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5화 (5/268)

< 2. 풍운의 카지노 로얄 [1] >

지금까지 후작가의 6공자 시엔 티란디스에 대한 소문은 이랬다.

말수 없고 유약한 겁쟁이.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말은 더듬으며 매양 웃기만 하는 바보 천치.

시와 꽃을 사랑한다는 말도 있었으나, 사람들의 뇌리에 남지는 않았다. 소문이란 보통 나쁜 것만이 살아남았다.

시엔이 자살하려 했다며?

엥? 귀족 나으리께서 뭐하다?

여자한테 차여서 그랬다던데.

하이고, 병신. 세상 사람 반은 죽어야겠네.

원래는 후작가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소식이었다. 누가 감히 귀족가의 치부를 떠들겠는가. 허나 워낙에 만만한 상대여야지. 후작가의 소동을 목격한 어느 하인이 퍼뜨렸으리라.

요즘에는 새로운 소문이 돌았다.

죽다 살더니 사람이 홰까닥 돌아버렸다더라.

하인들에게 그렇게 패악을 부린다면서.

그뿐이야? 도박에 맛들려서 도박장에 아주 산다더라. 그런데 또 그렇게 꾼이라고. 아주 황금을 쓸어담는다던데. 제 방에 온통 금괴를 늘어놓았더래.

그리고 이에 속이 쓰리는 하플링이 한 명.

엘모가 으득 이를 갈았다.

와이번의 가죽으로 만든 고급 소파에 하플링이 푹 파묻혀 술병을 들고 나발을 불었다. 하플링 치고는 꽤 대담한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뜯어가는거야? 아오.’

그 찌질이라던 티란디스의 시엔에게 매번 황금을 뜯기는 엘모였다. 탐욕스럽기 짝이 없는 놈 같으니. 엘모가 속으로 욕을 삼켰다.

‘소문이란 게 믿을 게 없다곤 하지만.’

그래도 소문이란 어느 정도 사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엘모가 만난 시엔은 소문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제 기사가 사람 하나를 야무지게 쥐어패고 있음에도 눈 하나 꿈쩍 않는 냉혈한이 아니던가.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눈을 반짝이던 그 표정이 눈에 선했다.

‘게다가······ 젠장, 도대체 뭐야?’

직원들의 작업은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귀신같이 알아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엘모의 부하들은 작업을 치는데 있어서는 그가 아는 최고의 실력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그걸 빌미로 태연하게 협박까지 하며 돈을 뜯어 가는 녀석이 유약해? 개가 풀을 뜯어 먹는 소리였다.

‘그리고 내 돈 뜯어다 어따 쓰려고. 후작가에 돈 많잖아!’

티란디스 후작가와 같은 한 지역의 제후급 귀족의 재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어지간한 대상인들도 비비지 못할 만큼이니 오죽할까.

그러니까 그 핏줄인 시엔 또한 부자이건만, 자신 같은 선량한 소시민의 황금을 뜯어가고 있지 않은가.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먹지.

피 같은 황금이 계속 빠지는 걸 생각하면.

“으아아!”

엘모가 머리카락를 쥐어뜯었다. 그러고 나니 손에 한 줌 머리카락이 남았다. 엘모가 깜짝 놀랐다.

“안 돼! 내가 탈모라니!”

----

인간은 황금에 매이는 족속이다. 살아서 그렇고, 죽어서도 마찬가지. 황금, 다이아몬드, 루비, 토파즈······. 값비싼 보석은 망령을 꾀기에 최고의 재료였다.

그렇게 망령이 깃든 보석을 사령석이라 불렀다. 저주받은 보석이라 모두가 기피하는 물건이다. 흑마법사들을 제외하면.

천 년 전에는 차림새가 마치 흑마법사 같다는 관용구가 있었다. 악세사리를 과하게 착용한 모양새를 이르는 말이었다.

흑마법사들은 사령석을 온 몸에 둘렀다. 악세사리로 시작해서 악세사리로 끝나는 드레스 코드. 귀걸이는 기본, 각 손가락에는 반지를 두세개씩 꿰고 팔찌와 목걸이를 묵직하게 거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그리고 시엔은 흑마법사였다.

황금은 엘모가 자발적으로 가져다 바쳤다. 그중 일부를 악세사리로 잔뜩 바꿨다.

“라 크셰라 루드 벨 시엔.”

시엔의 입에서 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뱀이 쉭쉭거리는 듯한 기괴한 주문이다.

어둠이 편애하는 언어. 시엔의 이름으로 명하건데 죄인을 대령하라.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법칙을 주무르는 부정 세계의 말이었다.

치르르르!

