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4화 (4/268)

< 1. 죽다 살더니 사람이 변했나? [3] >

어떤 행위를 했을 때 자신이 재미있으면 취미요, 타인이 재미있으면 특기라고 하던가.

천 년 전, 도박장엔 으레 망령을 노린 흑마법사 한 명 쯤은 자리 잡고 있었다. 자연스레 한 판 두 판 끼어드는 일도 흔했다. 게다가 마법사란 원체 머리가 좋은 족속들이니.

시엔은 도박은 취미는 아니지만, 직업이 직업이었던 탓에 특기라 할 정도는 되었다.

“도련님?”

“오. 베른닐. 이야. 못 알아보겠는데? 진작 좀 씻고 다니지 그랬어.”

“흠, 흠. 죄송합니다.”

“훨씬 보기 좋네. 뭐.”

씻고 오라 했더니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지저분할 때도 나름대로 준수한 미모를 자랑하던 베른닐이었다. 깔끔해지고 나니 얼굴에서 아예 빛이 났다.

아닌 게 아니라, 도박장 내에 여성 손님들의 눈빛이 뜨겁다. 마음에 드는 보석이라도 발견한 표정이었다.

“도련님, 그 어떻게 하신 겁니까?”

“어? 뭘?”

“그, 말입니다. 그거. 다 따신 겁니까?”

“그럼 뭐겠어?”

베른닐이 망연히 시엔의 칩들을 바라보았다. 대충 보기에 금화 오십 장은 되는 양이었다. 기사의 석 달치 봉급이었다.

“어, 어떻게 그렇게 따셨습니까.”

“잘. 따기만 하니까 영 재미가 없네. 다른 거 해보자.”

시엔이 도박장을 누볐다. 가는 데마다 크게 터졌다. 베른닐이 가장 비싼 검은 칩을 한아름 끌어안고 시엔의 뒤를 쫒아다녔다.

어느새 시엔을 바라보는 베른닐의 표정이 뜨겁다. 흠모의 시선이었다. 시엔이 인상을 구겼다.

살다살다 도박으로 존경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아니 애초에 기사가 제 주인을 존경하는 이유가 도박 실력 때문이면 이상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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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계속해서 크게 따는 것은 전적으로 시엔의 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도박장의 뒤편, 으슥한 통로에서 엘모가 딜러들을 일렬로 세워 정강이를 걷어찼다. 억억 숨죽인 비명과 함께 딜러들이 다리를 움켜쥐고 콩콩 뛰었다.

“병신들아, 대충 잃어주랬더니 아예 기둥을 뽑아 주고 앉았냐!”

“그게 아니라, 마스터, 저 분이 보통 실력이 아닙니다. 조금만 봐 준다 치면 확 치고 들어오셔서······!”

“시발! 그게 말이나 돼! 저 꼬마가 평생 저택 안에 틀어박힌 겁쟁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어? 도박의 도 자라도 알고 있겠냐고!”

“진짭니다. 제가 보기엔 틀어박혀서 도박만 연구한 게 아닐까······ 악! 맞은 데 또······”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말이 되는 소리를!”

딜러가 바닥을 굴렀다. 엘모의 눈이 번들거렸다.

“젠장, 얼마 잃었어?”

“아마 금화 400장 정도······”

“시발, 400? 안 돼. 금화 30개 정도 용돈 준다 생각하고 작업 쳐. 알겠지?”

“하지만 그러다 걸리면······”

“안 걸리게 해야지! 너희가 누구냐. 왕국 최고의 꾼들이잖아! 할 수 있다. 보너스 두둑히 줄 테니까 그렇게 하라고. 알겠지?”

엘모는 손이 컸다. 보너스 두둑히 주겠다면 푼돈 정도가 아니었다. 딜러들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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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령은 대개 생전 원망하던 사람이나 장소 혹은 원한을 해결해줄 만한 이에게 달라붙곤 했다. 그래서인지 도박장의 딜러들은 하나같이 망령 예닐곱씩을 이끌고 다녔다.

게임 도중, 패를 오픈하기 직전이었다.

