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결투결투 열렸네 [1] >
국왕 탄신연 4일차에는 다시 저녁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성대한 정찬이 열린다.
시엔과 베른닐은 갈 수 없는 처지였기에 별 상관없는 일이긴 했다.
결투장을 못 받았다 오리발을 내밀기로 한 이상, 괜히 마주치면 전부 물거품이 될 테니까.
결투에 안 나가고 나서야 못 받았다고 해야지, 그 전에 못 받았다 하면 면전에서 결투를 신청할 것이 아닌가.
어차피 결투에 안 나가고 나면 재신청을 하던 뭘 하건 영지로 돌아갈 테니 이후야 뭐 문제없을 테고.
면전에서 결투를 안 받아주겠다 뻗대는 방법도 있다만, 연회 자리에 티란디스 후작이 있는데 그런 불명예스런 거절은 허락되지 않을 것이 뻔했으니.
그렇게 연회장의 맛난 음식들이나 서로 한 가지씩 대며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자, 카라렐이었다. 어제도 카라렐이 찾아와 또 왕자와 시간을 보냈던 시엔이었다.
“왕자님께서 찾으십니까?”
그러자 생각지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닙니다. 마마께서 공자님을 뵙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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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린 위피 페벨룬 타스테스테.
위피 페벨룬은 페벨룬 왕가의 정비라는 뜻이며, 타스테스테는 이웃 왕국의 국명이기도 했다.
옆 나라 출신의 왕비는 활짝 핀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국왕은 완전히 늙은이던데, 도대체 나이 차이가 몇이람?
그러나 그녀가 세 명의 공주와 한 명의 왕자를 둔 어머니임을 생각해보면, 의외로 나이 차이는 크지 않을지도 몰랐다.
“어머나. 헌앙하기도 해라.”
“감사합니다. 마마.”
“감사한 일은 아니에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 한들 그건 칭찬이 아니니까요. 공자는 좀 더 당연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겠죠.”
“허면 마마께서 아름다우시다 말씀드리는 건 굳이 드릴 필요가 없겠습니까?”
“공자는 여심을 모르는군요. 여인에게 아름답다란 말은 수만번을 들어도 기분 좋은 법이니.”
왕비는 꼿꼿하고 당당했다. 기품보다는 묵직한 위엄이 느껴지는 사나운 인상. 목소리부터가 카랑하니 당찬 기백이 흘렀다.
늙은 기색이 완연한 국왕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왕비보다는 여왕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편히 있도록 해요. 뭐. 공자가 긴장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이리 보자한 이유는 그대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니까.”
“감사라 하시면,”
“내 왕자에게 그대 이야기를 들었어요. 항상 어둡고 움츠러든 아이였건만, 어제는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지 뭐야. 이 아이가 내 아이가 맞나 하고.”
왕비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이가 더이상 떨지 않던데. 그간의 두려움이 사라진 게 보여요. 대체 어떻게 한 거죠?”
“두려움이란 제대로 마주하고 나면 왜 그랬냐는 듯 사라지는 것이니까요.”
“옳은 말이에요.”
왕비가 눈을 빛냈다.
“내 공자에 대한 소문을 들었는데, 이해를 할 수가 없네. 어쩜 이런 인물이 그럴까.”
“뭐. 괜한 소문이 있겠습니까? 죽다 살았더니 이렇게 되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칭찬이에요. 칭찬. 어디 보자. 그대에겐 포상이 필요해요. 어디 원하는 거라도 있을까?”
“그런 뜻으로 한 일은 아닙니다만.”
“어머나.”
왕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다.
“그이는 많이 늙었어요. 공자도 봤겠죠? 그런데도 왕국에 왕세자가 없었어요. 그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일인가요? 얼마나 큰 우환인지. 뭐. 물론 아이가 그 상태라. 제 부덕이라 그리 가슴을 치고 있었건만. 그런데, 공자가 지금 그걸 해결한 거예요.”
“역시나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감히······”
“뜻은 문제가 아니니까. 알겠어요? 왜냐하면, 사실 지금 많이 늦었거든. 이젠 아이 곁에 사람이 별로 없어. 그러니 포상을 받아야만 해요.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진작에 책봉되었어야 할 왕세자가 아직까지 공석이었다.
