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전 연인과 전 연인의 현 연인 [3] >
시엔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남녀가 눈이 맞는 것이야 되려면 되고 안 되려면 어찌되도 안 되는 것이었다.
괘씸죄가 있긴 하지만, 질척한 사랑놀음 따위에 끼어드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하물며 자신이 하지 않았던 사랑임에야.
게다가 뭐. 저들이 누군가 연심으로 목숨을 끊으리라 예상을 했겠는가. 그저 둘이 눈이 맞았던지 배가 맞았던지 저들끼리 좋다 했을 뿐이겠지.
시엔이 말을 골랐다.
이 쪽을 바라보는 페시번의 눈빛이 곱지 않다. 왜 그럴까. 그야 껄그럽겠지. 어쨌거나 이런 상황에서 마주치기엔.
시엔이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 어른스럽게 해결하자. 이 몸뚱이의 이전 주인과 얽힌 앙금도 좀 털어버리고.
“뭐야. 인제 와서 사과라도 하려고? 괜찮아. 이젠 아무 감정도 없으니까. 나는 신경쓰지 말고, 둘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흐읍. 여기저기서 숨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눈을 빛내며 구경하던 여귀족들에게서다.
‘어쩜, 들었어요?’
‘둘이 행복했으면 한다니. 세상에, 못 잊어 죽으려 했던 사람이.’
‘자신의 곁이 아니라도 행복하면 됐다는 건가요. 어쩜 세상에 저런 남자가 있을까요.’
본의 아니게 애절한 사랑꾼이 되고 말았다. 여귀족들 한정으로 시엔의 평가가 수직 상승하는 시점이었다.
물론 시엔은 몰랐다. 그저 이 정도면 서로 원만하게 지나가자는 제스쳐는 됐겠다 싶을 뿐.
나름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셈이었다.
그러니 페시번이 못이긴 척 손을 잡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끝. 더 이상의 감정 소모도 없을 터였다.
“뭐, 뭐야? 누가 네 녀석에게 사과 따위를 한다는 거냐! 웃기지 마라!”
시엔이 갸웃거리며 다시 이 몸뚱이의 삶을 더듬었다. 혹시나 재림 이전 몸뚱이가 요 청년에게 해코지라도 한 적이 있나 싶어서.
한 번도 없었다.
그럼 왜? 시엔이 페시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페시번이 버럭 소리질렀다.
“나는 사과를 요구하러 온 거다! 당장 내 피앙세에게 가서 사죄드리고 용서를 빌어라!”
“뭐? 왜?”
“뭐, 뭐라고! 왜냐니! 몰라서 묻나!”
“왜? 진짜 몰라서 그러는데.”
진짜 모르겠다. 진심이었다.
“네 같잖은 자살 쇼 때문에 레이디 텔리야의 명예가 상하지 않았나!”
“뭐?”
“덕분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아야 했는지 아는가! 전부 네 탓이다!”
“아니, 이건 무슨······.”
어이가 너무 없으면 말문이 막힌다더니.
게다가 자살 쇼란다.
그러나 사람이야 본디 모질고 매섭더라도 살기를 원하지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 한 청년이 독을 마시고야 만 사건이다. 한심할지언정 이리 폄하당할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명예라니.
그럼 남의 약혼자를 빼먹으면서 그 정도도 각오하지 않았단 말인가.
시엔이 대답했다.
“알았어. 그렇게 하지.”
“큭큭, 이제야 좀 시엔답군. 그래야지. 그럼.”
“아. 그런데 너 오늘 다리가 좀 불편해 보여.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해.”
“뭐? 여전히 이상한 놈 같으니.”
페시번은 인상을 찌푸리며 총총 멀어져갔다.
시엔이 조용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세-슈르 키이하 시엔. 시엔의 조용히 주문을 읊조리고, 반지에서 망령 하나가 슬그머니 흘러나와 바닥에 스며들었다.
