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죽다 살더니 사람이 변했나? [2] >
기사단에서 보내준 호위 기사는 첫인상부터 엉망이었다. 눈 밑에 낀 짙은 기미, 아무렇게나 자란 거친 수염, 떡진 머리카락에 개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얼굴까지.
일주일은 안 씻은 꼴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도련님. 오늘부터 호위를 맡게 되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생긴 놈이기도 했다. 저 꼴을 하고서도 태가 나는 얼굴을 보니 태생부터 어지간히 미모를 타고 난 놈이었다.
그러나 기사가 얼굴로 승부하는 작자들이던가. 자기 관리는 기사의 미덕이다. 이래서야 저는 하자가 있습니다 하고 외치는 꼴이었다.
“경은?”
“베른닐 스타돌입니다.”
“좋아, 스타돌 경. 잘 부탁해.”
“그, 편히 베른닐이라 부르시면 될 겁니다.”
“그래. 베른닐.”
시엔은 부러 웃으며 기사를 맞이했다. 어쨌거나 자신을 지켜줄 칼이 아니던가.
나름 사연이 있는 녀석일 수도 있고.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리라.
그래도 영 기사답지 못한 녀석이었다.
‘창공 기사단이 가문 최고라더니. 인물이 이렇게 없나.’
구부정한 어깨에 자신감 없는 태도라니.
그렇다고 뭐 어쩌랴. 이제와 돌려보내기도 뭐한 노릇이니. 시엔이 그렇게 영지 시찰에 나섰다.
일단은 시장. 도시를 살피는 데에 시장만한 곳도 없으니.
티란디스 가의 직할도시 체른노아는 상업의 요지였다. 시장은 그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장소였다.
과일이며 잡화, 장식 따위를 파는 좌판이 이어졌다. 사방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들끓는다.
웃으며 걷는 연인들, 아이의 손을 잡은 여인, 지저분한 무장을 한 용병, 걸인, 상인, 순찰중인 병사 등등. 멀지 않은 곳에 소매치기라고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 사이를 짐수레가 비집고 돌아다녔다. 마차 네 대는 나란히 달릴 넓은 길이 가득 차 미어터졌다.
시엔이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연 천 년 후의 세상인가. 새삼 시간이 지나 발전한 성세에 놀랄 수밖에 없다.
특히 이 겨울에 사과라니.
물론 그의 생전에도 한겨울 사과를 맛 볼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게 길거리 좌판에 널려 있지는 않았으니. 그만큼 저장 기술이 발달했다는 뜻이었다.
시엔이 사과를 한 입 물었다.
오랜 시간 저장되어 있던 사과는 모래가 뭉쳐 있던 마냥 버석버석하게 입안에서 흩어졌다. 시엔이 사박사박 금세 사과 한 알을 해치웠다.
심만 남은 사과를 어찌 버릴까 하다, 딱히 묘수가 있지는 않아 그냥 베른닐에게 넘겼다.
사과심을 공손히 받아드는 베른닐의 표정이 떫다. 시엔이 키득거리며 입을 열었다.
“베른닐. 빈민가로 가 보자.”
“빈민가? 천막촌 말씀이십니까?”
“천막촌. 그럴 듯한 이름이네. 여튼 거기.”
흑마법사는 암울한 곳을 좋아했다. 그런 곳에 망령이 자리를 잡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망령이 뿜는 음차원 에너지는 흑마법사의 성장 동력이 된다.
“도련님께서 가시기엔 조금······”
“조금 뭐?”
“그게,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놈들이다보니 도련님께서 위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에이. 베른닐이 옆에 있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베른닐이 뒷통수를 벅벅 긁었다. 기사의 뒷덜미로 후두둑 내려앉는 흰 가루들을 보며, 시엔이 마음을 바꿨다.
아무래도 미덥지가 않은 녀석. 이런 녀석에게 안전을 맡기기는 아무래도 탐탁지가 않다.
“그럼 됐고. 어디 보자.”
베른닐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 시엔은 머리를 굴렸다. 망령이 바글바글할 그런 장소가 어디 없을까. 폐가나 묘지, 아니면······.
고민은 길지 않았다. 시엔이 웃었다.
“베른닐, 혹시 아는 도박장 없을까?”
“예? 어, 도박장 말씀이십니까?”
“어. 도박장 말씀이시다. 알아?”
“저기, 그것이······”
베른닐이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하기사, 기사를 붙들고 도박장이 어디냐 물어본들 알 리가 없지 않은가.
기사적인 생활이란 도박하곤 가장 거리가 멀다. 아무리 하자 있는 녀석이라고 해도 도박장이 어디인지 알 리가 없었다.