왕실의 적자가 광인이나 다름없는 취급으로 왕자로 머물러 있는 사이에, 다른 왕자들은 이미 제 세력을 이루었다.
그리고 왕은 늙었다.
“듣자 하니 이번에 파약을 당했다 하던데. 이번 연회도 그 때문에 찾아왔겠지요?”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일단이라. 아직 짝을 맞이할 생각이 없다? 역시, 아직 유르반 가의 여식에게 마음이 남아있던가요?”
유르반 가의 여식이라면 이 몸뚱이의 전 연인을 말하는 것이리라. 시엔이 기겁을 하며 대답했다.
“아니, 그건 절대 아닙니다.”
“후훗, 확실히 그런 것 같네요. 그럼 뭘까요. 공자가 세기의 로맨티스트라는 말은 들었는데. 정략으로 얽힌 관계는 싫다는 건가?”
순간 두건이 머리를 스쳤다.
베른닐은 구질구질하고 우울하고 처절한 이야기 끝에 결혼은 남자의 무덤이다를 부르짖지 않았던가.
여기서 긍정하지 않으면 귀찮아질 것 같으니, 시엔이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그렇습니다.”
“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허나 남녀 일이라는 게 모르는 일이니, 공주들을 봤던가요? 날 닮아 아름다운 아이들이랍니다.”
이럴 줄 알았지. 시엔이 신음을 삼켰다.
왕비는 천성이 귀족이었다.
“큰아이가 스물하나. 둘째가 열아홉이니 공자와 동갑이고. 셋째는 올해 열다섯이에요. 마침 셋 모두 혼처가 없으니 공자의 취향이 중요하겠네요. 연상? 연하?”
“그것이.”
“하긴. 지금 결정할 필요는 없으니, 일단 만나보는 것이 중요하겠죠. 안 그래요?”
인척은 가장 가까운 아군, 혹은 가장 증오하는 적 둘 중 하나이기 마련이다. 후자는 사실 드문 경우이니 대부분이 전자에 속했고.
특히나 델피르처럼 세력 기반이 모자라다면, 우리 이런 사람 있다고 공개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었다.
만약 시엔이 공주와 이어진다면?
티란디스 후작가 전체가 델피르를 지지한다는 선언이 되리라.
왕비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일단은 후작님께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가문의 중대사를 혼자 결정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2왕비가 누구인지 알잖아요? 티란디스 후작에겐 물어볼 필요도 없을 테지.”
2왕비 아타냐 위피 페벨룬 흐레이그.
흐레이그 공작가는 같은 제후급 귀족으로 티란디스 후작가와 세력권을 맞댄 오랜 앙숙이었다.
그러니 티란디스는 결국 2왕비 태생이 아닌 다른 왕자를 지지할 수밖에는 없다. 그리고 그중 가장 정통성 있는 후계는 델피르 왕자였으니.
결혼은 아직 좀 이른데.
시엔이 머리를 굴렸다.
문득 드는 생각이 하나.
“마마. 공주님들은 제겐 아직 과분한 듯합니다만. 포상을 내리시겠다면 감히 하나 요청드려도 되겠습니까?”
왕비가 눈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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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실로 돌아오자 베른닐이 반겨주었다.
“마마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나보고 공주랑 결혼하라던데?”
“안주인께서 생기시는 겁니까? 흠.”
베른닐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시엔이 인상을 구겼다.
“왜 베른닐이 심각해?”
“그야 안주인께서 홀몸으로 오실 게 아니라, 그분께서도 호위기사가 있을 거 아닙니까. 왕실 기사라면 제 위치가 조금······”
“됐어. 안 할 거야.”
“현명하신 선택입니다. 결혼은 남자의 무덤이니까요. 게다가 공주님이면 내내 모시고 살아야 할 텐데. 으으.”
베른닐이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는 듯, 팔을 문지르며 몸서리를 쳤다. 아닌 게 아니라 팔에 오도도 돋은 닭살들이 기사의 진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건 됐고. 베른닐. 그 샹라인지 뭔지, 엘딘 경하고 싸우면 누가 이겨?”
“엘딘 경? 검위공 엘딘 허슨드님 말입니까.”
“어. 직속친위대의 그 양반 말야.”
그러자 베른닐이 펄쩍 뛰었다.