시엔의 전신에서 수많은 사슬이 풀려나왔다. 그 끝에는 거뭇한 망령들이 붙들린 상태였다.

망혼옥. 흑마법사의 심상세계 안으로 망령을 일시적으로 잡아 가두는 흑마법이었다.

심상세계는 기본적으로 망령이 머물 곳은 못 된다. 아무리 타락한 이라고 해도 인간의 심상세계란 기본적으로 빛으로 이어지는 양지. 망령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장소였으니까.

-크아아아! 크아악!

-증오한다! 증오오한다!

-아파······. 아프다고······.

망령들이 고통에 아우성쳤다. 시엔이 그 꼴을 보며 혀를 찼다.

“씁. 쓸만한 애가 없단 말이지. 싹이 없어. 싹이. 쯧쯧.”

망령에도 급이 있다.

생전 강대한 영혼을 지녔던 이는 사후에도 강력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도박장에서 잡아 온 망령들은 전부 고만고만한 녀석이 전부였다.

아쉽다고 해서 당장 싹수 있는 망령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시엔이 보석함을 열어 반지 하나를 집어들었다. 좁쌀만한 루비가 박힌 물건이었다. 색이 연하고 고르지 못한 것이 하급품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런 잡령들에게는 과분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호흐레 세 레라 우크쉬.“

여기 거하는 것을 허하노라. 시엔의 허락에 망령들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망령은 여럿, 반지는 하나. 저들끼리 엉켜 할퀴고 밀치며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마침내 개중 한 망령이 반지에 스며들었다. 망령이 씌인 루비에 핏빛 광채가 돌았다.

반지를 검지에 끼운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석으로부터 음차원 에너지가 흘러나왔다. 워낙에 적은 양이라 은은하다고 하기에도 모자랄 정도였지만, 이거라도 또 어디랴.

나중에 괜찮은 망령을 보면 바꾸면 되고.

시엔이 남은 망령들을 바라보았다.

검은 형체의 그림자들이 하나같이 어깨가 축 쳐졌다. 시무룩한 모양새가 귀엽기 짝이 없다. 시엔이 씩 웃으며 반지 하나를 더 꺼내들었다.

”여기 또 있는데, 한 판 더 해야지?“

망령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

작업을 마치고 쉬는 중이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 허락하자 금발의 미청년이 방 안으로 들어선다. 베른닐이었다.

베른닐이 시엔을 보고 흠칫 놀랐다.

”도련님? 웬 반지가······.“

”아. 이거? 어때. 멋지지?“

”어, 음······“

베른닐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시엔이 재촉하듯 양 손을 내밀어 보여주었다.

손가락에 반지가 두 개씩. 엄지에도 한 개씩 꿰어놓으니 총 18개의 반지가 반짝거렸다.

베른닐의 동공이 덜덜 떨렸다. 정직은 기사의 덕목이다.

”안 멋져? 난 멋진데.“

”그, ······부유해 보이십니다.“

”에이. 베른닐은 멋을 모르는구나?“

베른닐은 기가 차다는 표정이었지만 시엔은 만족했기에 킥킥 웃음을 흘렸다.

흑마법사의 눈에는 검은 망령의 기운이 살금살금 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하는 예쁜 애완동물 케이지로 보일 뿐이었으니까.

게다가 당장 부릴 수 있는 망령들이었다.

반지와 목걸이, 귀걸이까지하면 도합 21마리에 이르는 망령 부대였다. 물론 급이 낮은 녀석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스물이나 모이면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쨌든, 웬일이야?“

”그게 말입니다.“

베른닐이 머뭇거리다 말을 돌렸다.

“으으, 방에 한기가 도는군요. 불을 이렇게 때고 있는데도 싸늘하다니. 도련님의 방은 유난히 그런 것 같은 기분입니다.”

“에이, 기분이야. 기분.”

시엔이 손사래를 쳤다. 물론 기분 탓은 아니었다. 살아있는 자의 영혼이 느끼는 한기였다.

시엔이 두른 20마리의 망령 의외에도, 여기저기 장식물처럼 놓인 조그마한 금괴들에도 망령이 깃들어 있었으니까.

망령이 우글거리게 되면 기본적으로 음차원 에너지의 밀도가 높아지고, 영혼이 추위를 느끼는 장소가 되고 만다.

”뭔데. 말을 돌리는 걸 보니 뭔가 원하는 거라도 있는 모양인데. 말해 봐. 내 호위 기사에게 못 해줄 게 뭐가 있겠어?“

그러자 베른닐이 쾅 무릎을 꿇었다. 무르팍을 걱정해줘야 할 정도의 기세였다.

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카드를 좀 전수해 주십시오!

