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어린 왕자와 나이는 많은 흑마법사 [1] >
왕의 심기가 상하자, 흐레이그 공작 본인이 나서 사죄를 올렸다. 페시번 흐레이그는 그 자리에서 가문의 기사들에게 질질 끌려나갔다.
그러나 한 번 상한 마음이 어찌 금방 나으랴. 국왕이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하다 자리를 떠 버리고 나자, 유야무야 연회 역시 끝나버리고 말았다.
흐레이그가 어떤 가문인가.
안그래도 북부 지방 거의 전체를 어우르는 대제후이자 왕실의 사돈이기까지 한 강력한 집안이다.
흐레이그 가의 장자가 그런 자리에서 개망신을 당했다. 온 왕국의 귀족이 보고들은 사건이 되었다.
그러니 흐레이그 가 측에선 어떻게든 떨어진 명예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에 쓰는 다분히 귀족적인 방법이 있었다.
”도련님, 그건 뭡니까? 혹시 연서입니까?“
”아니. 결투장.“
시엔이 베른닐을 향해 편지를 내밀었다. 다음 주 화요일 근위기사단 연병장에서 서로의 명예를 겨눠보자는 그런 내용이었다.
베른닐의 미간에 주름이 패였다.
”상대는 흐레이그가의 대공자가 아닙니까? 대기사로는 샹라 경이 나오시겠군요.“
”샹라 경이라.“
자신의 가문인 티란디스 가의 기사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판이다. 남의 기사 이름을 어찌 알까.
허나 의외로 머리 속엔 기억이 남아 있었다. 재림 전, 심약한 청년이 알 정도로 유명한 이였던 탓이다.
샹라 이엔.
얼음부리 산맥 너머의 야만족 출신으로, 자신의 부족을 이끌고 왕국에 쳐들어왔다.
그러나 야만족에게는 공성 개념이 없었다. 관문 하나조차 뚫지 못한 채 화살만 열심히 얻어맞고 줄행랑을 놓았다.
그 후 흐레이그 가의 병사들이 추격하여 섬멸하려 했으나, 시간을 끌기 위해 단신으로 남아 추격대에 맞섰다.
단신으로 십인대 열 다섯을 해치우고는, 감동받은 흐레이그 공작이 직접 등용했다고 하던가.
”혹시 베른닐이 이길 수 있을까?“
”솔직히 말씀드립니까?“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제가 세 명쯤 더 있으면 될 겁니다.“
”샹라 경이 4 베른닐이야? 흠. 잘 모르겠네. 베른닐이 약해서 그런가?“
그러자 베른닐이 발끈했다.
”제가 바로 창공 기사단의 다섯 손가락 중 하납니다. 새끼 손가락이기는 하지만, 앞으로 십 년 후에 두고 보십시오. 제가 어떤지.“
”앞으로 실력이 좋아질 예정이라고?“
”단장님하고 부단장님이 은퇴하시겠죠. 그럼 제가 3인자가 될 겁니다.“
그리고는 둘이 사이좋게 낄낄거리다가, 베른닐이 갑자기 정색을 하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대기사를 찾기는 쉽지 않겠습니다.”
“왜? 창공 기사단이 있잖아. 아무리 나라도 이 정도 일인데 안 도와줄까.”
“창공 기사단이니 그런 겁니다. 샹라 경은 천공 기사단의 부단장이니까요.”
“그게 무슨 뜻이야?”
“창공 기사단과 천공 기사단. 이름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흐레이그 가와는 대대로 앙숙이다 보니. 다른 기사에게는 져도, 천공 기사단에게 지면 안 됩니다.”
“자존심 싸움이라는 거야?”
“세간의 평가로는 두 기사단이 맞수라고 합니다만, 전력으로 평가했을 때는 그렇습니다만.”
“일 대 일은 아니라고?”
“샹라 경을 상대할 사람이 단장님 뿐이라는 거죠. 허나······”
“젠장, 무슨 소린지 알겠네.”
가문의 첫 번째 기사단이란 대단히 중요한 전력이다. 특히나 제후 가문이라면 더욱 더.
그런 첫 번째 기사단끼리의 결투는 누가 위인지 결정이 되는 자리가 되고 만다.
상대는 부단장인데, 이쪽에서 단장을 내보낼 수는 없는 노릇. 이겨야 당연하고, 지거나 비슷하게 비벼지기만 해도 손해인 싸움이니까.
문제는 단장을 빼면 상대할 이가 없다는 것.
시엔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 내가 직접 나갈 판이네.”
“도련님께서 직접 말입니까?”
“그게 제일 손해가 적으니까. 어차피 질 거라면 대기사 없이 본인이 나가서 지는게 제일 아니야?”
“허나, 샹라 경은, 그, 좀 그렇지 않습니까.”
야만족 출신의 기사. 지금도 반은 야만족이라나 어떤다나. 결투에서 상대방을 완전히 박살을 내는 것으로도 유명한 이였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하려고.”