베른닐이 다가와 걱정스러운 낮을 했다. 답지 않게 자상한 목소리로 물어온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뭐?”
“표정이 안 좋으신 것 같습니다만. 힘내십시오, 도련님.”
“아니, 잠깐. 내 표정 지금 완전 멀쩡하거든? 그냥 좀 집중할 일이 있어서 그래.”
“네, 네. 그렇겠지요. 하지만 도련님, 생각해 보십시오. 결혼은 남자의 무덤 같은 겁니다. 제가 전처 이야기를 해드리지 않았습니까. 사랑 같은 건 한순간이고, 결혼은 끝날 때까지 괴로운 겁니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을 하십시오.”
나름 위로를 하는 모양이었다. 시엔이 피식 웃었다. 재림 전에, 그러니까 이 몸뚱이의 주인이 안 죽고 이 자리에 있었다면, 베른닐의 위로를 듣고 한 번 더 독을 원샷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지금 그딴 말을 위로라고. 물론, 공감이 안 되는건 아니지만.
“아, 좀 닥쳐봐. 쫌.”
“예, 예. 알겠습니다. 맛있는 음식이라도 좀 드시는 건 어떻습니까? 전 맛있는 걸 먹으면 속이 좀 풀리더군요.”
“아, 진짜.”
베른닐이 그러면서도 짠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시엔이 음식 테이블로 이동했다.
가장 큰 그릇을 집어들고 수프를 듬뿍 펐다.빨간 향신료로 짙은 색을 낸 걸쭉한 칠면조 수프.
시엔이 의아하게 바라보는 베른닐에게 그릇을 안겨주었다.
“너무 뜨거워. 최대한 빨리 식혀 봐.”
“예? 무슨 수프만 이리 드십니까?”
“내가 먹을 거 아니니까 빨리 식혀.”
“그럼 제가 먹습니까? 남이 먹는 걸 보고 속을 푸는 파이셨습니까?”
“그런 파 몰라. 네가 먹을 것도 아니고. 빨리 식히기나 해.”
베른닐은 이해할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시키는 대로 열심히 수프를 식히기 시작했다.
베른닐이 맹렬하게 수프를 저으며 후후 불어댔다. 그 꼴을 보니 확실히 재미있기는 했다.
시엔이 망령에 다시 집중했다.
망령을 부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명령만 해 놓으면 제가 알아서 움직이니까.
그러나 망령을 완전히 장악하고 움직이는 것은 꽤 높은 집중을 필요로 했다. 망령의 증오뿐인 자아를 완전히 억누르고, 손발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도구로 쓰는 방법이다.
아주 은밀한,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는 기습을 할 때는 망령을 이렇게 운용해야 했다.
망령이 연회장 바닥 속을 조용히 헤엄쳤다. 현상 세계와 부정 세계에 반쯤 걸친 망령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시엔이 페시번을 주시했다. 페시번이 원형 테이블 앞으로 다가간다. 잔을 삼각형으로 높이 쌓아올린 멋진 장식 주변으로 안주들이 세팅된 테이블이다.
오. 저기가 그림 좀 나오겠는데.
시엔이 망령을 조종했다. 보이지 않는 팔이 물리력만 가진 채 바닥에서 솟구쳤다.
사람이 걷는 원리를 아는가? 사람의 걸어갈 때는 무게 중심이 항상 한 쪽 발에 쏠리기 마련이었다. 왼발 오른발 번갈아 가면서.
만약 무게 중심을 가지고 땅을 디딘 발 아래를 강력한 힘으로 밀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페시번이 거의 내동댕이쳐지듯이 거하게 넘어졌다.
테이블을 손으로 짚어 보지만, 이미 발바닥이 위를 향해 치솟은 상태였다. 오히려 테이블도 같이 균형을 잃었다.
15층은 될 법한 와인잔의 탑이 쓰러진 페시번 위로 무너져내렸다.
“끄악!”
