 테인가 아닌가. 알린 왕비가 실권을 쥐게 될 텐데, 가담할 것인가 말 것인가. 왕비가 만만찮아 보이기는 하던데.
이런 평가들이 뒤얽힌다. 이득과 손해를 재고, 결국 움직임이 결정이 되는 것이다.
어떤 귀족들은 벌써 충성을 암시하며 결단을 내리고, 어떤 이들은 좀 더 물러나 지켜보기로 한다.
이런 것들이 바로 정치였다.
‘방으로 돌아가고 싶어.’
델피르는 마음이 이미 연회장을 떠나 있었다. 연회장을 떠돌던 델피르의 시선이 한 곳에서 딱 멈추었다.
반가운 미소가 번진다. 한 사람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시엔!”
이름만 부르다 뿐이랴. 싱글생글 웃는 인상으로 귀족들을 헤치며 척척 나아가는 모습이 씩씩하기 그지없었다.
“아. 왕자님. 어떻습니까. 이제 좀.”
시엔이 턱짓을 해 보였다. 연회장 한 구석에 귀족들을 원망하듯 내려다보는 망령이 하나.
델피르가 그리로 시선을 옮기고는, 이내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이젠 괜찮아. 어차피 그냥 있을 뿐이라며? 그리고 왜인지 요즘은 뭔가 다른 기분이 들기도 해. 무섭다기보단 불쌍하고 또, 음. 뭔가. 친숙한? 음. 어쨌든 그래.”
“이제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요.”
시엔이 마주 웃어주었다.
정신 세계에 어둠의 축복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는 뜻. 이제 왕자는 공포에서 해방되었다.
부정 세계에 속한 것들에게 느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근원적 공포. 본성에 속하는 공포에서 벗어난 것이다.
어둠의 축복이 축복이라 불리는 이유였다.
“그나저나 연회는 처음이십니까?”
“응. 어머니께선 내가 아주 어릴 적에 데리고 오셨다는데, 나는 기억이 안 나.”
“그럼 처음인 겁니다. 왕자님, 연회에서 중요한 게 뭔지, 제가 조금 가르쳐 드릴 수 있겠군요.”
“정말? 시엔이 가르쳐주면 쉬울 것 같아. 어머니는 음. 대단하시긴 한데······.”
“마마께선 마마께서 할 일이 있으신 거지요. 저희는 저희가 할 일을 하면 됩니다.”
“우리가 할 일?”
“저기 보이십니까?”
시엔이 손짓을 따라 델피르의 시선이 향한다. 길게 늘어선 테이블 위로 연회의 메인 요리들이 종류별로 제 빛깔을 뽐내는 중이었다.
델피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리? 저게 왜?”
“차린 이의 성의를 봐서라도 맛있게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자님은 많이 드셔야 쑥쑥 자라시겠군요.”
“응. 그런데 시엔은 많이 안 먹었어?”
윽. 요 쪼그만 게.
정곡을 찔린 시엔이 움찔했다.
재림 전이나 재림 후나 어째 똑같이 키가 작은 축에 속하는 시엔이었다.
좀 더 한심한 놈으로 재림해도 좋았으니 키가 큰 놈이었으면 얼마나 좋아.
허나 델피르 왕자가 악의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걸 아는 입장에서, 아이의 순수한 말에 굳이 뭐라 하는 것은 어른스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많이 먹을 겁니다. 왕자님도 같이······ 흠.”
“응? 왜?”
“식사는 조금 있다 같이 하시고. 지금은 마마를 좀 도와드리시는 편이 어떻습니까?”
“어머니를?”
델피르가 알린 왕비를 한 번 바라보고, 다시 시엔을 바라보며 싫은 내색을 했다. 시엔이 나지막하게 웃으며 눈을 맞췄다.
“왜, 싫으십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응.”
“왕자님, 싫은 건 누구나 싫은 겁니다. 왕비님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그런데 안 도와드리시려구요?”
맞는 말이긴 한데, 어떤 건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다. 알린 왕비는 음. 지금 한껏 즐기고 있다는 데에 전 재산을 걸어도 될 것 같았다.
