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전 연인과 전 연인의 현 연인 [1] >
왕가는 귀족들의 작은 영지 다툼에 관여하지 않았고, 덕분에 귀족들은 연합과 반목이 매번 뒤바뀌는 치열한 파벌 다툼을 진행했다.
국왕의 탄신 연회는 왕국의 가장 큰 축제 중 하나라고. 그래서 온 왕국의 귀족들이 모였다.
그래서 중요한 자리였다.
특히나 후작위의 계승권을 노리는 후계권자에겐 더욱이나 특별한 기회일 터. 형제 몇 명을 제외한 모두가 왕성으로 향하는 이유였다.
그리고 티란디스 가의 행렬 중 여섯 번째 마차 안이었다.
“흐암. 무슨 일이라도 안 일어나려나······.”
시엔이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폈다.
후작성을 나선 지 이제 겨우 하루 반이 지났을 뿐이었다. 앞으로 닷새나 더 가야 왕성에 도착하리라. 시엔에게는 끊임없이 지루한 시간이었다.
“무슨 일 말씀이십니까?”
“그래. 무슨 일. 뭔가 재미있는 일 말야.”
“심심하시다는 건 잘 알겠습니다.”
베른닐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엔의 마차에는 단 둘. 사실 베른닐 말곤 친한 가솔이 한 명이 없으니 말동무라곤 이 헐렁한 기사뿐이었다.
“산적이라도 안 나타나려나?”
“어떤 산적이 후작가의 깃발을 보고 덤빕니까? 그 이전에, 이 정도 규모의 행렬을 습격하려면 소도시의 정규군이라도 힘들 겁니다.”
후작과 그 혈족이 행차하는 행렬이니만큼 가문의 최고 기사단인 창공 기사단과 정예병들이 호위를 맡고 있었다.
“뭐. 그렇겠지. 아니면 마물이라도 좀 나타나면 좋겠는데.”
“마물도 원래 비열한 족속이라 숫자가 많으면 물러가기 바쁩니다.”
“나도 알아. 젠장. 심심해 죽겠네. 이대로 죽으면 사인을 뭐라고 정할까? 무료사? 묘비엔 시엔 티란디스, 심심해 죽다. 이렇게 적을까?”
시엔이 낄낄거렸다.
베른닐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신관들은 언제나 말에는 힘이 깃들어 있다 하십니다. 만에 하나 진짜 습격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헤에. 신관들이 뭘 좀 알긴 하네. 말에는 힘이 깃드는 법이지. 그럼. 다들 잘 모르고 있지만 말야.”
“그러면 왜 그런 말씀을······”
“습격이 있으면 좋은 일이니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시엔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도적이든 마물이든 영지 내에 있으면 어찌되는 피해를 보는 건 영민들이니까. 이만한 정병이 소집되어 있을 때 토벌할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일도 없잖아?”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내 심심함도 좀 때울 수 있고.”
“후자가 더 중요하신 거 아닙니까?”
“가만히 보면 베른닐도 상당히 머리가 비상하단 말이지. 영리해. 머리가 좋아. 그런 의미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좀 해봐.”
“재미있는 이야기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말씀하셔도······”
“다른 기사들처럼 호위 대열에 낄래?”
“윽.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창공 기사단은 호위도 하고, 겸사로 기사단의 위세 자랑도 겸하고 있는 참이었다. 다른 귀족에게 티란디스의 정예 기사단이 이 정도다 보여줄 심산.
그러니만큼 창공 기사단은 무겁고 불편한 예식 갑옷을 입고 꼿꼿한 자세로 말을 탔다.
개인 호위 기사라는 명목으로 마차에 눌러앉은 베른닐은 그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호사를 누리는 셈이었다.
그래서 베른닐이 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원래 재미있는 이야기란 그럴수록 더 깊숙한 곳으로 숨어버리는 녀석이었다.
베른닐이 결국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제가 제 아내 이야기를 해 드렸던가요?”
“아내? 베른닐이 유부남이었단 말야?”
“정확히 말하자면 아내가 아니라 전처입니다. 결혼을 했었습니다. 끝은 안 좋았지만.”
“잠깐. 우울한 이야기라면 여기까지 하자.”
