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죽다 살더니 사람이 변했나? [1] >
제국이 멸망했다. 천 년 전의 일이었다.
재앙.
왕국들이 두려워해 역사를 지웠다고 하던가. 요 며칠간의 독서를 통해, 흑마법이란 개념 자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재앙이란 자신을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복수를 끝낸 셈이었다.
제국은 끝났다. 황가는 황궁과 함께 불탔단다. 왕국의 망령들은 기뻐 노래하며 승천했을 테지.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그저 타란디스 후작가의 수치, 시엔 타란디스가 남았을 뿐이었다.
“뭐. 새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미 벌어진 일을 후회하지 말자.
이번 삶에는 편안히 마법 연구나 할까.
재림 후 일주일. 더 이상 전쟁도 없고 원망도 없는 편안한 시간이었다.
한 가지만 문제만 빼면.
밖이 소란스럽다 싶더니 방문이 벌컥 열렸다. 우르르 쳐들어온 하인들이 대야를 놓고 커튼을 걷었다. 이불을 걷고 침대보를 개키는 손길이 분주하다. 열린 문 바깥에서 하인들이 걸레며 밀대 따위를 열심히 휘둘러댔다.
후작저에 대청소를 벌이는 모양이었다.
“어휴, 좀 비켜 주시죠. 안 보이세요?”
어어, 하는 사이에 의자가 뒤로 빠졌다. 앉은 채로 책상에서 멀어진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녀가 펼쳐진 책들을 제멋대로 덮어 하나로 쌓고는 걸레질을 시작했다.
이건 또 뭐야?
주인 허락도 없이 제 집 마냥 쳐들어온 모양새에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귀족이냐 아니냐를 떠나 한 사람에게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이게 바로 문제였다.
후작가의 핏줄은 물론이요, 가신이며 심지어 하인들까지 시엔을 무시했다.
그러나 이제 그 시엔은 이 시엔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참아왔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야.”
시엔이 하녀를 불렀다. 저를 짐짝처럼 책상에서 빼냈던 그 하녀였다. 하녀가 인상을 쓰며 돌아보는 순간, 시엔이 팔을 휘둘렀다.
짝! 시엔이 뺨따귀를 야무지게 올려붙였다.
하녀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 뺨을 감싸 쥔 하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쯧.”
화를 참는 하녀를 보며 시엔이 혀를 찼다. 이 상황에서 제가 억울한 얼굴을 한담. 맞을 짓을 하고 맞았으면 반성을 해야지.
어떤 심정인지는 뻔했다.
억울하겠지. 잘못 없이 얻어맞았다고 생각할 테니. 지금까지 항상 이렇게 해왔으니 문제가 뭔지 몰랐겠지. 시엔은 이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이었을 테니까.
그런데 이제부턴 아니다.
그걸 가르치는 것도 주인의 의무리라.
“채찍.”
“예?”
“채찍 말이야. 가져오라고. 당장.”
“아, 알겠습니다.”
지목된 하인이 부리나케 뛰쳐나갔다.
갈 때는 혼자더니 돌아올 때는 둘이었다. 콧수염을 기른 저 중년, 기억에 의하면 집사를 하는 치다. 채찍을 가져오랬더니 집사를 데려왔다.
“도련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집사는 교육을 하긴 해? 아니, 집사 잘못은 아닌가? 노크. 인사. 자리 좀 비켜주세요. 이 한마디. 이게 굳이 배워야만 할 수 있는 어려운 일이었나?”
“그, 도련님. 일단 진정하시고. 아이들이 아직 어려 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제가 단단히 혼내둘 터이니 노여움을 거두시고······.”
“혼내? 집사. 저거 좀 봐봐. 아직도 잘못했다는 소리 한 번이 안 나와?”
“아이고, 이것아! 뭐 해. 빨리 용서를 빌지 않고!”
“자, 잘못했습니다. 용서를······”
그제야 하녀가 용서를 빌었다. 시엔이 코웃음을 쳤다. 옆구리 찔러서 절 받아봐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됐고. 채찍 어디 있어?”
“도련님. 그러지 마시고. 아이고, 소인이 교육을 단단히 해 놓겠습니다. 이만 노여움을 거두어 주시면.”
“집사도 내 말이 우스워?”
시엔이 미소지었다. 아주 사나운 미소였다.
집사가 흠칫 몸을 떨었다. 집사가 알던 유순한 여섯째 공자가 아니었다. 죽다 살더니 이제 막 나가기로 한 것일까. 피는 못 속인다더니, 후작이 진심으로 화를 낼 때면 저런 표정이 되었던 것 같다.
