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2화 (12/268)

< 4. 어린 왕자와 나이는 많은 흑마법사 [2] >

시엔이 카라렐의 늠름한 면모에 놀랐다. 능숙한 낙법과 얻어맞은 제 얼굴도 살피지 않고 왕자를 찾으며 달려들어가다니.

그리고 방 안의 풍경에 움찔했다.

“으악! 보지 마! 사라져! 으아악!”

“전하, 정신 차리세요! 왕자님, 저 카라렐이에요! 왕자님! 전하!”

끌어안긴 채 팔다리를 바동거리는 어린 소년과, 그를 애써 끌어안고 있는 카라렐.

흑마법사의 눈에는 남들과는 다른 것들도 보인다. 둘의 주변으로 방 안에 가득 찬 거뭇한 그림자들이었다. 망령들. 그런데 이상하다.

뭐야, 왜?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정도로 망령이 모여있었다면 시엔이 진작 알아차렸어야 정상이었다.

망령은 한데 모이면 모일수록 서로가 내뿜는 음차원 에너지의 공명으로 인해 더욱 강력한 파장을 만들어냈다.

이 정도의 숫자라면 진작에 부정 세계와의 교차로 심연 마경이 만들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그러나 정작 음차원 에너지는 희미하기 짝이 없다.

이게 망령이 맞나?

망령들에게 이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말은 반대로 실낱같은 이성은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대개 생전의 원한이나 미련에 관련된 것들로, 망령들은 스스로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방 안은 조용했다.

“신기하네.”

영혼 자체가 마모된 망령들이었다. 시엔도 처음 보는 특이한 것들. 이미 원한이며 미련조차 남아있지 않은 망령들이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세상에 남아있지?

사람으로 따지자면 심장을 잃어버린 이가 멀쩡히 살아있는 것과 같은 꼴이었다.

“왕자님, 정신 차리세요! 왕자님!”

“날 보고 있어! 날 보고 있다고!”

“왕자님, 제발······”

한가하게 구경을 할 때는 아니었다. 시엔이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이미 제 힘을 전부 잃어버린 망령들이다.

일단 좀 다들 꺼져 봐.

제대로 된 흑마법사의 부정적인 심상만으로도 망령들이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

어린 왕자의 입이 멍청하게 벌어졌다.

그간 저를 괴롭히던 검은 것들이, 한 청년을 피해 도망치듯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13살. 아직 어린 소년의 눈에는 어찌 비칠까.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어, 응, 그래. 괜찮아······. 괜찮아졌어.”

“그거 다행이군요.”

시엔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자 어린 왕자가 시엔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옆에서 경악하고 있는 카라렐은 덤이었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기에, 민망해진 시엔이 헛기침을 했다.

“시엔 티란디스라고 합니다.”

“아, 응. 난 델피르야. 델피르 프린 페벨룬.”

“흠. 역시.”

“응?”

“아닙니다. 짐작이 가는 것이 있어서요.”

“그게 뭐야?”

“일단 음. 왕자님과 둘이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 레이디께서 잠시만 비켜 주시겠습니까?”

카라렐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가 한번 발작을 일으키면, 아주 어릴 때부터 보아온 그녀라고 할지라도 진정시키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처음 본 사람한테 이래? 카라렐이 왠지 떫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를 비워주었다.

문이 닫히고 나자, 방 안에는 둘 뿐이었다.

왠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왕자가 부담스럽다. 시엔이 시선을 슬쩍 피하며 물었다.

“왕자님이 죽은 자를 본다고 하더군요. 제가 거기에 관심이 좀 있어서 말이죠.”

“응. ···아냐. 죽은 자인지는 나도 몰라.”

“그 말은?”

“그냥 검은 그림자들이야. 많고, 어떤 것들은 말을 하기도 해. 나쁜 말들이야. 그리고 어떤 것들은 날 해치려고 해. 수도 없이 몰려와서 날 노려봐.”

