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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망령재림-14화 (14/268)

< 5. 결투결투 열렸네 [2] >

셜리는 잠시 충격을 받은 망연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확실히 그래 보이네. 사람이 달라 보여.”

“다른 사람이라 생각하시는 게 편하실 겁니다.”

“······그래도 무사하니 다행이야. 그냥 이 말을 하고 싶었어.”

셜리가 등을 돌렸다.

이제보니 질척거리거나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시엔이 잠시 갈등했다.

남의 연애사만큼 재미있는 게 또 있던가. 그리고 이 몸뚱이의 원래 주인도 사실은 남의 범주에 속했다.

나 아니면 남이니까.

그러니까 그 청년이 왜 차였는지 궁금했다.

“유르반 영애.”

“무슨 일이야? 아니, 이제 티란디스 자제라 불러드려야 하나요?”

“다른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이렇게 되었으니 파약의 원인이라도 알 수 있을까 합니다만.”

무슨 저의인가 알아보겠다는 양 눈을 마주쳐오다, 이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제멋대로였을 뿐이에요. 그저 저를 사랑해주는 사람.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사람. 당신에겐 죄송하지만, 마음을 따르고 싶었어요.”

“아아. 이해합니다. 사람 마음이란 것이 으레 그러한 것이니까요.”

시엔은 진심이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이냐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냐. 어떤 이들은 전자가 현명하다 말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래서는 진심으로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하리라.

그러나 무엇이 진심이고 무엇이 행복이랴.

그러니 마음 가는 대로 움직였다 해서 그녀를 비난할 수는 없으리라.

물론 남자 보는 눈이 형편없는 여자라고는 할 수 있겠다.

적어도 실연에 독을 마신 청년에게, 그 상실조차 네 잘못이라 사과하라 강권하는 사내가 제대로 된 사람이랴.

그러고 보니 천 년 전에도 뭐 이런 게 있었던가? 나쁜 남자가 끌리는 법이라고? 마냥 개소리인줄 알았더니 여인의 보편적 성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흐레이그 자제도 같은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라겠습니다. 그게 사람의 마음이니 말입니다.”

그래. 그런 것이다.

셜리가 사랑하는 이가 페시번이라 시엔을 져버렸다면, 그 역시 다른 여인을 사랑한다 떠나도 그러할 수 있는 일이겠지.

셜리가 흠칫 몸을 떨었다. 한 발짝 물러나며 파르르 떨리는 작은 체구. 어느새 얼굴이 창백한 색으로 물들었다.

“······당신. 누구야?”

“예? 무슨 말씀이신지.”

“당신, 시엔이 이냐. 시엔일 수가 없어. 시엔은 어디에 있죠?”

떨리는 목소리나마 확신이 깃든어 있었다.

솔직히 감탄이 나올 수밖에.

그간 시엔을 대하는 이들은 갑자기 바뀐 사람에 당혹스럽다는 반응이었지, 아예 다른 사람이라 여긴 이는 없었으니.

시엔의 부재를 깨달은 첫 번째 사람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이라니.

재림 이전, 이 몸의 주인을 이해하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리라.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영애와 저는 더는 연인도, 약혼자도 아닌데 말입니다.”

“대체 무슨 짓이라도 한 건가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이라 생각하시라고.”

“시엔은, 시엔은 어떻게 된 거죠! 그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요!”

“그리 놀라진 마십시오. 독을 마시고 산 이를 보셨습니까? 이리 멀쩡한 자는 거의 없습니다. 대개는 정상이 아니게 됩니다만. 보통은 바로 이 머리가.”

시엔이 제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셜리가 입술을 깨문다.

“기억과 추억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거기 깃든 감정의 유무지요. 기억은 그저 지식일 뿐, 아무리 떠올린들 거기에 감정이 담기지 않으면 추억이 되진 못합니다.”

“그 말은······”

“당신을 사랑하던 남자는 그때 죽었습니다. 여기 있는 시엔은 완전한 타인이죠. 그러니 영애가 제게 미안하거나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죽은 이에게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셜리가 비틀거렸다.

시엔이 조소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선택은 당신의 선택. 그걸로 비난하진 않겠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당신을 사랑하는 이가 남아있으리라, 혹여 언제고 당신을 원하는 이에게 돌아갈 수 있으리라 하는 마음은 아니었으면 합니다.”