“······뜻대로 하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집사님! 자, 잘못했어요. 한번만 봐 주세요, 네?”
“저것 봐라. 정신 못 차렸잖아.”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지금 매달려야 할 대상은 집사가 아니었다. 은연중 누가 상전인지 그 속을 뻔히 비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잡아. 시엔의 말에 하인들이 하녀를 붙들었다. 고개를 흔들고 몸을 뒤틀어보지만, 장정들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기어코 하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잘못했다느니 한 번만 용서해 달라며 울부짖었다.
시엔이 채찍을 살폈다. 가죽끈 끝에 날카로운 철추가 달렸다. 여기에 맞으면 살점이 뭉텅이씩 떨어질 터.
따끔하게 혼내 줄 요량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사람 잡는 물건을 가져다주면 어쩌라고.
철추는 반짝거리고, 가죽끈은 낡았으나 핏자국 하나 없다. 실제로 한 번도 쓰인 적이 없는 물건이 아닌가.
“쯧.”
시엔이 채찍을 집사에게 내밀었다. 집사가 냉큼 받아들었다. 집사가 안도했다.
“교육 좀 잘해.”
“옛! 제가 아주 단단히 버릇을 잡아놓겠습니다.”
“알아서 하고. 쟨 이제부터 빨래나 시켜”
“아, 알겠습니다.”
집사가 대답하고, 하녀가 몸을 떨었다.
신체 건장한 노예들이나 하는 중노동이 빨래다. 특히나 이런 겨울엔 가혹하다 할 수준이었다. 차가운 얼음물을 종일 뒤집어쓰며 빨래를 치대는 일이었으니.
이 정도 벌이면 충분하리라.
“뭐 해? 하던 일들 마저 해.”
시엔이 팔을 내저었다.
하인들이 시엔의 눈치를 살폈다. 자칫 심기를 거스르랴 조심하는 모양새가 아주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좀 하인 같은 모양새가 나왔다.
시엔이 만족했다.
----
저녁엔 웬일로 만찬에 참석하라는 티란디스 후작의 전언이 있었다.
시엔은 지금까지 만찬에 참석하지 않았다. 하인이 늦게 가져다주던 차가운 음식을 먹었다. 혼자 먹는 일이야 익숙했다.
다만 온기라곤 찾을 수 없는 식은 요리에 물려가던 참이라 선선히 만찬에 나섰다.
시엔은 재림 후 처음으로, 이 몸뚱이의 가족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근엄한 표정의 티란디스 후작. 양옆으로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이 자리를 잡았다.
장녀 카레네는 꼿꼿하고, 장남인 로우드는 건들거렸다. 그리고 그와 시엔의 사이에 세 명. 시엔은 후작의 여섯 번째 자식이었다.
화려하게 차려진 만찬과는 달리 분위기는 무거웠다. 어색한 침묵이 맴돌 뿐이었다.
달그락달그락.
그 사이로 연신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시엔이 내는 소리였다. 귀족의 식사에서 대화 말고 다른 소음은 금기였다.
“이거 괜찮은데. 더 가져와 봐.”
식사 시중을 드는 하인이 접시를 받아 수프를 담아 대령했다. 지금은 한겨울, 저택은 장작을 하루종일 때도 싸늘했다. 따뜻한 수프가 사르르 속을 녹였다.
“흥, 나이가 얼만데 아직도 스푼 쥐는 법도 모르고. 경박하게 저게 뭐람. 하여간 창피해서.”
후작의 둘째 부인 라니아였다.
뻔히 시엔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시엔이 히죽 웃어 보였다.
“저, 저! 여보, 저것 좀 봐요. 어른이 이야기하는데 들은 척도 안 하고. 어쩜 버르장머리라곤 하나도 없이······!”
라니아가 후작에게 쫑알거렸다.
시엔이 어떻게 하겠냐는 듯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식사를 이어갈 뿐이었다.
죽은 이의 기억 속 꽤 흔한 장면이었다.
후작은 이런 일에 나서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라니아는 매번 제 남편을 붙들고 떠들며 시엔을 욕했다. 그럴 때면 시엔은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만 떨구고 있던 모양이다.
물론 그 병신은 이미 죽고 없지만.
시엔이 보란 듯이 접시를 긁었다.
끼이익. 금속이 부대끼는 소리. 신경을 할퀴는 더러운 소음이었다.
“시엔!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는 중이다!”