“노려본다구요?”

“모르겠어. 사실 검은 것들은 눈이 없는데, 그런데 난 알아. 분명히 날 노려보고 있는 거야.”

“과연. 힘들었겠군요.”

시엔이 방 안의 모습을 떠올렸다. 수없이 몰려있던 쭉정이 망령들. 아직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퍽 충격적인 광경이었으리라.

또래보다 더 작은 체구. 호의호식해야 할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뺨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야윈 모습.

그간 어찌 지내왔을지 알 법 하다.

안쓰러운 마음에, 생각 없이 손이 먼저 나갔다. 머리를 몇 번 쓱쓱 쓰다듬어주고 나니, 생각해보니 얘가 바로 왕자다.

시엔이 왕자였던 시절은 한참 전에 지나갔으니.

“아. 실례했습니다. 무심코 그만.”

“아, 아냐. 괜찮아. 신경 안 쓰니까.”

“그간 많이 힘들었겠네요.”

“내 말을 믿어? 믿어주는 거야?”

“왕자님이 그렇다고 하시잖습니까?”

“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질 않았어. 다들 나보고 미쳤다고 해. 미친 왕자라고.”

“미치셨습니까?”

“아냐!”

델피르가 소리를 빽 질렀다. 그리곤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가끔은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어. 내가 미쳐서 검은 것들이 보이는 게 아닐까.”

“미친 사람하고는 대화가 통하지 않죠.”

“그렇지? 음. 모르겠어. 원래는 그것들이 항상 있어. 애써 무시하려고 하면, 어느새인가 잔뜩 몰려들면, 머리가 새하얘져서. 그런데 네가 오니까 다 도망쳤어. 네가 무서운 걸까?”

“흠. 글쎄요.”

시엔이 왕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눈동자 저편 어딘가에 비치는 흐릿한 영혼의 편린을 바라보았다. 수면 아래에서 바라보듯 일렁이는 검은 빛이 거기에 있었다.

천 년 전에는 이를 어둠의 축복이라 했다.

천년 전, 시엔이 타고난 운명이기도 했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매우 드물다고는 하나 당대에 항상 서너명 정도는 어둠의 축복을 타고나곤 했으니까.

역사에서 흑마법이 아예 지워졌다고 한들, 사람이 으레 타고나는 운명조차 사라지지는 않으리라.

“왕자님. 사실 제게도 그들이 보인답니다.”

“시엔도? 정말이야? 너도 저것들이 보여?”

“예. 뿐만 아니라. 잠시 실례할 테니 놀라지 마십시오.”

시엔이 반지에서 사역한 망령들을 불러냈다. 심약한 왕자가 놀랄까 입을 꽁꽁 틀어막은 채였다. 보통 등장과 함께 중얼거리는 음산한 저주의 말이 없으니 술에 물 탄 마냥 밍밍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놀라지 말라 일러둔 참이건만, 왕자가 깜짝 놀라며 시엔에 팔에 달라붙었다.

시엔이 잠시 궁리하다 진언을 읊었다.

망령들이 둘씩 짝지어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경쾌한 무곡에나 어울릴 법한 모습이었다.

델피르가 입을 쩍 벌렸다.

“어떻습니까? 이래도 이들이 무서우신지?”

“음. 아니, 이렇게 보니. 저것들은 날 노려보는 것도 아니니까.”

“그거 다행이네요, 흠. 왕자님.”

시엔이 말을 골랐다. 어떻게 이해를 시킨담.

“어떤 사람들은 특별한 운명을 타고 태어납니다. 어떤 이는 검에 특출나 대륙에 이름은 날리고, 누구는 세상이 사랑하는 원리를 이해하고 마법사가 되어 우러름을 받기도 하죠.”

“응.”

“그리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우리?”

“예. 우리. 왕자님과 저 말이죠. 우리 같은 사람들은 남들과는 다른 것을 보고 느끼며, 삶과 죽음을 하나로 진리에 이르는 위대한 순환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델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십니까?”