“그런 생각은······”

“뭐. 그러시다면야. 더 하실 말씀이라도?”

“나는. 그. 그러니까······”

셜리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 테라스의 창문에 등을 부딪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팔을 뻗었다.

유리창과 유리문을 겸하는 테라스 출입문의 손잡이를 가까스로 더듬어 찾아내곤,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내달렸다.

겁에 잔뜩 질린 줄행랑이었다.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뭘 했다고 도망을 간담.

그렇다고 시엔이 굳이 거기에 대해 깊이 생각할 사람은 아니었다. 뭐, 내가 한 말 중에 켕기는 거라도 있었던 모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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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을 때, 시엔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안 그래도 주목을 받지 않았던가. 테라스 쪽에 유난히 몰린 인파가 그걸 증명하듯이.

전 연인이 나란히 테라스에 들어가더니, 여성이 먼저 겁에 질려 뛰쳐나가더라.

생각해보니 그림이 되게 별로였다.

연회장에 다시 들어서자마자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총총 날아와 부딪친다. 표정을 보아하니 다들 궁금해 죽겠는데, 그렇다고 개인사를 함부로 물어볼 수 없어 몸이 달아있는 모양. 그래서 자기가 물어볼 순 없고, 사연을 알고는 싶으니 서로 눈치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눈빛들이 시엔에게 한 번, 제 일행에게 한 번, 또 시엔에게 한 번. 또 다른 일행에게 한 번. 이런 식이었다.

그 때였다. 연회장을 울리는 고함소리.

“시에엔! 이 개자식 같으니!”

사람들이 양 옆으로 쫙 갈라졌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잘 훈련된 정병과 같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길 저편에 페시번 흐레이그의 시뻘건 얼굴이 보였다.

여자가 가더니 남자가 오네. 아주 연놈이 쌍으로 지랄이구만. 시엔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자 페시번이 발끈해 당장이라도 달려올 기세라, 시엔이 대답했다.

“발 조심해라. 또 넘어질라.”

그 말에 페시번이 움찔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 혼자 넘어졌다 여겨도, 페시번 본인은 제 발에 들어오던 알 수 없는 힘을 분명히 느꼈다.

그리고 그건 시엔의 짓이었다. 비열하게도 어떤 증거도 없으니 미쳐버릴 지경이지만.

페시번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딴에는 또 같은 수법에 당하지 않으리란 생각이리라.

그러나 남들이 보기에 참 웃기는 광경이란 생각은 못 하는 모양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올 듯하더니, 발 조심하라는 한 마디에 살금살금 조심스레 발걸음을 떼는 모습이라니.

달려와 멱살이라도 잡을 요량이었던 것 같다. 다만 살금살금 다가와 멱살을 잡는다는 게 상당히 어색한 일이라 그저 마주보고 버럭 소리치기만 한다.

“내 피앙세에게 또 무슨 짓을 한 거냐!”

“아무짓도 안 했는데.”

“내가 그 말을 믿으라고!”

“믿기 싫음 말든가.”

시엔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페시번의 얼굴이 일그러지다가, 이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슬그머니 미소를 띄웠다.

“언제까지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하군. 준비는 잘 되고 있나 모르겠어? 대기사는 정하셨나? 샹라 경이 상대니 튼튼한 이여야 할 거야. 힘들 것 같지만.”

결투장은 확실히 교묘한 한 수였다. 페시번의 머리에서 나왔는지, 심복으로 머리 좋은 놈을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허나 시엔은 이미 대처를 마련했다.

시엔이 무슨 뜻이냐는 듯 되물었다.

“대기사? 웬 대기사?”

“대기사 말이다! 결투를 진행할 대기사!”

“결투? 무슨 결투?”

“결투 말이다! 너와 나의!”

“너랑 내가? 언제?”

“내일 모레! 화요일 말이다!”

“화요일에? 뭐를?”

“결투! 결투! 결투! 모르는 척 할 셈이냐?”

“모르는 척? 뭘 모르는 척을 해?”

“결투! 으아아아!”

흑마법사 시절, 술집에서 떠버리 하나가 여심을 사로잡는 방법이라고 가르쳐 준 화술이다. 믿기지 않는다는 말에 직접 시범을 보여주겠다던 떠버리는, 보란 듯이 다가간 여인에게 시원하게 냉수를 처맞았다.

