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9화 (9/268)

< 3. 전 연인과 전 연인의 현 연인 [2] >

“왕자님은 귀족 중의 귀족이시지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글세. 내가 제일 잘났다는 뜻인가?”

“왕자님께서 잘나긴 하셨지요. 물론 저보다는 아닙니다만. 두 번째로 잘났다고 합시다.”

노소가 킬킬 칠칠맞은 웃음을 흘렸다. 시엔이 웃으며 생각했다.

아. 이거 꿈이구만.

재림 이전, 제국은 아직 불타지 않았다. 강대한 흑마법사가 탄생하기 전, 시엔이 왕자로서 살던 그리운 그 때의 꿈.

‘맞아. 하란돌 영감이란 사람도 있었지. 오랜만이야. 왜 잊고 있었을까.’

꿈이란 신기하기 그지없는 놈이라, 이미 잊어버렸다 생각한 저편의 기억을 끄집어내곤 했다.

“왕자님. 인간은 모두 의무를 다할 때 비로소 인간으로 남습니다. 저 백성들의 의무는 바로 제 주인된 자를 존경하고 사랑하여 섬기는 것이지요.”

“윽. 내가 예뻐서 사랑받는 건 아니었나보다. 난 지금까지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이라도 아셨으니 다행이군요. 백성들이 의무를 다하매, 왕자님께서도 귀족의 소임을 성실히 하셔야 합니다.”

“내 소임?”

하란돌 영감은 왕사, 그러니까 왕의 스승으로 대륙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현자였다.

시엔이 겪은 하란돌 영감은 소문과는 달리 매사 장난기 넘치는 호색한일 뿐이었지만.

“백성들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지요. 이는 귀족이 귀족답게 사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시엔의 기억 속에서 하란돌 영감의 웃음기 없는 진지한 표정은 딱 한 번 뿐이었다.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그렇기에 현자의 말은 어린 왕자의 심지 속 깊은 곳에 굳건히 자리잡은 가르침이 되었다.

현자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다.

시간이 갑자기 흘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또 다시 시간이 되돌아왔다. 이것이 꿈.

나 이상한 게 아닐까. 왕자님 그건 축복입니다. 어둠을 타고 나신 것이지요. 인간이 다룰 힘이 아닙니다. 배워 익혀 다루셔야 합니다.

신비주의자의 사원에 잘 오셨습니다, 왕자님. 명상하십시오. 왕자님 명상 좀. 왕자님 제발 가만히 좀 계시죠. 아, 진짜 왕자님! 아 진짜 쪼그만 게 말 진짜 안 듣네.

꿈이 꿈처럼 흐르고 있었다.

왕국이 불타고, 죽어서도 죽지 못한 왕국의 백성들이 망령이 되어 몰려들었다.

그렇기에 왕자는 흑마법사가 되었다.

그게 바로 그의 의무였다.

그의 백성들을 위한 살아남은 왕족의 의무.

제국은 사라졌고, 복수는 완성되었다.

과거는 더 이상 짐이 아니었다.

시엔이 느긋하게 과거를 들여다보았다.

슬슬 깰 때가 되었다.

천년 전 과거의 일은 이미 끝났고, 현 시대의 시엔 티란디스가 남았을 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엔 티란디스는 귀족이었다.

계승이니 영주의 좌 따위를 떠나, 태생부터 고귀한 자가 인간으로 있기 위해 필요한 의무가 있었다.

시엔이 노인을 위해 앞으로 나섰듯이.

그러나 이번엔 훨씬 어깨가 가벼웠다.

왕자는 온 백성을 위해야 하지만, 후작가의 핏줄이라면 딱 그 영민들만 위하면 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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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엔은 마차 안에서 잠들다 깨고 지루해 또 잠들고 깨는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나마 행렬의 구성원들은 시엔보다는 조금 덜 지루했다. 적어도 한동안 떠들 거리가 있었으니까.

시엔에 대해서였다.

사람이 바뀌었다 소문을 들었지만, 그렇다 하더라 들은 이야기와 직접 본 감상을 다를 수밖에 없었으니까.

소문이야 죽다 살더니 사람이 포악해져서 하인들에게 욕은 기본이요 매달아 매질까지 한다더니만.

물론 시엔이 대청소 사건 이후로 하인들에게 딱히 큰 해코지를 한 적은 없었다. 다들 기가 죽어 알아서 숙였을 뿐이지.

소문이란 원래 뼈가 서고 살이 붙어 제 멋대로 자라나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더니 이제 보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지.

기사들이며 종자들, 호위병들은 물론이요. 잡일꾼들마저도 한동안 시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 신분에 따라 조금씩 반응도 달랐다.

창공 기사단의 기사들은 그래도 티란디스의 피가 흐르는 모양이라며, 후작 앞에서 당당하게 기를 펴던 모습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

종자들이야 뭐 기사님들이 말씀하시면 니에니에 대답이나 넙죽넙죽 할 줄 아는 치들이고.