와장창창 쨍그랑. 난폭한 소리가 연회장을 강타했다. 쓰러지고 무너지고 유리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기 그지없다.
바로 지금이다!
“베른닐, 수프!”
“네?”
“내 놓으라고.”
“여기 있습니다만.”
수프를 받아든 시엔이 벌떡 일어나 달려나갔다. 이게 무슨 일인가 아직 얼어있는 사람들 사이로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아직 바닥을 구르는 페시번의 앞에서, 시엔이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괜찮아? 이게 무슨 꼴이야? 쯧쯧.”
“으윽.”
“괜찮아? 오늘 걸음걸이가 영 피곤해 보인다 싶었는데. 발 조심하라고 했었는데.”
“으으······”
시엔이 손을 내밀었다.
페시번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너, 너! 네가! 네가 그랬지!”
페시번은 제 디딤발을 밀어올리는 거센 힘을 분명히 느꼈다. 어떤 수법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그랬는지는 분명했다. 애초에 그 범인이 대놓고 내가 했다 비웃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페시번이 격분해 달려들어 시엔에게 달려들었다. 허나 상대가 나빴다.
“어어!”
“저런······!”
시엔은 과거 단신으로 제국과 맞선 재앙이었다. 그 과정에서 사선을 넘으며 만들어진 전투 기술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으니.
시엔이 깜짝 놀라는 척을 하며 몸을 움츠렸다. 페시번이 달려들어 주먹을 휘두르는 순간, 시엔이 자연스럽게 수프를 든 손을 들어올렸다.
촤악. 페시번의 주먹이 그릇을 강타했다. 그 서슬에 그릇이 튀어오르고, 그 많던 수프가 페시번을 덥쳤다. 시엔에게는 거의 튀지 않았지만, 그걸 이상히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베른닐! 뭐해!”
시엔이 베른닐의 이름을 외쳤다.
베른닐이 잽싸게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베른닐이 다시 달려드는 페시번의 양 팔을 잽싸게 낚아챘다. 그리고 나서 바라보니 상대가 온통 수프 투성이다.
‘이크. 예복에 묻을라.’
귀한 기사단의 예복을 망치기 싫은 베른닐이 엉거주춤 엉덩이를 빼고 거리를 벌린 채 페시번의 접근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춤이라도 추듯 빙글빙글 도는 꼴이 되고 말았다.
“개자식 같으니! 놔! 이거 놓으라고!”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너, 감히, 내가 누군줄 알고!”
“기사의 도리를 지킬 뿐입니다.”
킥,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가, 구경꾼들의 시선을 받고 민망한 듯 입을 가렸다. 그러면서도 눈빛이 딱 이렇다. 너네도 솔찍히 좀 웃기지 않냐?
사실 웃기긴 했다.
하필 새빨간 데에다 건더기는 또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그걸 걸쭉하게 온 몸에 처바르고 기사와 손잡고 빙빙 도는 꼴이었으니까.
그리고 딱 그 때였다.
“왕가의 행차가 있겠습니다! 페벨룬의 주인, 영명하신 레이알드 셉텐 페벨룬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연회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연회의 주인공이 입장을 알리는 궁중 서기장의 외침이었다.
귀족들이 전부 무릎을 꿇었다. 시엔도 눈치껏 거기에 따르고, 날뛰던 페시번 역시 왕의 위광 앞에서는 분노조절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제 꼴을 떠올리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물론 수프에 뒤덥혀 얼굴이 창백한지 어쩐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지만.
“제 1왕비, 알린 위피 페벨룬 타스테스테 마마께서 입장하십니다! 제 2왕비, 아타냐 위피 페벨룬 흐레이그 마마께서 입장하십니다! 제 3왕비, 유림 위피 페벨룬······”
서기장의 외침이 계속 이어졌다. 저러다 목청이 터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열정이었다.
실제로 다섯 왕자가 입장하고 네 번째 공주를 부르짖을 때 쯤엔 이미 목소리가 갈라지고 쉰 기색이 역력했다.