“우울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아, 조금 험악한 말입니다만, 그 나쁜 년 얼굴을 더 안 봐도 되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오. 갑자기 재미있어지는데. 그 얘기, 어디서부터 시작이야?”
“그게 말입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두건 이야기부터 해드려야겠군요. 그 빌어먹을 두건 때문에. 결국, 다 그 두건 탓이었습니다.”
두건이라. 시엔이 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두건과 나쁜 년인 전처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생각 이상으로 재미있어질 것 같은 이야기에 시엔이 잔뜩 기대하면 그때였다.
마차가 멈춰섰다. 웅성거림. 그리고 고성.
“밖에 무슨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뭐, 알아서 하겠지. 그래서, 그 두건이 왜?”
“그 두건이 말입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제가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야, 잠깐! 됐으니까 얘기나 계속 하라니까! 야!”
베른닐이 불경스럽게도 시엔의 말을 무시하고 마차 밖으로 뛰어나갔다. 사실 별로 이야기하고 싶은 사연은 아니었던 모양.
저것도 이제 나랑 낯이 좀 익었다 이거지. 시엔이 입맛을 쩝 다셨다.
베른닐은 그 행실 덕분에 창공 기사단에서도 어울리는 이 없는 외톨이었다. 시엔 역시 마찬가지라 둘이 붙어다니다 정도 많이 붙었다.
그 부작용이 바로 이거다.
“끙.”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문득 이런 농담이 생각나는 건 기분 탓일까.
시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심심한 차에 여기 가만히 있느니 밖에 나가 무슨 일인지 알아볼 요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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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영주님, 제발 이 늙은 것의 청을 들어주십시오!”
“이게 감히 어디서!”
“영주님! 영주님!”
주름이 자글자글한 늙은이가 피를 토할 기세로 영주님을 찾았다. 당황한 병사들에게 질질 끌려나가면서도 목소리를 높인다. 피라도 토할 듯이 간절하고 비통한 외침이었다.
“무슨 소란이더냐.”
노인의 간절함이 닿았는지, 티란디스 후작이 백마를 타고 나타났다. 병사들이 차려 자세로 예를 표하고, 그 서슬에 풀려난 노인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영주님, 이 늙은 것의 청을 들어주십시오! 마을이 위기에 빠졌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자세히 말해 보라.”
후작이 허락하자, 노인이 사연을 풀었다.
마을 주변에 코볼트 무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코볼트는 늑대 대가리를 단 난쟁이의 모습을 한 마물이다. 하급 중에서도 가장 아래에 있는 녀석. 한 개체의 전투력은 결코 강하다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물이란 지능이 있는 것들이다.
도구를 쓸 줄 알고, 무리를 짓기 때문에 코볼트들은 얕볼 수 없는 상대였다.
그게 벌써 한 달 전이었다.
그 동안 촌락의 가축을 한 마리 한 마리 훔쳐가더니, 어제는 야밤에 습격해 기어코 마지막 소를 약탈해가고 말았다고.
“한 달 전이라? 순찰관은? 알리지 않았나?”
“알렸습니다! 진즉에 알렸습니다! 허나 아무런 기별이 없습니다요!”
후작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지금은 겨울이었다. 배고픈 마물이 자주 나타나고, 어울러 할 일 없는 병사들이 자주 출정에 나서는 계절이다.
그런데 한 달이라니.
후작이 혀를 차며 명령했다.
“순찰관이라. 쯧. 즉시 영주성에 전령을 보내도록. 열정 기사단원 둘, 병사 스물을 추려 토벌을 명한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자비로운 영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영주님, 만세!”
노인이 만세를 부르며 영주를 찬양했다.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나서야 할 때인가 보다. 시엔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이봐, 노인장. 혹시 마을 규모가 얼마나 되지? 그리고 마을에 가축이 더 남아있나?”
“예에. 삼십 호 남짓한 누추한 마을입니다. 그러니 본디 키우는 가축이 별로 없어, 이젠 염소나 닭 따위가 겨우 몇 마리 정도······”
“한 달이라. 그간 마물들이 얼마 간격으로 습격해 왔는데?”