“됐다. 뭐, 찾아보면 어디 있겠지.”
도박장은 생전에도 자주 다녔다. 모든 도박장엔 망령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멀쩡하던 놈도 도박에 빠지면 처자식을 파는 말종이 되는 곳. 결국 제 인생 버리고 딸린 인생을 함께 무너뜨리는 것이 바로 도박이니.
그래서 도박장엔 항상 망령이 우글거렸다. 도박에 무너져 죽어간 이들은 억울하다. 제 잘못은 생각지 않으니 도박을 증오했다. 증오가 망령을 만들고 도박장에 들러붙었다.
“그, 도련님?”
“놀 데 많은 데로 가자. 술집이랑 모여 있는 데 있잖아.”
도박장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고급 주점이 몰린 유흥가. 호객꾼 하나를 붙잡고 물어보니 대번에 대답이 돌아왔다. 은화 한 개에 호객꾼이 공손하게 앞장을 섰다.
위로 4층에 이르는 호화로운 주점. 내부에 자리잡은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자 녹이 슨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키고 서 있던 우락부락한 사내 둘이 말없이 철문을 열었다.
역한 냄새가 훅 끼쳤다.
담배 연기로 뿌연 실내에 땀과 술, 여자의 냄새가 가득했다. 테이블에 달라붙은 사람들은 일부는 웃고 일부는 침통하다. 무릎을 꿇고 빌던 치가 육중한 건달에게 질질 끌려나갔다. 소파에 앉은 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 낄낄거렸다. 어김없이 옆구리에 여자를 꿰찬 놈들이었다.
교성이 울린다. 중년의 여인이 애띤 소년을 댓 명이나 끼고 황홀경에 이르고 있었다.
도덕도 수치가 없는 공간이었다.
“호오.”
시엔이 감탄했다.
망령들이 우글거렸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검게 일렁이는 망령이 들끓었다. 테이블 밑에, 누군가의 등 뒤에, 방의 구석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망자들이 가진 음차원의 에너지가 밀도 높게 회오리치고 있었다. 이 장소에 있는 것만으로도 신체에 음기가 서리고 있었다. 심장에 박힌 어둠의 씨앗이 요동을 쳤다.
시엔의 현재 경지는 파종. 어둠의 씨앗을 품고 가장 기본적인 흑마법만을 다루는 단계였다.
‘좋아. 금방 싹을 틔우겠는걸.’
발아. 흑마법의 다음 경지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암흑 마도가 펼쳐졌다. 세분화된 흑마법의 여섯 계파가 나뉘는 시기이기도 했다.
시엔이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얄상하게 생긴 사내가 건들거리며 다가와 베른닐을 향해 이죽거렸다.
“이게 누군가. 기사 나으리 아냐?”
“빌어먹을 자식이······”
“어허. 빌어먹는 건 자네고. 왜, 저번처럼 한 번만 물러달라 무릎을 꿇지 않았나. 또 기부하러 왔나 보지? 자네는 호구라니까 이 친구야. 나 같으면 진작에 발길 끊었어.”
으득. 베른닐이 이를 갈았다. 사내를 바라보는 눈빛이 사납다.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사이가 좋고 나쁘고 이전에.
시엔이 황당한 표정으로 베른닐을 바라보았다. 이 기사가 하자 있는 거야 한눈에 알아봤지만, 하다하다 도박에까지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다.
도박장이 어디냐 물었을 때 보이던 그 반응. 몰라서가 아니라 차마 말할 수가 없어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쯧쯧. 시엔이 기가 막혀 혀를 찰 때였다.
“옆에 이 애송이는 뭐야? 물주라도 잡은 모양이지? 부잣집 도련님 같은데. 어린 친구야. 요 덜떨어진 기사가 종자라도 시켜 주겠다고 했나 봐? 그만두는 게 좋을 텐데.”
이죽거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시엔이 베른닐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터지기 직전이다.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날 표정. 용케도 잘 참고 있었다.
덜떨어진 녀석 같으니. 이런 걸 기사라고.
시엔이 입을 열었다.
“야.”
“도, 도련님.”
“왜 참아?”
“예?”
“왜 참냐고. 저게 누구한테 입을 터는데.”
이 때의 베른닐의 표정이란!
흰 이를 드러낸 상쾌한 웃음과 함께, 베른닐이 사내의 귀 아래를 후렸다.
빡! 찰진 소리. 사내가 쓰러졌다. 베른닐의 발길질이 이어졌다. 억, 억. 신발이 틀어박힐 때마다 숨 새는 비명이 터졌다. 베른닐의 표정이 밝다.