“뭐?”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요 근래 베른닐은 도박장에 따라와도 도박을 안 해, 시엔에게 공손히 굴고, 구부정한 태도도 많이 고쳐져 꼿꼿해졌다.

이제는 좀 기사 같은 모양새였다.

무엇보다 이제는 깨끗하게 잘 씻고 다니길래 사람이 좀 되었나 싶었더니.

제 버릇 남 주지는 못한다는 걸까.

“왜? 도박 그만둔 거 아니었어?”

“아닙니다.”

“그럼 왜 도박장에서 나 노는 거 보고만 있었는데? 카드 안 돌리고.”

“도련님이 하시는 걸 보고 있었습니다만, 어떻게 하시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

“으이구. 뭐. 좋아.”

시엔이 떫은 표정을 지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히려 베른닐이 놀란 얼굴이었다.

“네? 정말 가르쳐 주시는 겁니까?”

“가르쳐 달라며?”

“그게 아무래도 도박이잖습니까······”

“어차피 도박할 거면 실력이라도 있는 게 낫잖아?”

“맞습니다!”

“게다가 따는 사람은 끊어도, 꼴은 사람은 절대로 못 끊는 게 도박이니까. 베른닐도 실력이 붙으면 언젠가는 그냥 재미로 몇 번 하고 말 정도가 될 거야.”

“도련님, 절 위해서······”

베른닐의 눈에 습기가 차올라 찰랑거렸다. 도대체 뭐가 그리 감격스러운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만히 놔 두었다간 얼싸안기라도 할 기세였다. 여인도 아니고 시커먼 사내 품은 딱 질색이었다. 시엔이 급히 서랍을 뒤져 카드팩을 꺼내들었다.

“일단 카드의 기본은 카운팅이야. 전부 52장. 오픈된 카드를 보고 남은 패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정도가 되어야 초보 딱지는 떼는 거지.”

“카운팅이라 하시면.”

“말 그대로 그냥 외우는 거야. 이렇게 카드 패를 섞은 다음에.”

시엔이 착착 카드를 섞었다. 그리고는 한 장을 꺼내 앞면이 보이도록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위로 계속해서 카드를 쌓았다.

그렇게 한 덱을 전부 다시 쌓은 후에 뒤집고는 위에서부터 한 장씩 꺼내 보이며 말했다.

“스페이드A, 하트9, 하트3, 다이아 5, 다이아 잭······”

베른닐의 입이 벌어졌다. 시엔이 계속해서 카드를 맞춰나갈수록 베른닐의 턱이 점점 떨어져내렸다. 그렇게 카드 한 덱을 전부 맞춰보이고 나자, 베른닐의 벌어진 입은 주먹 하나는 부드럽게 들어갈 지경이 되었다.

“그걸 다 외우신 겁니까? 짧은 순간에?”

“그럼. 이정도는 기본이지.”

“이게 기본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럼. 기본. 엘모네 딜러들은 이거 다 하더라고. 그러니까 이거 못 하는 애들은 절대 이길 수가 없지.”

“하지만 이걸 어떻게······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시엔이 축 늘어진 베른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는 할 수 있어.”

“하지만, 엄두도 안 나는 일입니다만.”

“할 수 있다니까? 베른닐은 기사잖아? 사실 기사가 몸만 쓰고 무식하다느니 그런 소리 많이들 하는데, 사실 그거 아닌 거 잘 알거든.”

“도련님······”

“애초에 검술이란 게 머리 나쁘면 제대로 할 수도 없는 거니까. 그 지능이면 이것도 충분히 할 수 있어. 좋은 기억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 하다 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술이거든. 훈련이란 거야. 아니면 벌써 포기하는 거야?”

“······해보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그럼 이 덱은 선물로 줄 테니까 가서 연습하도록 해. 알겠지?”

시엔이 베른닐의 손에 카드덱을 쥐여주었다. 베른닐이 감격한 표정으로 덱을 내려다본다. 그 눈빛엔 강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아니 기사라는 놈이 뭘 보고 의지를 다져?

“그럼,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래. 연습 많이 하고.”

베른닐이 허리를 꾸벅 숙이곤 결연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쿵. 문이 닫히고 나서 시엔이 생각했다.

이상한 녀석. 겨우 쫓아냈네.

카드 카운팅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기술일 리가 있나. 이렇게 해 놨으니 당분간은 귀찮게 굴 일이 없을 터. 게다가 그동안 도박도 못 할 테고.

기분이 좋아진 시엔이 흥흥 콧노래를 흘렸다.

그리고 사흘.

베른닐이 카운팅에 익숙해지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 2. 풍운의 카지노 로얄 [1] > 끝

ⓒ Lab.No9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