“그것이, 극성맞을 때는 주에 두 번, 아닐 때는 한 번 정도였습니다.”
“흠. 알겠어.”
시엔이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말해 보라는 듯 이채를 띠며 시선을 마주쳐왔다.
“후작님, 아무래도 지금 당장 병사를 추려 보내야 할 것 같은데요?”
“어째서지?”
“너무 늦을 테니까요. 전령이 가는 데에 이틀, 편성하는 데에 하루, 병단의 행군이 이틀이라 쳐도 닷새가 걸릴 겁니다. 최소한으로요.”
“늦는다?”
“예. 마물이 다시 나타난다면 다음엔 가축이 아니라 사람이 다칠 테니까요. 소를 잡아간 녀석들이 염소나 닭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요? 다음엔 피를 볼 겁니다.”
“정히 위험하다면 저들이 잠시 피신하면 되지 않겠느냐.”
“지금은 겨울이니까요. 겨울은 저장한 식량이나 까먹는 계절이죠. 혹여 마을을 비운 사이 문제라도 생긴다면, 저들은 다음 봄을 맞이할 수 없을지도 모르죠.”
“흠.”
후작이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시엔이 다시 말했다.
“많은 인원은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노인이 그러지 않았던가.
주에 한 번이나 두 번을 습격했다고.
마물들이 이 겨울 어디 사냥을 할 수도 없다. 약탈한 가축이나 먹고 살겠지. 큰 가축으로 일주일, 작은 가축으로 주에 두 번 습격할 정도면 그 숫자야 많아도 스물이었다.
잘 훈련된 동수의 병사라면 충분히 토벌 가능한 숫자였다. 거기에 기사가 함께한다면 작은 피해조차 없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네 말도 일리가 있다만. 허락할 수 없다.”
“어째서요?”
“이들은 가문의 정예이자, 가문의 핏줄이 모인 이 행렬을 지키는 성벽이다. 또한 수도에서 그 용맹을 뽐내 가문의 이름을 드높일 자원들이지. 그러니 어찌 함부로 차출할 수가 있겠느냐.”
“그럼 저들의 마을은 어쩌시려구요.”
“병사들이 토벌을 마칠 때까지 잠시 피신해 있도록 하라. 허나 네 말이 일리가 있어, 금화를 특별히 하사하도록 하마.”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병사를 보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죠.”
마을을 비우면, 마물들도 떠날 터였다.
당장 먹을 것이 없으니 계속 자리를 지킬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당장 노인의 마을이 횡액을 피하더라도, 다른 곳에서 피해가 나온다.
게다가 코볼트가 아닌가.
그렇게 놓치고 난 후 봄이 오면? 먹을 것이 생기면 그 때부터는 빠르게 숫자가 늘어난다.
“지금은 몇 개 십인대면 충분하지만, 나중엔 군대를 동원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지금 바로 병사를 보내는 것이 현명한 일이죠.”
“현명한 일이라. 그럼 병사를 몇이나 보내야 하겠느냐?”
“병사 스물에 기사 다섯이면 충분하겠죠.”
“흠.”
후작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버지.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후작가의 장녀인 카레네였다.
시엔보다 머리 하나 차이의 훤칠한 키, 길쭉한 손발을 가진 카레네는 현재 최고 유력한 후계 후보이자 왕국에 소문난 검의 달인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검에 재능을 보이더니 18세에 벌써 창공 기사단 부단장을 대련으로 이겼다고 하던가.
그게 벌써 8년 전의 이야기라니, 지금은 어지간한 기사단의 단장보다 뛰어난 검사임에 틀림없었다.
“코볼트 스물이라면, 저와 마틸데 둘이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혹시 모르니 기사 한 명을 더 데려가겠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연회에 늦게 될 터다. 괜찮겠느냐?”
“예!”
허락이었다.
카레네가 씩씩하게 대답하고는 준비를 위해 이동했다. 시엔의 곁을 스쳐지나갈 때였다. 그 길쭉한 손을 뻗어 시엔의 머리를 한번 쓱 쓰다듬어주는 것이 아닌가.
이건 또 무슨 뜻이야? 시엔이 카레네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져 갈 뿐이었다.
< 3. 전 연인과 전 연인의 현 연인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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