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풍운의 카지노 로얄 [3] >
“손님, 죄송합니다만 오너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도박장의 직원 한 명이 다가와 귓말을 했다. 시엔이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원을 따라 복도 너머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며 왠지 익숙한 듯한, 그런 기시감이 들었다.
아. 엘모네서도 이랬던가. 시엔이 납득했다.
그렇다면 또 이야기가 다르다.
‘돈이 많으면 좋지. 또 뜯어야겠다.’
엘모의 도박장은 놔두면 망할 지경이고, 그간 황금도 쪽 빨아먹었다. 심지어 엘모는 영혼마저 저당 잡힌 상태가 아니던가.
부실한 물주는 버리고 싱싱한 놈으로 갈아치우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시엔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직원의 꽁무니를 쫒았다.
마침내 방 안에 들어서자, 뱀 같은 눈을 한 사내가 시엔을 맞이했다. 시엔의 눈이 사내의 아래위를 훑었다. 정확히는 사내에게 매달린 망령들이었다. 참으로 많이도 달라붙었다.
많은 망령에게 원망을 받는다 하여 그게 꼭 선악을 가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보통은 많은 원한을 사는 녀석이 나쁜 놈이긴 했다. 그런 의미에서 뱀눈 사내는 아주아주 나쁜놈이었다.
시엔이 씩 웃으며 말했다.
“너, 좋은 걸 달고 있네?”
“예?”
“그런 게 있어. 요즘 목이 좀 아프지? 자고 일어나면 딱딱하게 굳고, 하루종일 신경쓰이고.”
“그걸 어떻게······”
“딱 보니 그래.”
시엔이 사내의 목덜미를 움켜쥔 망령을 바라보았다.
다른 망령들보다 유난히 선명한 검은 형체. 그리고 눈구멍에는 미약한 불씨가 들었다. 강력한 망령이다.
일반적인 망령의 눈구멍은 그저 뻥 뚫려 공허할 뿐이다. 눈을 틔운 망령이란, 악령이 될 가능성을 품은 녀석이라는 뜻이었다.
저 정도 되는 망령이면 미약하나마 현실에 간섭이 가능했다. 그래봐야 만성 근육통 정도에 그치는 정도지만은.
물론 저대로 수백 년쯤 지나면 부정 세계와의 교감을 통해 강력한 언데드로 태어나게 되겠지만.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은 거의 없다. 흑마법사가 돌아다니던 시절엔 망령이 싹이 보이기도 전에 잡아들이느라 씨가 마를 지경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렇네?’
시엔이 뱀눈 사내를 두고 다른 생각을 했다.
재림 이전에 시대야 망령이 모자랄 지경이었지만, 지금은 어떤가.
흑마법이 지워지고 사후의 신비가 사라진 시대가 벌써 수백년인 모양.
그렇다면 여기저기 강력한 야생 언데드들이 굴러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녀석들을 사역할 수 있다면 재림 전의 경지는 쉽게 도달할 수 있으리라. 그뿐이랴. 오히려 그 이상을 바라볼 수도 있겠고.
“커흠.”
“아. 미안. 딴생각을 좀 하느라.”
시엔이 손을 저으며 사과했다. 어쨌거나 사람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는 건 매너가 아니니까.
그러자 뱀눈 사내가 정색을 했다. 기분이 상한 모양. 시엔이 대충 웃어주며 생각했다. 도박장 주인이라는 놈이 표정 관리도 안 되나.
“일단 앉으시죠.”
시엔이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다른 게 아니라, 슬슬 이만 돌아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뭐?”
“그만하면 많이 따시지 않으셨습니까. 용돈으로야 충분히 차고 넘치는 양이죠. 그러니 슬슬 만족하고 돌아가셨으면 해서 말입니다.”
이건 또 뭐야?
새로운 물주에게 또 얼마나 황금을 뜯어낼까 기대하던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만하면 많이 땄으니 돌아가라니. 그게 말이 되나?
“너, 이름이 뭐야?”
“티란디스가의 도련님께서 저처럼 하찮은 사람의 이름을 아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티란디스의 도련님인건 알고 있네?”
“그야 소문이 자자하신 분인데, 감히 모르겠습니까.”
“어쭈. 고개가 아주 빳빳하네?”
시엔이 희게 웃었다.
도박장을 운영하는 뒷골목 건달 따위, 시엔은 사람으로 치지도 않았다. 애초에 남의 눈물 뽑아 마시는 것들이 아니던가.