허나 델피르에게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순간일 터, 이 때에 마냥 식사나 하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음. 솔직히 뭘 해야할지 모르겠어.”
“어렵지 않습니다. 마마 옆에서 가만히 계시다가, 한 번씩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씩만 하시면 됩니다. 그렇군. 오오. 과연. 이 세 개만 적당히 반복하시지요.”
“진짜? 그렇게만 하면 돼?”
“예. 저는 밤늦게까지 있을 예정이니, 두어 시간만 그러고 있다 오시면 될 겁니다.”
“응. 알겠어. 먼저 가면 안 돼!”
어린 왕자가 서운한 기색으로 돌아서 제 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이내 알린 왕비가 슬쩍 눈인사를 건네오고, 시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시엔. 언제부터 왕자님과 사이가 좋았지?”
“아. 왔네요. 언제 왔어요?”
“됐어. 안부인사를 들을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카레네 티란디스.
티란디스가의 장녀인 그녀는 여자치곤 이례적으로 키가 컸다. 키가 작은 편인 시엔과는 정말로 머리 하나 차이였다.
가까이에서 그 정도 신장 차이가 나면, 올려다보기에 목이 아플 지경이 된다.
“그런가요?”
“존대도 필요 없어. 네 누이 역할 한 적도 없는데 뭐.”
“아. 그럼. 그렇게 하지, 뭐.”
카레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제야 좀 사람다워 보이네. 앞으로 한심한 놈이 보이면 독을 좀 먹여야겠는데. 한 방에 멀쩡해지는 걸 보면.”
이게 카레네의 힘이었다.
당당하고 곧고 담백하다. 꽤나 민감한 농담임에도 불구하고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 유쾌함을 가졌다.
시엔이 농을 받았다.
“조금으론 안 돼. 많이 먹여야 할 걸.”
“많이. 그거 기억해 둬야겠네.”
남매가 나란히 낄낄거렸다.
카레네 나름의 사과 표시였다.
그녀는 시엔을 혐오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베른닐 건은 미안하게 됐어.”
“베른닐? 베른닐이 왜?”
“내가 붙였거든. 너한테. 안 그래도 쫒아낼까 고민중이었는데. 마침 자리가 나서.”
옆에 있던 베른닐이 움찔 놀랐다.
“나름 좋은 친구야.”
“기사는 아니지. 검을 좀 휘두를 줄 알 뿐.”
이게 그녀의 성격을 한 마디로 나타내는 것이리라.
카레네는 강한 사람이다. 신체적으로도 이미 어느 정도 경지에 있는 실력자이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라 굳건한 정신이야말로 카레네의 진정한 가치리라.
그래서 나약한 이를 혐오했다.
“이제라도 기사로 하나 붙여줄까?”
“친구라니까. 앞으로도 내 호위는 베른닐이 맡을 거야.”
베른닐의 표정이 감격으로 물들었다가, 이내 다시 어두워졌다. 그리고 다시 웃다가, 또 시무룩해지고. 지금 어째야 할지 모르겠는 모양이었다.
“친구라. 뭐. 그렇다면 나쁘지 않지.”
“그나저나. 카레네가 했다고?”
“그럼 창공 기사단은 내 꺼니까.”
꽤나 담대한 선언이었다.
가문의 최고 기사단이 제 것이라 딱 부러지게 말할수 있다라. 카레네의 성격대로라면 거짓말은 아닐 터.
애초에 카레네야말로 현재 가장 유력한 작위 계승 후보가 아니던가.
로우드는 제 어미가 틀어쥔 안살림, 그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구축했다.
반면에 카레네가 쥔 것은 무력이었다.
가문의 가장 강력한 기사단을 확보했는데 병사들이며 경비단이면 어떻겠는가.
그리고 군사란 독립된 것이 아니다.
거기에 납품하는 각종 상인들까지 카레네의 세력이라 할 수 있으리라.
“시엔 티란디스.”
카레네의 표정이 돌연 사나워졌다.
가시 돋힌 말이 시엔에게 날아들었다.
“왕자랑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네 주제를 넘었어. 가문이 누굴 지지하는지 감히 네가 결정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 5. 결투결투 열렸네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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