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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망령재림-6화 (6/268)

< 2. 풍운의 카지노 로얄 [2] >

시엔과 베른닐이 진지한 표정으로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들이 사뭇 심각하여 장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마침내 시엔이 말문을 텄다.

“자, 이렇게 깔렸으면 남은 패가 뭔지 감이 잡히지? 나올 수 있는 합을 맞춰 봐.”

“이러면······ 풀하우스, 스트레이트, 어쩌면 포카드까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아. 이제 기본은 됐네.”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른닐은 아닌 게 아니라 도박에 재능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시엔이 책상 위에 벌려진 카드패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 상황에서 안 죽고 버틴다면 둘 중 하나인거지. 좋은 패를 쥐었거나, 혹은 페이크를 치고 있거나.”

“하지만 그걸 어떻게 구분해야 합니까?”

“베른닐은 카드 혼자서 해? 딜러는 여간해선 공격적인 수는 안 두니까 패가 나쁘다 싶으면 일찍 죽을 거란 말야. 그때 다른 놈에게 따야지.”

“그 말씀이시면.”

“남은 족보 읽을 줄도 모르고 배짱으로 튕기는 놈이 한 둘이 아냐. 베른닐은 기사니까 상대를 살필 줄도 알겠지. 뭐 긴장한 기색이나 그런 거 말야.”

“과연!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알 것 같아? 그럼 가자.”

“예? 어디를 말씀이십니까.”

시엔이 씩 웃었다.

“어디긴 어디야. 배운거 써먹으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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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모의 도박장 ‘인생의 전환점’에 들어선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휑하지 않나? 들어오자마자 눈에 띌 정도로 손님이 줄었다.

덕분에 분위기도 여느 때 같지 않게 축 가라앉은 상태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사이에 두다다 누군가 급히 달려들었다. 그리곤 덥썩 업드려 시엔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졌다.

“아이오고, 나으으리이! 저어 좀 살려주십시오오!”

“뭐야, 엘모.”

“아아주 큰일이 났습니다요오. 이번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오!”

하플링이 다리를 붙들고 꺼이꺼이 눈물을 짜내는 것이다. 시엔이 당황해 베른닐을 바라보았다.

“야, 이거 왜 이래? 베른닐, 좀 떼내 봐.”

“예. 도련님.”

“아이고오! 도와주십시오오! 나으으리이!”

베른닐이 엘모의 목덜미를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한참 키가 큰 베른닐이어서, 엘모는 공중에 붙들린 채 팔다리만 바동거렸다.

꽤 귀여운 모습이라 시엔이 킥 웃음을 터뜨렸다. 엘모는 계속 울상이었다.

“거 참. 쪼그만 친구. 진정 좀 하지. 아무리 그래도 도련님께 함부로 손을 대면 쓰나.”

“으아아앙!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어허. 진정하라니까. 도련님. 어쩔까요?”

“일단 잠시 들고 있어. 힘이 빠지면 얌전해지지 않을까.”

“놔! 놓으라고! 이 멀대들! 멀쟁이들!”

엘모가 계속해서 바동거렸다.

그러나 어찌하랴. 애초에 신장차에서 체급이 완전히 다르고, 게다가 베른닐은 기사단의 실력자가 아니던가.

한참이나 원치 않은 공중부양을 하던 엘모가 겨우 잠잠해졌다.

“좀 진정이 됐어?”

“헤헤······ 이제 내리라 허락해주세요오.”

“뭐.”

시엔이 눈짓하자, 베른닐이 엘모를 쥔 손을 놓았다. 쿵. 바닥에 엉덩이로 착지한 엘모가 아이고 곡소리를 하며 키 큰 기사를 흘겨보았다.

“자. 그래서, 무슨 일이야?”

“그게,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지요오.”

엘모가 그제야 주변을 바라보며 얼굴을 붉혔다. 부하들 앞에서 창피를 당했으니 어련하랴. 그래서 이리저리 매서운 눈빛을 던져 보았으나, 포커페이스가 장점인 엘모의 직원들은 그저 못 본 척 고개만 돌릴 뿐이었다.

결국 내실로 안내받아 한 상 거나하게 차려진 앞에, 시엔이 값비싼 와인이 든 술잔을 홀짝거리며 물었다.

“그래서, 뭐야?”

“그게에,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오.”

“아니, 그래서 뭐냐고.”

“그게 말입니다아아. 손님이 안 오고 있습니다요오. 이대로라면 완전히 파산입니다아!”

“확실히 손님이 없긴 하던데. 왜? 사기라도 치다 들켰나?”

“아이고오! 무슨 말씀이십니까아! 저의 인생의 전환점에선 절대 그런 불미스럽고 불경스러우며 악질적인 속임수는 절대절대절대 쓰지 않습니다요오!”