그때 시엔은 여심을 사로잡는 게 아니라 사람 승질 돋구는 화술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아닌게아니라, 지금도 봐라. 잘 먹히지 않나.

“네놈! 결투장을 받았지 않나!”

“결투장? 못 받았는데?”

“거짓말! 하인이 분명 네게 전달했다 했다!”

“몰라. 나는 못 받았어.”

“이젠 거짓말까지 할 셈이냐! 여기 이 사람들 앞에서!”

시엔이 흥미진진한 눈빛을 보내는 귀족들이며 하인들을 죽 둘러보았다.

완전히 구경꾼이다.

그중 후작가의 혈육이 전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 한 명도 걱정하는 이가 없으니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가문이란 말인가.

그나마 한 명 베른닐이 염려 가득한 시선을 보내고 있을 뿐이고.

시엔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결투장을 받은 적이 없는데.”

“거짓말!”

“아니, 못 받은 걸 못 받았다고 하지.”

“하인이 분명히 네게 전했다 했다고 했다!”

“그럼 그 하인이 거짓말을 한 거 아닐까?”

“어째서 내 하인이 거짓말을 한단 말이냐!”

페시번이 펄쩍 뛰었다. 시엔이 물었다.

“그럼 나는 왜 거짓말을 하겠어?”

“그야 네가 결투를 피하고 싶으니까! 뻔뻔하기 짝이 없는 자식! 명예도 모르는 자식! 너 같은게 귀족이라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

페시번이 악담을 퍼부었다.

시엔은 좌중을 한번 쓱 둘러보곤 입을 열었다.

“여러분 소란에 죄송합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결투를 피하고자 결투장을 받지 않았다. 거짓말을 한다 하는군요.”

“너 이 자식! 무슨 수작이냐!”

“흐레이그 공자의 말이 맞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결투를 피하려는 제가 지금 연회 장소에 이렇게 와 있습니다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웅성웅성. 사람들의 소근거림이 점차 번져나갔다.

시엔의 말은 타당하게 들렸다. 굳이 결투장을 못 받았다 우기는 황당한 수작을 부리면서까지 피하고 싶은 결투라면, 상대와 만나 면전에서 결투를 받아들여야 하는 자리에 나타나지는 않았을 터.

페시번이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또 그렇다.

“너, 너······!”

“뭐. 하인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것은 그 주인의 책임이지만, 나는 관대하니 오해가 있었던 걸로 생각하고 용서하지.”

“너, 너어!”

“크흠.”

헛기침 하나가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장대한 체구의 중년인이 눈을 부라리는 중이었다. 흐레이그 공작 본인이었던가.

그 덕에 페시번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런 식으로 망신을 줘 어떻게든 무마해 보려는 수작인 것 같은데, 더는 못 받아주겠군. 시엔 결투다. 모레 화요일, 본인 혹은 대기사를 세워 네 명예를 증명해라.”

“명예?”

“그래. 만약 내가 이기면, 너는 내 피앙새에게 가 네 경솔한 행동이 그녀에게 끼친 걱정에 대해 정중히 사과드리고, 내게 수작을 부려 명예를 손상한 점을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한다.”

페시번이 사나운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참고로 내 대기사는 샹라 경이 나갈 거야.”

허어. 호오. 구경꾼들이 추임새를 넣었다.

상대를 박살 내기로 유명한, 아주 강한 기사라고 했던가. 유명해서 그런지 다들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엔이 말했다.

“그 대신, 내가 이겼을 경우엔 네가 무릎 꿇고 사죄를 해야 할 거야. 네 약혼녀의 전 연인에 대한 그릇된 시기로 내 명예를 공연히 훼손하려 했던 사실에 대해서 말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받아들이란 말이냐?”

“아니면 결투는 무르던가.”

그러자 페시번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표정 변화가 빠른 녀석이네. 시엔이 그리 생각했을 뿐이다.

“네 수작은 그 정도냐? 그런 조건을 달면 내가 결투를 무를까 봐서? 좋다. 다만 샹라 경도 진심으로 갈 테니, 단단히 준비하는 것이 좋을 거야.”

“남이사.”

시엔의 대꾸에 일부에서 큭큭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이어 눈을 부라리는 큰 흐레이그와 작은 흐레이그의 연합 공격에 쏙 들어가고 말았지만.

< 5. 결투결투 열렸네 [2]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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