딜러의 팔다리 하나씩을 붙들고 있던 망령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꾸물거리며 딜러의 팔목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이다.

게임의 결과는 시엔의 패배였다. 금화 30장이 걸린 큰 승부였다.

결과가 미심쩍다 싶은데, 망령의 반응을 보아하니 속임수가 있는 모양이었다. 뭐, 애초에 모든 도박장엔 속임수가 있다. 시엔이 많이 땄으니 이제 슬슬 회수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어울려 줄 필요가 없다.

“아이고. 그만 놀아야겠다.”

딜러들이 크게 당황했다.

일명 따고 배짱이다. 현명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 이후 칼을 맞아도 할 말이 없다 할 터. 하지만 누가 티란디스의 핏줄을 쑤실 수 있을까.

시엔이 도박장 한 편을 바라보았다. 포커 게임이 한창인 테이블이었다. 연미복을 차려입은 딜러 주변에 수많은 망령이 넘실거렸다. 어지간히 원망을 산 놈이 틀림없다.

물론 그래 봐야 망령은 현세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저만큼 많은 망령이 들러붙어도 그저 무지근한 피로가 쌓이는 정도가 고작.

물론 망령이 힘을 얻어 악령이 되고 나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악령은 갓 태어난 놈이라도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신관이나 흑마법사가 아니라면 고위 몬스터보다도 까다롭다.

망령은 본디 사람 모양을 했다. 온통 시커멓고,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움푹 팬 눈구멍이 자리잡았다.

이 얼마나 귀여운 형상인가. 시엔이 웃으며 딜러의 테이블에 앉았다.

“손님께도 패를 올릴까요?”

“아냐. 구경이나 좀 하자.”

시엔이 포커판을 지켜보았다.

어쩌다 한 번씩, 망령들이 딜러의 손목에 달려드는 판이 있었다. 어떤 놈은 팔을 뻗고, 어떤 놈은 딜러의 손목을 덥석 물었다.

과연. 이렇게 돌아가는 판인가. 시엔이 납득했다. 가만히 때를 기다렸다.

“레이스입니다.”

“레이스.”

“받고 더.”

“난 죽었어.”

큰 판이 벌어졌다.

금화가 테이블에 수북하게 쌓였다. 한 명이 한숨을 쉬며 다이를 선언했다. 배팅이 한 순배 돌고, 또 한 명이 죽어 빠져나갔다.

“레이스.”

“레이스 하겠습니다.”

딜러와 마른 사내가 남았다. 사내가 높은 패를 쥔 모양이다. 애써 무표정한 얼굴에 드문드문 환희가 새어나온다. 저 실력으로 포커라니.

레이스. 레이스. 레이스. 레이스. 금화가 탑처럼 쌓였다. 어마어마한 판돈이 걸렸다. 도박장의 이목이 테이블에 쏠렸다. 모두 주목하는 한 판.

시엔은 딜러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딜러에게 달라붙은 망령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망령들이 딜러의 팔목을 잡고 요동치고 있었다.

체크. 체크. 마침내 딜러가 오픈을 선언했다. 패가 공개될 차례였다.

“그럼 오픈하겠습니다.”

“잠깐.”

시엔이 끼어들었다.

“내가 카드를 좀 열어봐도 될까?”

“예? 손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만.”

“왜. 내가 무슨 수작이라도 부릴까 봐? 왜. 걱정하지 마. 티란디스의 명예를 걸지.”

시엔이 티란디스를 입에 담았다.

딜러가 한 편을 바라보았다. 제 상급자에게 어쩌느냐 도움을 청했다. 도움을 청하는 시선이 선배 딜러로, 그리고 또 그 선배 딜러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끝에 엘모가 있었다. 엘모가 똥 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시 몇 명이 순서대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시엔에게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아.”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딜러의 패를 순서대로 뒤집었다. 한 쌍의 같은 숫자. 원 페어. 포커에서 두 번째로 약한 패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오! 크하하핫! 내가 이겼어! 내가 이겼다고!”