시엔은 대답 대신 킥 웃음만 터뜨렸다.

엘모의 뺨이 붉게 상기되었다.

“요 바로 앞에 새로운 도박장이 생겼습니다아.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아! 당장 여기에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키는 놀이공간이 이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에!”

“새로운 도박장이라고?”

“그렇습죠오. 예에.”

“흠.”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종류의 가게들은 왕국의 법보다도 저네들이 세워 놓은 암묵적인 약속을 우선시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도박장 주변에는 또 다른 도박장을 세우지 않는다든가 하는 그런.

원래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까운 치들이라, 그럴 때는 대개 즉각적인 사적 제제가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도박장 운영하는 애들이야 전부 쓰레기이긴 해도 그런 상도의는 잘 지키지 않나?”

“그러문요오! 상도의가 없는 일입니다아!”

엘모가 맞장구를 치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다 미묘한 표정이 되어 눈을 깜박거렸다.

“뭔가아······”

“왜?”

“아닙니다요, 헤헤······ 다만 저어는 손님들의 즐거움을 위해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가게를 운영하고 있을 뿐입니다요오.”

“순수한 쓰레기구나?”

“끄응. 어쨌든 좀 도와주십시오오.”

“흠. 도와 달라고? 그런데 좀 이상하다? 원래 이렇게 너네 의리를 저버리거나 하면 당장에 짓밟아놓는 게 너희들 규칙 아냐?”

“그게, 이상합니다요오. 다른 녀석들이 돈이라도 받아먹었는지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굴고 있습니다아.”

“음.”

“그러니까 나아으리께서 사알짝 권력의 망치 맛을 보여주시며언······”

“흐음. 어쩔까. 그래도 그렇지. 앞에 도박장 하나 생겼다고 사람이 이렇게 없어서야.”

“그게, 미친 놈들입니다요오! 아주 도박장에서 제대로 퍼주고 있다는 모양입니다아!”

“너도 퍼 줘. 그러면 되겠네.”

“그게, 여유 자금이 별로 없습니다아.”

“왜? 엘모 너, 돈 많잖아.”

“그것이, 아흐, 으으······”

작은 하플링이 시엔을 보다가, 또 다른 곳을 보다가, 또 시엔의 얼굴을 쳐다보곤 이내 제 가슴만 탕탕 두드렸다.

할 말이 있는데 못 하겠다는 제스쳐다.

아. 내가 많이 뜯어가긴 했지. 음.

시엔이 깨달았다. 그래서 뭐? 그게 엘모를 도와줄 이유는 안 된다. 어차피 멍청한 녀석들이 꼴은 돈이다. 나쁜 놈이 가지고 있길래 빼앗은 것뿐이었으니.

“그래도 내가 나서는 건 별로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야. 그지?”

“아이고오! 나으리이! 한 번만 도와주십쇼오! 이 은혜 죽어서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요오!”

“호오.”

시엔이 눈을 빛냈다.

이러면 또 이야기가 다르다.

“방금 다시 말해봐.”

“예?”

“그 은혜 어쩌고 한 거.”

“어, 죽어서도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는 말씀을 드렸었나요오.”

엘모가 움찔 몸을 떨었다. 시엔의 눈동자 속 어딘가, 혹은 그 이면에 푸르게 타오르는 음산한 불줄기가 환상처럼 스친 탓이었다.

엘모가 본능적인 공포에 사로잡히기 직전이었다.

“똑바로 말해 봐. 그럼 도와줄게.”

시엔의 목소리에 엘모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말 한마디에 도와주겠다고. 그렇다면야 겨우 입으로 떠드는 수고가 무에 어렵겠는가.

엘모가 넙죽 엎드리며 외쳤다.

“그 도와주시면 이 은혜 죽어서도오 잊지 않겠습니다아! 그러니 제발 도와주십시요오!”

“좋아. 분명히 말 한 거다?”

“예에! 그러고 말구요!”

“좋아. 네가 언제 죽을지는 모르겠지만. 뭐 나쁘지 않은 거래인 것 같네.”

“예에? 나아으리이?”

“입조심을 해야 하는 법인데.”

시엔이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한 번 일어난 일은 어찌해도 되돌릴 수가 없다. 이는 세계가 시간으로 작성된 책이기 때문이었다. 과거는 현상계를 벗어나 허수 차원에 도달하여 영원히 얼어붙는다.

그리하여 그곳을 동토 세계라 했다. 역사는 그곳에서 절대 녹지도, 깨지지도 않는 한 줄의 글귀가 되어 박제되는 것이다.