“고개를 드시게나. 이 늙은이를 축하해주기 위해 여기까지 모인 수고에 감사하네. 아무쪼록 즐거운 시간 보내도록 하시게.”
왕은 나이가 많았다. 백내장이 낀 허연 눈동자가 좌중을 훑었다. 과연 제대로 보이기나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지만, 그러다 한 곳에서 시선이 멈추는 것을 보니 시력은 양호한 모양이었다.
하기사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가운데, 유달리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안 보일 리가 없다.
“좋은 자리에 뭔가 소란이 있었나 보오. 길일을 맞이하였으니 모두 좋게 해결하였으면 하네만. 무슨 일인가?”
그러자 페시번이 대뜸 외쳤다. 삿대질하는 손가락이 시엔을 향했다.
“저 자가 저를 밀치고 또 모욕하였고, 또, 또, 저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전하!”
“허어. 누구인가 했더니 흐레이그 자제였군. 그리고 그쪽은, 누구인가?”
“소신 시엔 티란디스입니다, 전하.”
“티란디스 자제인가? 허어. 왕국의 젊은이들간에 다툼이 있었던 모양이지. 젊은 혈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네만,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지 않겠나?”
“송구합니다, 전하.”
시엔이 고개를 숙였다.
“내 사정은 아직 모르나, 이리 모인 자리에 소란이란 좋지 않음을 안다. 티란디스의 아이야. 저 아이가 네게 모욕당했다 서러워하니 네가 사과하고 이 상황을 끝내지 않겠느냐?”
국왕이 인자한 미소로 말했다.
그러자 시엔이 대답했다.
“전하, 송구하오나 그리할 수가 없습니다.”
순간 연회장에 정적이 찾아왔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의 고요. 연회장의 모든 눈동자들이 국왕의 눈치를 살폈다.
국왕의 눈썹이 꿈틀했다.
“할 수가 없다? 내 부탁임에도 말이냐.”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전하.”
“어째서 그리하느냐.”
“어떤 부분에서 사과를 해야 할 지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전하.”
시엔의 태도는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모르겠다? 허어.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국왕이 연회장의 상석, 그러니까 왕좌를 지키고 있던 왕실 기사를 바라보았다. 모든 소동을 지켜본 이였다. 그러자 그가 국왕에게 무릎을 꿇고 귀속말을 전했다.
기사가 중립적인 입장에서 지켜본 사실은 이러했다. 페시번이 저 혼자 넘어지고는, 걱정해주러 온 시엔에게 달려들었다. 시엔이 마침 수프를 들고 있었고, 그 와중에 제가 접시를 때려 수프를 뒤집어썼다.
사실과 진실은 엄연히 다른 법이었다.
“허어. 내가 실수를 했구나. 사과를 해야 할 이는 네가 아니로구나. 그렇다면 흐레이그 자제가. 커흠. 아니, 아니다.”
왕이 말을 하다 말고 헛기침을 했다. 왕의 눈길이 슬그머니 둘째 왕비를 향했다.
아타냐 위피 페벨룬 흐레이그. 아무래도 왕비 앞에서, 엉망이다 못해 처참한 꼴을 한 조카에게 사과를 강요하는 건 못할 짓이다 싶었던 모양.
“좋은 날이니 이쯤 덮어두자꾸나.”
“예. 전하.”
시엔은 이미 목표를 초과 달성했기에 냉큼 그러하겠다 공손히 대답했다. 애초에 개망신이나 주고 말 생각이었으니까.
“허나 전하! 저 자가 저를, 흐레이그 가를 모욕했습니다! 저를 해하였으며, 이로 가문의 명예가 땅에 떨어졌는데 이 어찌 그냥 지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쯧쯧. 내 모든 정황을 전해들었거늘······.”
국왕의 인상이 찌그러졌다.
< 3. 전 연인과 전 연인의 현 연인 [3]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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