“아니, 비교할 분을 비교해야지요! 아무리 샹라 경이라도 해도 검위공에 비빕니까? 아마 샹라 경이 3 명쯤 있어야 할 건데요.”
“흠. 나이가 있는데도?”
“물론 검위공이 연차가 좀 있으시긴 하십니다만, 그분 정도 경지에선 큰 의미는 없으실 겁니다. 물론 현역이실 때만큼은 못하시더라도.”
“그렇게 대단한 양반이야?”
“그럼요!”
베른닐이 펄쩍펄쩍 뛰었다.
“일개 개인이 대륙에 명성을 날리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난 쉽던데. 시엔이 속으로 생각했다.
베른닐이 계속해서 열변을 토했다.
“한 개 왕국의 국왕도 이름을 알리지는 못하는데, 검술 하나만으로 그걸 이룬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분입니까!”
“대단히 존경하는 사람인가보네.”
“아마 기사들 중에 그분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검술과 인품을 두루 갖춘 분이시니까요. 그런데 그분은 왜 말씀이십니까?”
“흠. 그렇다 이거지?”
시엔이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른닐, 준비해.”
“예? 무슨 준비 말씀이십니까?”
“무슨 준비긴. 연회 가야지.”
“예? 안 가신다면서요?”
“생각이 바뀌었어. 가서 맛난 거 먹고오자.”
베른닐이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결투는요? 혹시 절 내보내실 생각이신 건 아니실 거라 믿습니다.”
“나가라고 하면? 안 나가려고?”
“······최후의 만찬입니까? 알겠습니다.”
베른닐이 비장하게 대답했고, 시엔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 그래도 안 나간다고는 안 하네. 기특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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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에 입장하자, 시엔은 제게 와 닿는 시선들을 느꼈다. 느낌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시엔이 입장하자마자 기묘하게 연회장이 조용해지는 것을 보니.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구경거리라고 날 이렇게 쳐다봐?’
일단 델피르 건은 아닐 테고. 왕실과 얽힌 소문은 어지간해선 밖으로 잘 나가지 않으니.
그럼 결투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었다.
시엔은 이내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오랜만이야. 시엔.”
셜리 유르반. 시엔의 전 연인이었다.
요 고약한 인간들은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연의 슬픔에 빠져 독을 마셨던 청년과,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여인. 그리고 그 여인의 현 연인이 한자리에 모이는 그 순간을.
왠지 재미있을 것 같은 그런 삼자대면.
솔직히 시엔이 제3자의 입장이었다면 기대할 만한 일이기는 했다. 허나 지금 시엔은 본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3자도 아닌 어중간한 장본인이었다.
전 연인을 사랑하던 시엔은 이미 죽었는데, 여기 어쨌거나 시엔이 서 있기는 하니까.
“왠지, 변했어.”
“음.”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어. 그래.”
연회장에는 으레 단둘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기 마련이었다. 테라스라고 하는 장소다.
테라스로 나와 창문과 문을 겸하는, 한 쪽으로 부르기에는 뭔가 미묘한 것을 닫으면 둘만의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엔이 테라스에서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왜인지 연회장에서 유난히 요 테라스 근처에만 사람이 몰려있는 기분이었다.
뭐 상관은 없겠지.
셜리 유르반은 확실히 미인이기는 했다.
다만 시엔의 이상형은 나올 데가 좀 많이 나오고, 들어갈 데는 적당히 들어간 유형. 이상형과는 좀 동떨어진 미인이었다.
아무래도 이전 몸뚱이가 여자 볼 줄을 몰랐던 모양이지.
시엔이 생각하는 사이, 셜리가 말문을 텄다.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야. 사실 걱정을 많이 했었어. 네가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
시엔이 머리를 굴렸다.
이 말의 요지는 대체 무엇인가. 이제와서 이쪽에 질척거릴 셈인가? 저한테 차였다고 독을 마셨다는 사실에 감격해서?
그거 이상하지 않나? 보통 그러면 감격이 아니라 치를 떨어야 정상인데. 하긴 이 몸뚱이의 주인이란 놈도 정상이 아닌데 그 연인도 정상이랴.
어차피 내 것이 아닌 연애사이기도 하고.
시엔이 딱 자르기로 했다.
“당신이 알던 시엔은 그때 죽었습니다. 유르반 영애.”
< 5. 결투결투 열렸네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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