시엔은 한때 심상 세계의 다섯 허수 차원까지 확장해냈던 최고의 흑마법사였다. 그 결과 세상의 법칙을 수정하여 세상에 재림하지 않았던가.

비록 강대하던 음차원 에너지는 전부 잃었으나, 과거의 족적은 영혼에 새겨져 관념 세계와의 미약한 연결은 유지되고 있었다.

엘모의 말은 언령이 되어 역사에 박제되었다. 이제 이 하플링의 사후에는, 시엔의 종속망령이 되어 끝없이 은혜를 갚아야만 했다.

굳이 설명해 줄 이유는 없었다.

시엔은 그저 음흉하게 킬킬거릴 뿐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엘모가 결국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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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보자. 인생의 반환점이라.”

엘모의 도박장 이름이 인생의 전환점. 그리고 새로 생긴 도박장의 이름이 인생의 반환점이었다.

이래서야 아예 대놓고 노렸다고 광고하고 있는 꼴이었다. 하기사, 그러니 대놓고 앞집에다가 동종업을 차렸겠지.

도박장 안으로 들어가려는 시엔의 앞을 기도 한 명이 가로막았다.

“그, 여기는······”

“나. 시엔 티란디스.”

시엔의 말에 기도가 대번에 쪼그라들었다. 시엔이 킬킬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오오. 잘 해놨네.”

엘모의 가게도 과할 정도로 금빛이 넘치는 곳이었으나, 여기에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게다가 모든 내부 장식이며 가구들이 전부 새것의 광택을 내고 있지 않은가.

“베른닐은 알아서 좀 놀다 와 봐.”

“예?”

“아까 엘모 말 못 들었어? 퍼준다잖아. 이럴 때 한몫 잡아야지.”

“아. 맞습니다!”

“그럼 나도 좀 놀아야겠다.”

베른닐이 묵례와 함께 테이블 하나에 붙어버리고 나자, 시엔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이제 막 생긴 도박장이라 그런지 망령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쌓인 원한이 없기 때문이리라.

다만 딜러들은 어디서 좀 날린 녀석들인 모양. 등 뒤에 망령을 붙이고 있는 꼴이 남의 눈에서 피눈물 좀 뽑은 녀석들임이 틀림없었다.

‘베 엔쉬- 아크흐라.’

시엔이 작게 중얼거렸다.

시엔의 심장에서 음차원 에너지가 꿈틀거렸다. 혈관을 따라 부정의 흐름이 팔뚝을, 손목을, 손가락으로, 반지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러자 망령이 깨어났다.

시엔이 적당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시엔의 종속 망령들이 테이블의 도박꾼들 뒤편에 달라붙었다.

마침내 패가 돌자, 망령들이 시엔을 향해 기괴한 손짓을 해 보였다. 상대방들이 들고 있는 카드를 고스란히 시엔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천 년 전에는 도박장마다 흑마법사가 꼭 끼어 있으니 시도하지도 못할 사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 누구도 흑마법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이니.

시엔은 원래 도박을 딱 취미로만 즐겼다. 취미 판에 속임수란 자신이 하는 것도 남에게 당하는 것도 싫어했다.

그러나 지금은 놀러 온 것이 아니었다.

도박장 하나를 박살을 내러 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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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내가 이겼어.”

오오. 시엔의 승리 선언에 사방에서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계속해서 따고 있는 티란디스 가의 도련님이 신기했는지, 어느새 도박장의 손님 중 많은 이들이 구경꾼이 되어있는 상황이었다.

시엔이 칩들을 끌어안고 제 앞으로 잡아당겼다. 가장 비싼 검은색 칩들이 이미 산더미였다. 금화가 아니라 금괴로 정산할 정도의 양이었다.

“햐. 많이 땄네. 여기 신사 숙녀분들께 술 한 잔씩 돌려. 여기서 넉넉하게 가진 것 중에 제일 비싼 술이 뭐야? 페르티안 아실? 기분이다. 싹 돌려.”

시엔이 비싼 술을 돌리자, 도박장 안에 환호성이 터졌다. 누구는 휘파람을 불고, 깊이 팬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뺨에 입술 자국을 남기며 슬쩍 쪽지를 쥐어주기도 했다. 오늘 밤에 혼자 있겠다는 말과 함께.

‘슬슬 작업 한 번 칠 때가 안 됐나?’

아무리 개업 기념으로 퍼준다고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도박장을 돈 벌려고 차리지, 자선 사업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까 아예 기둥뿌리까지 채 갈 정도로 따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이 등장하기 마련이니까.

‘사기 치다 걸리면 도박장 간판 떼는 거지. 가게 하나 말아먹는게 뭐 어려워?’

시엔이 히죽 웃었다.

< 2. 풍운의 카지노 로얄 [2]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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