엘모야 제 알아서 바짝 엎드려 설설 기며 재화를 바치니 귀여운 맛에 놔두기라도 하지.
“뭘 믿고 이러는지 모르겠어.”
“거야. 뭐. 그럼 어쩌시겠습니까. 공자님이 뭘 하실 수 있으십니까? 치안대나 경비단을 움직이실 겁니까? 아니면 기사단과 연줄이라도 있으십니까? 그것도 아니면.”
“아니면?”
“당장 제 목이라도 거두시겠습니까? 아무리 귀족이라 하셔도 죄 없는 이의 목을 치셔야 되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하실 능력이 있으실 때에 말입니다만.”
뱀눈 사내의 말에 방문을 지키던 덩치 둘이 녀석의 뒤에 자리를 잡는다. 네 혼자 뭐 어쩔 거냐는 무력시위였다.
차라리 베른닐과 같이 왔으면 칼부림이라도 내줬을 것을. 괜히 놀고 있으라고 혼자서 와 버렸구만. 시엔이 살짝 반성했다.
뱀눈 사내의 말이 맞기는 했다.
가문 내에서 일개 하녀에게조차 무시당하던 이가 바로 시엔이었다. 물론 재림 후, 이제는 그런 시건방진 하인은 없었지만.
시엔의 위치란 그 정도였다. 사실 가문의 성씨를 달고 있을 뿐, 시엔이 티란디스의 권력 중 하나라도 쥐고 흔들기는 불가능했으니.
“믿는 구석이 있긴 했네.”
그제야 시엔이 상황을 이해했다.
시엔의 위치가 가문 내에 가장 아래에 깔려있다 해도, 건달 주제에 영주의 아들을 이리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건달이란 저보다 약하다 생각하는 이에게 고개를 치드는 놈들이 아니던가. 그리고 제 뒷배를 자신의 힘으로 착각하는 놈들이기도 하고.
시엔보다 윗줄에 있는 이. 티란디스 후작이 직접 개입했을 리는 없으니 이 몸뚱아리의 형제 중 한 놈의 수작이리라.
시엔이 도박장에서 그 막대한 금액을 순수하게 실력으로 땄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놈은 귀족을 할 자격도 없다.
이 몸뚱이의 형제들도 시엔이 그 도박장을 제 자금줄로 잡았다는 개념으로 이해했겠지.
하지만 왜?
방을 황금으로 좀 장식해놓았기로니 그게 배알이 꼴려서 보기 싫었던 걸까. 아니면 후계 구도가 어지러지는 게 싫었던지. 혹은 둘 다.
하여간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말을 안 들어.
시엔이 입 안에서 혀를 굴려 주문을 완성해냈다.
시엔의 심장에서 음차원 에너지가 풀려나왔다. 부정 세계의 향기에, 망령들이 관심을 보였다. 시엔의 몸밖으로 떠난 음차원 에너지가 한 지점을 향했다. 뱀눈 사내의 목을 연신 조르던 강한 망령에게였다.
순간 망령의 안광이 폭발적으로 뿜어져나왔다. 원래 싹수가 있던 유망한 망령이 음차원 에너지를 만나 한 단계 진화를 맞이했다.
시엔이 악령의 진화를 이끌었다.
악령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흑마법사들 사이에선 뽑기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망령을 키운다 해서 원하는 종류의 악령이 된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정 경지에 이른 흑마법사는 그조차 제 뜻대로 조종할 수 있었다. 부정 세계와의 강한 접촉이 가능한 극히 일부의 흑마법사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었지만.
검은 그림자에 불과했던 형상에 점차 색이 오르고 디테일을 갖추더니 피눈물을 흘리는 소녀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영혼체의 모습이 꿈결처럼 일렁였다. 꿈에 침투해 상대방에게 끊임없는 악몽을 선사하는 유형의 악령, 해피 드리머의 특징이었다.
-히히······ 죽일 놈······ 아냐, 죽이면 안 돼······ 히히······ 혼자서 죽을 때까지 괴롭혀줄 테야······
악령이 뱀눈 사내를 휘감았다. 아주 제대로 악령이 씌었다. 시엔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너. 이제부터는 밤이 좀 괴로워질 거야.”
재림 전, 여러 형벌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몇 개에 잠을 재우지 않는 불면형이란 것이 있다.
사슬과 족쇄로 사지를 결박해 눕혀놓고는, 24시간 교대되는 간수들이 잠을 자지 못하도록 계속 감시하는 형벌이었다.
처음에는 형벌에 처해진 죄수들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진 않는다. 그까짓 잠, 조금 못 잔다고 해서 어떻겠냐고.