“······아니. 사실 잘 모르겠어.”

시엔이 덧붙였다.

“그럼 제가 저들을 막을 기본적인 몇 가지 방법들을 알려 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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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히 머나먼 과거, 어둠의 축복이 그저 광인의 표상이던 무지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중 한 명이 죽었으나 사라지지 못한 자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리하여 망령을 이해하고 달래며 명상을 거듭한 결과, 일곱 허수 차원에 도달해 반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첫 신비주의자의 탄생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원을 짓고 제자를 키워 신비주의를 전파했다.

그리고 그 후 또 오랜 시간이 지나, 한 명의 신비주의자가 사도를 걸었다.

망령과 교감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과 지배를 통해 사역하여 부리는 방법을 깨달은 것이다.

흑마법사의 기원이었다.

그런 이유로 둘은 서로 같은 것을 다루나 반대의 목표를 지녔다.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 자신이 진리의 일부가 되려는 신비주의자. 역시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고자 하나 그를 통해 기적을 행사하는 절대자가 되려는 흑마법사.

그래서 신비주의자와 흑마법사는 앙숙이다.

물고 뜯기 바쁘니 서로의 배움을 교환할 일도 없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엔 서로의 지식 역시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

그리고 한 왕자가 있었다.

본디 신비주의자들에게 배움을 받았으나 왕국이 멸망한 이후 복수를 위해 흑마도를 깨우친 왕자.

왕자는 어둠의 비밀을 간직한 두 종파의 가르침을 두루 받았으며, 그로 인해 전무후무한 경지의 흑마법사가 되어 세상을 불태웠다.

그 경악할 위용은 그 사후 대륙 모든 왕국들의 주도 아래 신비주의자와 흑마법사가 지워지는 결과를 만들어낼 정도였으니.

시엔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천년이면 위대한 이가 몇이나 나오고도 남았으리라.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둘 모두가 있어 세상인 법. 그걸 모르고 어둠을 지웠으니 인간이 진리에 이르는 길 몇 개가 그대로 끊어지고 만 것이 아닌가.

만약 흑마법과 신비주의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었다면, 지금쯤 그들의 종사와 신나는 토론을 벌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시엔이 아쉬움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델피르 왕자가 말을 꺼냈다.

“어, 그, 이상해. 여긴 어두운데······ 밝아.”

“그게 어둠이 가진 빛이죠. 어둠은 더 큰 어둠 속에서 빛나는 법이니. 어때요, 무서운 기분이 드십니까?”

“아니, 그렇진 않은데.”

델피르는 시엔의 무릎을 베고 누운 상태.

시엔이 왕자의 이마에 손을 얹은 채, 왕자의 정신세계를 이끌었다. 신비주의자든 흑마법사든 그 시작은 먼저 정신세계의 자각이었다.

‘나도 이렇게 배웠으면 편했을 텐데.’

누군가의 정신세계를 이끄는 것은, 당시엔 사원의 종사 정도나 할 수 있는 난해한 일이다. 게다가 그들의 교리대로라면 누군가 깨우쳐준다고 능사가 아니라 스스로 자각해야 해야 하는 것이었으니.

그래서 하루에 10시간이 넘도록 불편한 자세로 좌선하던 때를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양 갈래의 어둠에 정통한 지금이야, 정신세계란 타의건 자의건 그냥 깨우치면 그만임을 안다.

그러니 어린 왕자에겐 길잡이가 필요했다.

“그런데 뭔가 불편한 느낌이 들어······.”

“불편하다라. 뭐가 불편하시죠?”

“빛. 너무 밝은 빛이 있는데.”

“빛이라. 어느 쪽인가요.”

“저기. 그리고 저기.”

왕자가 누운 채로 손가락질을 했다.

시엔의 시선이 손가락 끝을 향했다. 이내 인상이 찌푸려진다.