그에 반해 호위병들과 잡일꾼들의 반응이 아주 열렬했다.

“시엔 공자님이 그러실 줄은 몰랐네.”

“그러게. 지금까지 사람 잘 못 봤나봐. 소문 믿을거 하나 없다더니.”

“자네가 언제 잘 본 적 있긴 했나? 눈이 장식인 줄 알았건만.”

“뭐이 이 사람아?”

“영주님도 시엔 공자님처럼 생각해주시면 좋겠는데. 가끔 고향집을 생각하면 가슴이 꽉 막힌단 말여.”

“암만. 그 3번대의 까무잽이 있자너. 그이네 마을이 화를 입었다고 하더라고.”

“요즘 술만 퍼마시더만. 쯧쯧.”

작은 촌락들은 대개 방어 능력이 거의 없었다. 외진 곳에 인구도 적은 촌락들이야 재수가 없으면 하루아침에도 도적의 습격을 받아 불타 없어지곤 했다.

이는 영주성에 자원한 병사들이며 일꾼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영주성에서 주는 봉급이야 풍족하니 고향에 부치고도 제법 여유롭게 살지만, 정작 그 고향이 언제 어떤 화를 당할지 몰랐으니까.

시엔이 나서서 했던 말들이 구구절절 맞는 말이요, 결국 그네들이 보기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해결이 된 것처럼 보였다.

“하긴, 시엔 공자님이 예전부터 하인들에게 그렇게 온화하신 분이었다지.”

“저번에 그것도 참다참다 못해서 화를 내신 거라더라.”

소문이란 중도가 없다.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 보통 나쁜 소문이 보다 더 강한 법이지만, 한번 뒤바뀌면 또 완전히 뒤집어지곤 했다.

어느 현자의 표현으로는 물타기라고도 했다.

딱히 시엔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본의 아니게 평가가 좋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왕성의 용무가 끝나고 이들이 영지로 돌아가게 되면, 보다 많은 이들에게 이런 소문이 퍼지리라.

그러나 이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천년 전 왕자의 스승이 가르쳤던 의무의 순환이었다.

물론 시엔은 그저 지루할 뿐이었지만.

그저 빨리 왕궁에 도착하고 싶었다.

그러면 이 지루함도 끝이 나지 않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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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탄신 기념 연회는 일주일동안 이루어지는 긴 행사였다.

물론 그 내내 연회가 이어지는 것은 아니고, 하루는 오찬, 하루는 중식의 티타임, 또 하루는 만찬에서 정야제에 이르는 정식 연회가 열리기도 하는 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의 일정은 상당히 빡빡한 편이었다. 연회가 아닌, 친분 있는 귀족들끼리 살롱을 빌려 모임을 갖곤 했으니까.

물론 재림 전, 실연 자살한 나약했던 청년이 어떤 인맥을 두었겠는가.

결국 왕성에서도 초대장 한 장을 받지 못한 채로 쓸쓸히 시간을 때우는 처지였다.

그렇게 왕성 도착 첫 날을 홀로 보낸 시엔이 오매불망 연회를 기다렸다. 더군다나 연회 첫 날은 저녁부터 심야까지 이어지는 화려한 정찬식이었다.

시엔은 왕자였던 시절부터 연회를 참 좋아했다. 자연스레 흐르는 음악도 좋고, 온갖 음식이 늘어선 그 풍경 자체도 좋았다.

그 분위기. 어떤 사람들은 춤을 추고, 어떤 이들은 웃으며 담소를 나눴다. 그 장소 자체가 특별하다. 수많은 조명으로 따뜻하고 화려한 연회만의 그 분위기. 시엔은 그 모든 것들이 다 좋았다.

시엔은 그래서 더욱 연회를 기대했다.

그러나 마침내 연회장에 도착한 이후엔 자신이 멍청했음을 깨달았다.

시엔은 사랑받는 왕자였다. 왕과 왕비, 높고 낮은 작위의 귀족들에서부터 성의 사용인들과 왕국에 모든 백성에 이르기까지.

그렇기에 시엔의 연회는 항상 즐거웠었다.

그러나 지금. 시엔은 크게 실망했다.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연회장의 풍경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낮보다 더 밝은 조명 아래 정장과 드레스를 차려입은 귀족들이 홀을 누볐다.

잔을 나르는 시종들은 눈이 사방에 달린 듯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잔을 건네고, 꺄르르 웃는 소리, 저마다의 담소들이 웅성웅성 낮게 음악처럼 깔렸다.

그러나 시엔은 낮설음을 느꼈다.

이 안에 시엔이 알던 연회는 없었다.

연회장의 귀족들은 시엔에게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무심한 시선. 혹은 경멸이나 연민 따위의 눈빛이 날아온다.