그리고 딱 일주일만 지나면, 세상에 죽음보다 더 괴로운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떤 죄수도 한 달을 버티지 못했다. 그 전에 스스로 머리를 땅에 치받거나 혀를 깨물거나 하며 자살을 택하게 되니까.
악몽을 관장하는 해피 드리머가 진실로 무서운 이유였다. 악몽과 불면. 어느 쪽을 택해도 절망뿐일 테니까.
“호오. 글쎄요. 누가 괴롭게 될 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라 생각합니다만.”
“악몽이 찾아갈 거야.”
“악몽이라. 그럼 기대하고 있도록 하죠.”
뱀눈 사내는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건방진 자세로 손만 흔들었다.
글쎄. 어떻게 될까. 시엔이 고소를 머금었다.
이렇게까지 알려줬으니 곧 제게 일어나는 악몽의 연속이 누구 때문인지 알게 되리라.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흑마법사 동료라도 있다면 좋은 내기거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울고불고 매달리며 제발 어떻게 좀 해 달라고 빌게 될 때까지 며칠이 걸릴까 하는 그런 내기.
시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뱀눈 사내가 마지막까지 빈정거렸다.
“아. 오늘 딴 돈은 그대로 가지고 가셔도 좋습니다. 앞으로는 용돈 챙기시기에 애로사항이 좀 있으실 테니까요.”
시엔이 킥 웃음을 터뜨렸다.
이래서야 어떻게 해도 용서해 줄 수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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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적이야말로 정말로 무서운 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장남 로우드 티란디스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적이었다.
티란디스가의 만찬, 조용히 식사중이던 시엔에게 이죽거리는 것이다.
“도박에서 돈을 많이 땄다지? 아마 이제부턴 그렇게 안 될 테지만 말야.”
뱀눈깔 녀석의 뻣뻣함 뒤에는 로우드가 있었던 모양이다. 현재 유력하다 손꼽히는 세 명의 후계 후보 중 한 명이 로우드였다.
아무리 일개 건달이라도 유력 후계 후보를 잡았으니 후작가의 얼간이로 통하는 시엔을 깔볼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보아하니 널 예뻐해 주는 단골 도박장이 있는 모양이야. 그런데 그게 사라지면? 그래도 계속 딸 수 있을 것 같냐?”
로우드가 계속해서 이죽거렸다.
“오늘 보니 새로 생긴 도박장이 있더라고. 이제부턴 거길 단골으로 삼을까 해서.”
“새로 생긴 도박장이라. 그런데 거기서 널 받아주긴 한데? 내가 보기엔 입구에서부터 쫒겨날 것 같은데 말야.”
“남이사.”
“뭐 임마! 너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
시엔이 콧방귀를 뀌자 로우드가 발끈했다.
저런 녀석이 세 명의 유력 후계자 중 하나라니. 티란디스에 그렇게 인물이 없는 줄은 몰랐다.
“로우드야.”
“예. 어머니.”
“괜히 상대할 필요는 없단다.”
후작과 로우드에 사이에 위치한 둘째 부인 라니아가 제 아들을 진정시켰다. 라니아는 사실상 후작가의 안주인이었다.
한 가문의 안주인은 강력한 권력자이기도 했다. 사람 두고 부리는 일에서부터 가문 사업 에 이르기까지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으니.
저 한심한 장남이 유력 후계 후보인 것도 바로 제 어머니의 치마폭 덕분이리라.
그때였다.
묵묵히 식사를 하던 티란디스 후작이 입을 열었다.
“2주 후에 폐하의 탄신 기념 연회가 왕성에서 열린다. 일주일 후 출발할 예정이니 참여하고 싶으면 손을 들거라.”
티란디스 후작은 늘 이런 식이었다.
언제나 딱 자기 할 말만 내뱉는 사내.
형제들이 대부분 손을 드는 가운데, 시엔은 조용히 식사에 몰두했다.
귀찮게 왕성까지 가서 또 무얼 하게.
그러자 후작이 다시 말했다.
“좋다. 그리고 시엔. 너는 꼭 왕성에 간다.”
“네? 저는 손 안 들었는데요.”
“네 약혼이 파기당하지 않았느냐. 이번 기회에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야지.”
새로운 인연이라니.
시엔이 떫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제 의사는 상관없는 거죠?”
“그래.”
“그럼 알겠습니다.”
그러나 어쩌랴. 가주가 가라는데 갈 수밖에.
< 2. 풍운의 카지노 로얄 [3]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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