마른 사내가 환호했다. 사내의 패는 풀하우스. 사내의 승리였다. 사내가 금화를 끌어안았다. 백 개가 넘는 금화의 산이었다.

시엔이 딜러에게 달라붙은 망령들을 살폈다.

망령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귀까지 찢어진 주둥이가 위아래로 떨렸다. 웃는 모습이다. 망령들이 기뻐 날뛰었다. 음차원 에너지를 사방으로 내뿜는다.

시엔이 흐뭇하게 웃었다. 심장에 새긴 씨앗이 음차원 에너지를 게걸스럽게 빨아먹었다. 이렇게만 하면 어둠의 씨앗도 금방 싹을 틔우리라.

시엔이 도박장을 누비고 돌아다녔다. 그러다 한 번씩 끼어드는 판에 어김없이 딜러의 패배가 이어졌다. 망령들이 기뻐하고, 시엔의 마력이 쑥쑥 늘어났다.

덕분에 돈을 딴 손님들이 연신 술을 건넨다. 공짜 술이 맛이 좋다. 시엔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하플링 한 명은 불행해졌다.

엘모가 시엔의 앞에서 손바닥을 비볐다. 비굴한 눈빛을 보내고, 허리가 펴질 줄을 몰랐다.

“헤헤, 나으리이. 뭔가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아. 소인이 좋은 곳으로 모셔도 되겠습니까아.”

“아냐. 그런 건 아니고.”

“헤헤. 그렇습니까아. 아이고오, 생각해 보니 귀한 분께 제대로 대접해드려야겠습니다요. 얘들아, 뭐 하고 있니!”

엘모의 부름에 어디선가 여자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었다. 전부 헐벗은 여자들이었다.

“나으리,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으십니까? 말씀만 하시면, 아니지. 아닙니다요오. 하나로 되겠습니까아. 이 아이들 전부 나으리 시중을 들 터이니······”

엘모가 필사적으로 손바닥을 비볐다.

티란디스 가의 이름 모를 도련님은, 어떻게 알았는지 직원들이 작업을 칠라 하면 귀신같이 끼어들어 방해를 놓았다. 벌써 손해가 막심했다. 그러니까 이쯤 봐 달라는 뜻이었다.

“그래? 그럼 그럴까?”

엘모가 시엔을 안쪽의 방으로 안내했다. 넓지는 않았으나 내부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시엔이 소파에 몸을 던지자, 여인들이 양옆으로 달라붙어 교태를 부렸다.

그 뒤로 베른닐이 꼿꼿하게 자리를 지켰다. 시엔이 고개를 꺾어 베른닐을 바라보았다.

“베른닐도 좀 놀아. 그러고 있지 않고.”

“아닙니다. 호위의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흠. 그래?”

얘는 또 왜 이런담. 시엔이 갸웃거렸다. 여기 올 때 까지만 해도 지저분하니 건들거리는 용병처럼 굴더니. 씻고 오더니 갑자기 기사가 되었다.

‘뭐. 그렇다는데야.’

시엔이 베른닐에게 관심을 끊고 엘모를 바라보았다. 잔을 내밀자, 엘모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술병을 기울였다.

“이봐, 엘모.”

“예, 나으리.”

“내 이름, 뭔지 알아?”

“헤헤, 미천한 소인은 모릅니다요오.”

“알고 싶어?”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그런 마음을 품겠습니까. 그저 티란디스의 그림자 아래 있는 이로서 성심을 다할 뿐이지요오.”

도박장이란 사실 귀족이 대놓고 드나들만한 공간은 아니다. 엘모의 대답은 그의 방문을 없던 일처럼 하겠다는 뜻이었다.

시엔이 웃었다. 그러면 안 되거든.

“시엔 티란디스. 그게 나야. 알지?”

“아. 어, 예, 예. 아니, 소인은,”

엘모가 당황했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따르던 술이 넘치고 말았다. 시엔의 처지를 안다는 뜻이었다. 하기야, 후작가의 멍청하고 무능한 자식 놈에 대해서야 도시에서 힘 좀 쓴다면 모를 리가 없을 터.

시엔이 잔을 놓으며 말했다.