비명과 함성이 동시에 터졌다. 죽여! 박살을 내 버려! 누군가 고함을 지르고 휘파람을 불었다.
“젠장, 도련님!”
“뭐 해! 빨리 끌어내!”
어디선가 우락부락한 덩치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덩치들이 베른닐에게 달려들었다.
“오.”
시엔이 감탄했다.
베른닐은 날렵하고 사나웠다. 우락부락한 가도들이 몽둥이질은 전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피하고 치고 잡고 꺾고 던지고 메치는 일련의 동작이 하나로 계속 이어졌다.
덩치들이 연신 날았다. 애꿎은 테이블이 와장창 박살이 났다. 베른닐의 팔꿈치와 주먹, 어깨 무릎 발 어디 한 군데 노는 곳이 없다. 아무렇게나 뻗는 일격이 빠짐없이 급소에 틀어박혔다.
덩치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실력은 있네?’
하자뿐인 줄 알았더니 실력이 있었다. 저 실력 덕분에 가까스로 기사 작위를 유지하고 있는 모양이지.
그 때였다.
“이게 무슨 짓이야!”
뒤늦게 나타난 염소수염을 한 난쟁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인간 절반 정도의 키를 가진 난쟁이. 하플링이라 불리는 종족이었다.
“베른닐!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줄 알아! 당장 경비대를 부를 줄 알아! 그 알량한 기사 작위도 이제 끝이야!”
베른닐이 모욕을 꾹 참고 있던 이유였다. 확실히, 기사라는 작자가 도박장에서 소란을 일으켰다간 작위가 날아가도 할 말이 없는 일이기는 했다.
물론 기사가 제 주인을 모시는 상황이 아닐 때에만 해당되는 일이다.
짝짝. 시엔이 손뼉을 쳤다.
하플링이 그제야 시엔을 발견했다.
하플링의 어깨가 슬그머니 움츠러들었다. 눈치가 빠른 녀석이었다.
“그, 도련님께선 혹시······.”
“저 녀석이 날 모욕했어. 티란디스의 앞마당에서 그러기엔 간덩이가 많이 부운 것 같던데. 뭔가 문제라도 있어?”
“아이고오! 나으리. 오해십니다아!”
티란디스의 앞마당. 내 기사. 못 알아듣는다면 이만한 도박장을 꾸릴 자격이 없으리라.
하플링이 꼽추 행세를 했다.
시엔이 피식 웃었다. 어깨를 두드려 줄 요량이었으나, 작은 키에 허리까지 굽힌 하플링의 어깨가 너무 낮아 그만두었다.
“오해라. 오해 좀 할 수 있지.”
“헤헤, 바다처럼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요.”
“그래. 뭐 문제라도 있나?”
“그럴 리가요. 아아무 문제 없습니다아. 그렇구말구요.”
“말귀가 밝아서 좋네. 넌 누구야?”
“소인 엘모라 합죠. 헤헤. 누추한 사업을 하고 있습죠.”
“그래. 엘모. 그런데 저건 뭐야?”
시엔이 베른닐에게 얻어맞은 사내를 가리켰다.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이 부풀어 두 배가 되었다.
“저놈은 엘리엇 제이콥이라고 제이콥 상단의 망나니로 유명한 놈이고, 나머지는 아마 호위로 붙은 용병들입죠.”
“제이콥 상단이라. 내가 굳이 신경 쓰긴 싫은데. 저런 놈도 내 영민이라 다친 꼴을 보니 신경이 좀 쓰이기도 하고.”
“헤헤, 소인이 치료해 돌려보내겠습니다요.”
“너 마음에 드네. 난 그냥 조용히 놀다 갈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무슨 뜻인지 알지?”
“암요. 그렇구말구요.”
엘모는 쓸개라도 빼다 바칠 기세였다. 엘모가 나서서 정리하자 소동은 언제 있었냐는 듯 다시 향락이 시작되었다.
“흠. 베른닐.”
“예 도련님.”
시엔이 베른닐을 바라보았다. 방금의 소동에도 불구하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물론 땀만 안 흘렸다 뿐이지, 안 그래도 떡진 머리카락이 휘날려 비죽비죽 엉망이었다.
시엔이 혀를 쯧쯧 찼다.
“일단 좀 씻고 와. 그게 뭐야 꼴이. 대충 씻지 말고 아예 목욕까지 싹 해. 무슨 말인지 알지?”
< 1. 죽다 살더니 사람이 변했나? [2]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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