“성물을 가져다 놓으셨군요.”

“신전의 신관들이 줬어. 저주나 악령을 막아 줄 거라면서······. 효과는 없었지만은.”

“그야 그럴 겁니다. 신성은 부정만을 태우니까요.”

부정. 바르지 못한 것, 세상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뜻했다. 망령은 자연스런 세상의 일부이니 성물로 퇴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음차원 에너지는 본디 부정 세계의 것. 부정한 것이라 신성에 반발한다. 그러니 망령들이 물러가긴 하겠지만.

혹시 저것들 때문인가?

음차원 에너지를 잃은 채 그저 형태만 남은 망령들이 떠올랐다.

어둠의 축복을 받은 왕자가 여기에 있으니 당연히 망령들이 여기에 이끌려 몰려오고, 방 안에 성물이 몇 개나 있으니 음차원 에너지는 모이지 않는다.

망령이 신성에 사라지지는 않으니 그대로 있으나, 음차원 에너지는 모이지 않으니 그 힘은 서서히 빠져나갔을 터.

그게 반복되어 존재하되 어떤 이성조차 존재하지 않는 쭉정이 망령이 만들어졌다라.

‘현재까진 그게 제일 타당한 가설인데.’

시엔도 처음 보는 현상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다만 여기서만 관측이 되며, 변수는 하나뿐이니 그러리라 추론이 가능할 뿐.

“여기까지면 충분할 겁니다. 이 느낌을 잘 기억해 두시고 매일 반 시간 정도는 명상을 하시면 됩니다.”

“그럼 저들이 사라질까?”

“아니요. 하지만 오늘부턴 저들이 더 이상 두렵지 않으실 겁니다.”

“아······.”

“성물은 상관없습니다만, 명상에 불편하시면 치워두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두꺼운 천을 씌워두셔도 효과가 있겠지요.”

신비주의란 신성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니 성물이든 뭐든 별 상관은 없다.

시엔은 왕자에게 흑마도를 가르쳐 줄 생각은 없었다. 제자를 키우는 취미도 없거니와, 있다 해도 왕자를 제자로 들일 수도 없는 노릇.

그저 신비주의의 기초만 조금 다져 주면 망령으로 고통받는 일은 더이상 없을 터.

같은 운명으로 태어난 아이를 위한 작은 호의였다.

“그리고 제가 가르쳐드린 내용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응? 왜?”

“사람들은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마마마는 사람들이 날 두려워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두려움과는 다른 두려움입니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란. 흠. 아직 이해하긴 어려우실 겁니다.”

“응. 몰라.”

“하지만, 어마마마가 물어보면 어떻게 해? 난 거짓말 잘 못한대. 카라렐이 그랬어.”

시엔이 그 헌신적인 귀족 시녀를 떠올렸다.

왕자에게 할 소리는 아니니 둘이 상당히 친한 사이인 모양이다. 얻어맞고 다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발작 와중에 채인 거였나.

“그럴 땐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응? 시엔이 말하지 말라면서.”

“제가 좋은 명상법을 가르쳐 드렸다 하시지요. 마음을 다스리는 법 말입니다. 거짓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 그렇구나.”

남을 속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아이에게 가르쳐줄 만한 것은 아니다 싶기도 한데.

그렇다고 뭐 별 일 있겠어.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야겠군요.”

시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인의 정신세계를 이끄는 것은 보통 심력이 소모되는 일이 아니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 눈 밑이 거뭇하니 피곤한 상이었다.

인사와 함께 방을 나서려는데, 왕자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음, 저기. 시엔.”

“예. 왕자님.”

“그, 음. ······다시 와 줄 거야?”

“원하신다면야. 탄신연이 끝날 때까지는 왕성에 머무를 테니까요.”

“그래! 그럼 잘 가!”

왕자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 4. 어린 왕자와 나이는 많은 흑마법사 [2]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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