“이봐, 엘모. 우리 도박 한 게임 할까?”

“그, 어떤 말씀이신지요.”

“주사위 있잖아 주사위. 잘 굴리는 애 한 명 불러와 봐. 딱 한 판만 하자고.”

“말씀 받들겠습니다아.”

엘모의 손짓에 이내 딜러가 방에 들어왔다. 꾸벅 인사를 올린 딜러가 시엔을 바라보았다.

주사위 게임은 간단했다.

딜러가 컵 안의 두 개의 주사위를 흔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그럼 손님들이 그 숫자에 돈을 걸면 되는 게임이었다.

배팅은 자유자재였다. 한 개 숫자에 걸 수도 있고, 짝수나 홀수, 3의 배수나 4의 배수, 아니면 2-5 이런 식의 구간 배팅도 가능했다.

“너랑 나랑 하는 게임이니까, 판돈하고는 별개로 룰을 하나 추가하자고. 내가 숫자를 맞추면 이기는 거고, 틀리면 엘모가 이기는 거지.”

엘모는 당황했다.

소문에 의하면 시엔 타란디스라는 도련님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유약하고 소심하기 짝이 없어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하는 위인이라더니.

“그럼 난 일에 걸지. 숫자 일 말야.”

“아니, 나으리이. 숫자 일에 건단 말씀이십니까아. 혹여 게임을 잘못 알고 계신건 아니신지······.”

“맞아. 숫자 일.”

주사위 두 개를 굴리면, 최소한 2의 숫자가 나왔다. 시엔의 배팅은 말이 안 됐다.

“하지만 나으리······”

“엘모. 도박장 굴리려면 속이 좀 타겠어?”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오.”

“에이. 왜 그래. 아버지가 털겠다 마음먹으면야 언제든 털 수 있는 게 도박장 아냐? 그렇지?”

“예, 그렇습죠. 예.”

“그럴 때 편들어 줄 사람 하나 있으면 좋지 않을까?”

“헤헤, 헤······”

“신중하게 생각을 해 봐봐. 그리고 생각 끝나면 주사위 한 번 흔들어 보자구.”

엘모의 표정이 굳었다.

엘모가 지금까지의 비굴한 안색을 지우고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키 작은 하플링이 시엔의 눈치를 한 번 보고는, 술 한 잔을 한 입에 전부 들이켰다.

마침내 딜러가 주사위를 들었다. 컵속에 주사위 두 개를 털어넣고는 위아래로 열심히 흔든다. 차륵차륵 주사위 구르는 소리.

탁. 딜러가 테이블에 컵을 엎어놓았다.

“나으리, 바로 오픈하면 되겠습니까?”

“아니 잠깐만. 그래도 도박에 판돈이 빠지면 쓰겠어?”

시엔이 베른닐에게 말을 걸었다.

“베른닐. 내가 듣기로는 도박장에서 많이 잃었다고 들었는데. 그게 얼마정도 돼?”

“······주렌 금화 백 개는 넘을 겁니다.”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르고?”

“······122개 정도입니다.

“헤에. 많이 잃었는걸. 돈 들고 있지? 금화 네 개만 꺼내 봐.”

시엔이 주렌 금화 네 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내 판돈. 숫자 하나만 골랐으니, 내가 이기면 서른 배야. 맞지?”

“헤헤, 맞습니다요, 나으리.”

“그럼 열어 보자고.”

“헤헤. 알겠습니다요. 뭐해 이것아, 당장 열어보이지 않고.”

딜러가 컵을 들었다.

주사위 한 개의 눈금은 1. 나머지 한 개는 다른 주사위 아래에 깔렸다.

“내가 이겼네?”

“그렇습니다요. 나으리 축하드리겠습니다.”

“뭘 축하까지. 됐고. 한 잔 줄 테니 받아.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뜻이야.”

“아이고오, 영광입니다아.”

“자. 건배라도 한 번 할까?”

시엔이 잔을 부딪쳤다. 자금줄이 생긴 기념이었다.

< 1. 죽다 살더니 사람이 변했나? [3]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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