라니아의 아들, 후작가의 장남인 로우드 타란디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엔을 대하는 후작가 사람들의 태도는 둘 중 하나였다. 적극적으로 괴롭히거나, 혹은 무시하거나. 저 모자는 전자였다.
죽은 이는 그 패악을 전부 묵묵히 받아냈다. 왜? 외로움 때문에. 언젠가는 저 모자도 저를 한 가족으로 대해 줄 날이 오지 않을까 하고.
멍청하고 불쌍한 녀석 같으니. 그러니까 차이고 자살이나 하지. 시엔이 킥 웃음을 터뜨렸다.
“시엔!”
“너, 이 자식!”
“왜 아버지 계신 자리에서 큰소리를 내고 그래요? 어머니께서 교양 없이 혼잣말하시는 줄 알았는데 저 들으라고 하신 말씀이었나 봐요.”
라니아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로우드가 제 어미 대신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 자식이 죽겠다더니 이젠 미쳤냐? 당장 어머니께 사과드리지 못해?”
“니에, 니에. 그러죠, 뭐.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가 뭔가 잘못을 하긴 했겠죠. 그러니까 죄송하네요. 됐죠?”
“이런 개자식이! 감히 어머니께······!”
“개자식? 나? 내가 개자식이면.”
시엔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후작을 바라보았다. 개자식의 아비는 개가 되는 거 아니냐. 로우드가 당황해 버벅거렸다.
“아, 아버지. 저, 저는 그런 게 아니라······.”
“식사 중에 무슨 소란이냐. 올라가거라.”
로우드가 고개를 떨궜다. 쫒겨나 물러나면서도 시엔을 노려본다. 시엔이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얘, 로우드야! 아니, 여보, 어찌 로우드만 가지고 그러시나요. 잘못은 전부 저 교양 없는······.”
“그만.”
“하지만, 당신. 저것이······”
“그만하라 했소.”
라니아가 불퉁하니 스푼을 탁, 내려놓곤 후작을 노려보았다. 후작이 눈길도 주지 않자, 결국 제 화를 못 이겨 휙 나가버리고 말았다.
그 와중에 시엔을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자간이라 하는 짓도 똑같은가? 시엔이 마찬가지로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까드득 이를 갈며 퇴장하는 것이 자식하고 판박이였다. 어쩌면 모자가 나란히 잇병이 걸리는 꼴을 볼지도 모르겠다. 시엔이 키득거렸다. 후작이 그런 시엔에게 한 마디 툭 던졌다.
“오늘 소란이 있었다고 들었다.”
“소란이랄 것도 아닙니다. 하인이란 것들이 버릇이 나쁘던데요.”
“내 앞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는 기분이야. 죽다 살더니 독기가 좀 생겼나.”
“죽다 살아요? 아뇨. 후작님이 알던 시엔은 이미 죽었죠. 불쌍하게.”
“내가 알던 시엔이 죽었다? 그놈 참.”
시엔은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후작의 얼굴엔 균열이 번졌다.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 벌어진 입술 사이로 이가 드러났다. 크큭, 크하하하. 거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래야지. 네게도 결국 타란디스의 핏줄이 흐르고 있었어. 내 아들이라면 그정도 독기는 있어야지. 멍청한 자식이 죽고 제대로 된 아들이 생겼다면 축하할 일이겠지.”
후작은 시엔의 말이 일종의 각오 비슷한 것이야 여긴 모양이었다. 그러니 저리 흡족해 할 수밖에.
“내일부터 주에 두 번 영지 시찰에 나서라. 기사단에서 호위를 보내줄 것이다만, 임시일 뿐이다. 제 사람은 알아서 만들어야지.”
“으흠.”
“으음······”
식탁 여기저기서 잡음이 일었다. 헛기침이나 아니면 신음성 따위였다. 후작가의 피붙이들은 불편한 표정이었다.
시엔은 이제껏 하는 일이 없었다. 기사를 가지지 못했고, 제 하인도 없었다. 이제부터는 아니었다.
시엔은 가문의 승계 권리를 가진 후보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시엔이 대답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이 가문을 잇는다면? 새파란 타인에게 넘겨주고 만 셈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때 후작은 어떤 표정일까.
‘뭐. 하는 거 봐서.’
시엔은 그저 편안한 일생을 즐길 수도 있다. 먼저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과거 그 강대했던 제국과 대적한 이가 여기에 있다. 고작 가문 계승을 건 아귀다툼이야, 뭐.
< 1. 죽다 살더니 사람이 변했나? [1] > 끝
ⓒ Lab.No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