전자는 대개 남자들이, 후자는 보통 여자들이 보내는 눈빛이었다.

사실 귀족 여성들에게 시엔의 평가는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았다.

실연 자살이란 사내가 보기에나 한심한 꼴이지, 여성 귀족들이 보기엔 사랑에 목숨까지 건 순정남으로 여겨졌던 까닭에.

“······기대하던건 이런 게 아닌데.”

“예?”

“아냐. 먹자. 먹어야지. 오. 이건 뭐지?”

“음. 뭔가 오리를 구운, 아니 칠면조일지도 모릅니다. 흠.”

“모르면 말을 말아. 일단 맛있어 보이니 먹자.”

결국 할 일이라곤 호위인 베른닐과 함께 음식이나 축내는 정도였다. 다행히 주인과 그 기사가 나란히 먹는 것을 좋아하니 금새 죽이 맞았다.

“이번 광산의 소출이 말입니다. 철맥이 새로 나왔는데 질이 아주 좋습니다. 이번에 판로를 좀 새로 뚫어볼까 합니다만.”

“그럼 이번엔 저희 쪽으로 좀 돌리시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남작님은 저희 쪽 가족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럴까요?”

“각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이러지 마시고 지금 인사라도 드려보심이.”

“허나 아시다시피 저희가 케드휄 후작령에 가깝지 않습니까. 사실 광산이란 게 아무리 방비가 되어도 불안하다보니, 그렇다고 함부로 병력을 늘릴 수도 없고, 어디 좋은 용병단이라도 하나 아시는지······”

귀족들의 보이지 않는 파벌 싸움, 미묘하지만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판이었다.

“아, 잠시만 비켜 주세요.”

“실례하겠습니다.”

시엔과 베른닐이 그 사이를 신나게 누비며 음식을 쓸어담았다.

한창 신경전을 벌이던 이들이 불쾌한 표정으로 자리를 비키거나, 인상을 찌푸리거나 하는 일의 연속.

그러던 도중이었다.

“베른닐, 이건 또 뭘까? 처음 보는 건데.”

“도련님이 모르시면 제가 알겠습니까?”

“지금 한 번 먹어 봐. 맛있나 없나.”

“아니, 이게 누구야? 잘도 얼굴을 내밀었겠다.”

“지금 말입니까?”

“그냥 슬쩍 한 입 먹어보면 되잖아.”

“아니, 아무리 그러셔도 교양 없이 서서 음식을 먹을 수는 없잖습니까.”

”야, 내가 먹어 보라면 먹어 보는 거지, 요즘 퍽 대꾸가 늘었다? 내가 누구야?“

“크흠, 그러시기입니까?”

“시엔 티란디스.”

“맛이 없으면 어떡해. 내가 맛없는 걸 먹게 되는 거 아냐. 그러니까 베른닐이 먼저 먹어봐야지.”

“음. 그, 도련님?”

“왜?”

“도련님을 찾는 분이 계시는 것 같습니다만.”

“응? 누가 날 찾아? 나 찾을 사람 없는데?”

“시엔 티란디스!”

노성이 터졌다. 그 서슬에 연회장의 이목이 쏠렸다. 시엔이 그제야 제 실수를 알아차렸다.

이 몸뚱이 이름이 시엔이었지. 맞아.

재림 후의 새 이름이 아직 무의식 속에 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러니 누가 불러도 알아채지 못할 수밖에.

게다가 베른닐과 나름 즐겁게 떠들고 있던 참이었으니까.

시엔이 머리를 굴렸다.

몸뚱이에 남겨진 기억은 타인의 것이었다. 이젠 그저 지식으로 남겨진 기억. 그걸 더듬어봐도, 눈앞에 자신을 살벌하게 노려보는 청년이 누구인지는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어. 그러니까. 그쪽이······?”

“지금 뭐하자는 거지? 지금 흐레이그 가를 무시하는 건가!”

“아아.”

흐레이그 가는 곧장 떠올릴 수 있었다.

흐레이그 공작가. 왕국 북부의 최대 제후 가문이었다. 서부의 최대 제후인 티란디스와는 대대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부와 북부는 예로부터 중간 다델 곡창지대와 옐루리 산맥의 광산 채굴권 등으로 다툼이 잦았던 탓이었다.

그러나 시엔이 흐레이그라는 이름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약혼녀를 빼앗아간 가문이 바로 그네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니 마침내 기억을 찾을 수 있었다.

페시번 흐레이그.

오며가며 몇 번 마주친 것이 전부인 녀석이니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

이 녀석은 파혼한 전 약혼녀의 현재 약혼자였다. 그러니까 전 연인의 현 연인.

재림 전의 한 청년이 독을 삼키게 만들었던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

< 3. 전 연인과 전 연인의 현 연인 [2]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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