시엔이 결투장을 난로 속으로 던져넣었다. 고급 종이가 순식간에 재로 변해 사라졌다.
“난 결투장을 받은 적이 없어. 그렇지?”
베른닐이 대답했다.
“결투장? 그게 뭡니까?”
시엔이 씩 웃었다.
결투장이고 뭐고 못 받았다고 우기면 저네가 뭐 어쩔까.
사실 야만족 출신의 기사고 뭐고 제대로 힘을 쓰면 못 이길 것도 없으리라.
물론 지금 전력으로는 왕국 최상위 기사를 정공법으로 이길 수는 없었다.
제대로 된 악령을 사역한 것도 아니고, 흑마법은 겨우 발아 단계를 조금 지났을 뿐이니. 지금이야 겨우 망령이나 좀 부리는 것이 전부.
허나 상대방이 자신의 능력을 모른다면 딱 한 번에 한해서는 필승이었다. 그냥 결정적인 순간, 페시번 녀석에게 그랬듯 발목을 쳐 넘어뜨리기만 하면 끝이었으니까.
허나 겨우 이런 일에 능력을 내보일 이유가 있나? 괜히 아깝게.
“그나저나, 뭔가 재미있는 거 없어?”
“······재미 말씀이십니까?”
“다음 정찬은 사흘 후잖아. 오찬이나 다과회 같은 건 가봐야 맛있는 것도 없는데. 가서 뭐 하겠어.”
“흠. 재미라고 하셔도.”
“아니면 왕성 밖으로 나가도 될까?”
“도련님. 사실 그게 말입니다. 단장님께서 도련님이 왕성 밖으로 나가시면 안 된다고 하셔서 말입니다.”
시엔이 머리를 들었다. 사뭇 오만한 자세.
“단장이야, 나야? 10년 지나면 단장도 은퇴할 거라며? 난 그때쯤 후작성에서 놀고먹고 잘 살고 있을 텐데.”
“그야 물론 도련님이죠.”
“그럼 나가야지.”
“그게 후작님의 엄명이라고 하셨습니다만.”
“이런 젠장.”
시엔이 인상을 구겼다.
심심하고 지루하긴 해도, 후작이 엄명까지 내렸다고 하면 무시하기도 뭐하다. 놀고먹고 앞으로 흑마법 연구하랴 쓸 돈도 많은데, 굳이 사소한 일로 눈밖에 날 이유도 없다.
“그럼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라도 좀 풀어봐.”
“아니, 또 이런 패턴입니까?”
“전처 이야기는 말고. 관련된 이야기도 안 돼.”
“으음······”
베른닐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 후로 한참동안 그 상태였다.
시엔이 슬슬 그냥 잠이나 잘까 생각이 들 때 즈음 베른닐이 손바닥을 탁 내리쳤다.
“아. 그 소문 아십니까?”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1왕자님 말입니다.”
“1왕자? 그러고 보니 어제 연회에서도 못 봤네. 1왕자가 왜? 어디 아프대?”
“그게 말입니다. 1왕자님이 광증에 걸리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광증이라고? 미쳤단 말야?”
시엔의 말에 베른닐이 급히 주변을 살폈다.
그래봐야 배정받은 왕성의 객실 안이었지만.
“왕성 안에서 그리 말씀하시면······”
“에이, 우리 둘밖에 없는데 무슨. 그리고 1왕자가 미쳤든 아프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재미있는 이야기 해 보랬더니만, 기껏 내어 놓는게 뒷담이야? 쯧쯧.”
시엔은 할 말이 있으면 면전에서 내밷는 사람이었다. 뒷담을 싫어하기도 했고, 본인도 절대 하지 않는 유형이었으니까.
“그게 아니라, 1왕자님이 광증에 걸렸다고 하는 것이, 왜 죽은 자를 본다고 합니다. 도련님 그런 이야기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굳이 말하자면 그런 이야기 안 좋아한다.
허나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영지에서도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 따위를 베른닐에게 채근해 수집하도록 했었으니까.
쓸만한 악령을 찾아보려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었는데?”
시엔이 베른닐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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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자 델피르 프린 페벨룬.
델피르는 올해 13살을 맞이한 어린 왕자였다. 일왕자라고는 해도 위로 형와 누나를 여럿 두었다.
그럼에도 일왕자인 것은, 왕가의 순번이 일반적인 가문과는 달리 계승권에 의해 붙기 때문이었다.
델피르는 국왕과 일왕비 사이에서 난 첫번째 아들이며, 제 1 계승권자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왕자란 또 이상한 호칭이기도 했다. 왜 일왕자인가? 왕세자가 아니라.
왕권의 안정화를 위해서는 왕세자를 최대한 빨리 책봉하는 것이 유리하다. 거기에 맞는 적자가 있음에도 아직 왕세자 책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이라.
베른닐이 왕국총사관 출신의 같은 기수, 즉 동기였던 왕실기사에게 들은 바로는 왕자가 죽은 자를 본다며 발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시엔이 베른닐 주제에 의외로 정보통이 있다 칭찬해 주었더니, 사실 웬만한 귀족들은 이미 알고 있다며 실토를 했기에 바로 취소했다.
시엔이 결론을 내렸다.
왕실이라면 강력한 망령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그것도 평범한 왕자에게 어떤 영향을 행사할 정도면 이미 물질 간섭이 가능하다는 걸지도 모르지.
자연발생한 악령, 혹은 그에 준하는 강대한 망령의 짓일 터.
부리는 망령의 힘이 곧 흑마법사의 힘이다. 그렇다면 놓칠 수 없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시엔은 바로 편지를 써서 붙였다.
친애하는 델피르 왕자 전하, 뵌 적은 없지만 어쨌거나 친애합니다. 요즘 고민이 있으시다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제가 거기에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솔깃하시다면 제게 방문을 허하여 주시지요.
대충 이런 내용의 편지였다.
델피르 왕자는 꽤나 절박한 모양이었는지, 왕실 시녀를 통해 편지를 전달하자마자, 겨우 한 시간만에 답장이 돌아왔다.
시엔 티란디스. 할 일이 없으면 당장 와 줬으면 좋겠다. 할 일이 있어도 당장 오라. 지금! 당장! 바로!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의 답장이었다.
그런 이유로 시엔이 곧바로 일왕자의 거처, 일출궁으로 향했다. 궁전의 입구, 미리 기다리고 있던 왕실 시녀가 시엔을 맞이했다.
“시엔 티란디스 님이시군요. 이쪽입니다.”
“어. 레이디께선?”
“카라렐 슈드릴입니다.”
“슈드릴 영애셨군요, 저기, 실례지만 그 눈은 어쩌다 그렇게······”
왕실 시녀복의 카라엔 끈 장식을 두르도록 되어 있었다. 신분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그녀의 푸른 끈은 귀족 영애라는 뜻이었다.
시녀라고 해서 다 같은 급이 아니다.
귀족 시녀들은 같은 귀족으로써 왕가의 혈족이나 공녀 같은 지체있는 가문의 말벗들이었으니까.
지방 귀족 가문, 그러니까 자작이나 준남작 같은 하위 귀족가의 경우. 오히려 왕실이나 공작가로 시녀로 보낸 딸들의 권력이 본가보다 더 강력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사실 인기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경쟁이 쎈 자리라 아무나 들어갈 수도 없다. 아주 총명하고 명석한 인재만 모이는 정예들이었으니.
그러나 카라렐의 눈가에 찍힌 멍자국이 그 사실을 무색하게 했다. 아무리 왕자라고 해도 귀족 시녀를 이리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광증이라더니. 정말로 미친 모양이었다. 아니면 아주 성질 더러운 개새끼던가,
“아······. 제가 넘어지는 바람에 이리 되었습니다. 소녀의 부덕이지요.”
“넘어져서 말이군요.”
시엔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상당히 궁색한 변명이었다.
길쭉하게 사각으로 찍힌 멍자국. 넘어져서 생긴 멍이라고? 어떻게 넘어졌는지 신기할 정도 아닌가? 사이즈를 보니 음.
문진은 보통 종이를 누르는 데에 쓰는 묵직한 물건이다. 모양은 다양하지만, 대개는 길쭉하고 각이 잡히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참 묵직한 물건이다. 날아오는 문진에 얻어맞기라도 하면 딱 저런 멍자국이 남겠다 싶다.
그렇게 시녀의 뒤를 따라 일출궁의 회랑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였다.
으아악! 저리 가! 으아아악!
벽을 건넌 뭉특하지만 처절한 비명이 아스라이 울려퍼졌다.
“아! 왕자님! 이런, 실례지만 서두르겠습니다!”
대번에 안색이 창백해진 카라렐이 드레스 자락을 붙들고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드러난 발목 아래로 굽이 없는 평평한 신발이 보였다. 귀족 영애답지 않은 패션이었다. 달려나갈 일이 많았던 모양.
시엔이 그 뒤를 따랐다.
일출궁의 심처. 화려하게 장식된 문이 보였다. 곤란한 표정으로 방 앞을 지키던 위병들이 카라렐을 보곤 반색하며 문을 열었다.
그러자 비명이 여과 없는 민낯을 드러내고 만다.
“으아악! 저리 가! 저리 가라고! 가란 말야!”
그리고, 퍽!
열린 문 사이로 날아온 무언가에 얼굴을 강타당한 카라렐이 호되게 뒤로 넘어졌다.
아니, 넘어지나 싶었는데 휘릭 돌아 낙법을 치더니, 이내 왕자님을 외치며 방 안으로 돌진하는 것이 아닌가.
< 4. 어린 왕자와 나이는 많은 흑마법사 [1]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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