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는 이야기 >
왕국이 불탔다. 항복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작은 왕국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본보기였다.
제국에게 대항하지 마라. 폐허마저 파헤쳐 벽돌 한 장 남지 못하리라. 대륙의 모든 왕국에게 전하는 제국의 경고였다.
왕국에는 특별한 왕자가 있었다.
선천적으로 어둠을 타고난 왕자. 고산맥의 신비주의자들에게 능력의 사용법을 배우다 화를 면했다. 왕국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왕자가 뒤늦게 돌아왔을 때, 망령들이 그를 반겼다. 피눈물을 흘리는 망령들이었다.
-복수를! 복수를! 복수우우우!
-죽여라! 부숴라! 불태워라! 제국에 파멸을!
시간이 흘렀다. 왕국의 참사도 잊혀져 갈 즈음, 한 명의 흑마법사가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제국의 요새가 차례로 파괴되고, 두 개 군단이 사라지고 나자 누구도 비웃지 못했다.
제국은 승리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겨우 한 명. 단 한 명을 상대로 제국의 반이 스러졌다.
그래서 처형식은 더욱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수십만 군중 앞에서 흑마법사의 목이 잘렸다. 커다란 함성이 터졌다. 제국민이 그토록 바라던 전쟁의 결말, 악몽의 끝이 찾아왔다.
그때. 흑마법사의 머리가 눈을 떴다.
함성이 멎었다. 지독한 침묵이 제도 광장에 내려앉았다.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하는, 숨조차 쉴 수 없는 공포 때문이었다.
머리가 입을 열었다.
나는 아직 패배하지 아니하였고,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후 세상 가장 비통하게 죽은 자가 되살아나리라. 그때 제국에 속한 모두, 뼛조각 하나 없이 세상에서 사라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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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숨이 터졌다. 고통이 치밀었다. 바늘 수천 개가 폐를 긁는 듯한. 그럼에도 한 번 죽었던 몸이 격렬하게 산소를 찾았다.
“헉, 허억, 허억!”
그는 통증을 받아들였다. 통증은 익숙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볼 정도는 되었다.
최소한의 가구들이 놓인 방 안. 그는 커다란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표정들이었다. 경악과 혼란.
그는 이해했다.
가장 비통한 죽음을 맞이한 자가 되살아나리라. 사자 재림의 술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죽은 이가 살아났으니 놀랄 법도 하겠지.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중년 사내가 방 안으로 들이쳤다. 중년 사내가 그를 발견하곤 인상을 찌푸렸다. 이내 서슬 퍼런 호통이 터졌다.
“시엔! 이 놈!”
시엔. 이 몸의 주인인가. 그렇다면 시엔이 되리라.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제국에게 복수를. 그래서 죽음마저 포기했다. 사람이 마땅히 누려야 할 안식을 포기하고 타인의 몸으로 되살아났다.
강대했던 마력은 전부 날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머지않은 시간 안에 힘을 되찾으리라. 제국을 불태우고 말리라.
시엔이 웃었다. 살기 어린 미소였다.
그러자 중년 사내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웃어?”
짝! 중년 사내가 시엔의 뺨을 후려갈겼다.
“가문을 웃음거리로 만들곤 잘도 웃음이 나오는구나! 고작 계집에게 차였다고 독을 마셔? 병신 같은 놈!”
중년 사내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만 살폈다. 중년 사내가 다시 말했다.
“다들 뭣들 해. 이런 놈 챙길 필요 없다.”
사내가 등을 돌려 방을 나갔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도 어물어물 흩어졌다.
시엔이 혼자 남았다.
“계집에게 차이고 독을 마셨다고?”
뭔가 잘못 된 것 같은데?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믿을 수가 없다.
사자 재림의 술. 가장 비통한 슬픔과 분노 속에 죽음을 맞이한 이의 몸을 빌려 소생하는 대마술이었다. 그 잔혹한 죽음의 사인이 고작 실연 자살이라니?
아주 형편없는 농담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시엔이 기억을 더듬었다. 제 것이 아닌 기억이 이야기책의 줄거리처럼 스쳤다.
“아니, 뭐 이런······.”
어미의 목숨을 잡아먹고 태어나 단 한 번도 사랑받지 못했던 청년. 연인은 저를 사랑하는 세상 유일한 사람이었다. 제 목숨이나 다름없었던 소중한 연인.
연인이 떠나자 청년은 독을 마셨다. 지독한 외로움과 자기혐오가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청년을 난도질했다.
그래서 세상 가장 비통한 죽음이었다.
“쯧.”
예언의 형식을 빌려 언령으로 만들어진 대마술 사자 재림. 언령은 논리를 초월해 과거와 미래를 어우르는 거대한 관념 세계에 속한 힘이었다.
그러니 마법은 성공적이었다.
그저 사소한 치정사가, 한 개인에겐 이 세상 가장 구슬픈 비극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니 소생이 이루어진 것만으로도 만족해야했다. 게다가 그는 이미 벌어진 일에 후회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런 녀석으로 되살아난들 어떠랴. 어차피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에 집중하면 될 일이었다.
“라 크라크쉬 에시데롤 라 두사······”
시엔의 입에서 사악한 진언이 튀어나왔다.
세상이 편애하는 언어가 있어 그 자체로 법칙을 누그러뜨리고 기적을 행한다. 시엔의 심장이 검게 물들어갔다. 어둠의 씨앗이 자리를 잡았다.
“오라, 나의 백성들아.”
시엔이 제게 속한 망령을 불렀다.
살해당한 수백만 왕국민의 망령들. 끊임없이 피눈물을 흘리며 복수를 호소하던 그 망령들!
왕국의 마지막 왕자. 망령들의 유일한 주인.
그들의 왕이 재림했으니 망령들이 깨어나 복수를 찬양하며 다시 돌아오리라.
한참이나 제 백성들을 부르던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들 안 와? 너무 먼 곳에서 소생했나?
망령의 비행은 인간보다 빠르다. 허나 대륙을 순식간에 가로지를 정도는 아니다. 부른다고 곧장 공간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조급해하지 말자. 시엔이 중얼거렸다.
시간은 자신의 편이었다. 젊다 못해 어린 새로운 신체. 앞으로 수십 년은 끄떡없으리라.
시엔이 다시 눈을 감았다.
찾아올 그의 백성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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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기다림이었다.
「······재앙 앞에 제국은 큰 타격을 입었다.
재앙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재앙을 두려워한 왕국들은 역사를 지웠다. 그나마 여러 문헌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은, 재앙이 제국에 반하는 어떤 대적자의 형태로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 뿐이다.
그 전쟁으로 말미암아 제국의 반 이상이 파괴되었다. 그리하여 제국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지방의 군벌들이 왕을 칭하며 일어났다. 제국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수많은 왕국이 탄생하고 싸웠다. 기나긴 대륙전쟁의 시작이었다.
결국, 재앙 이후 고작 9년. 마지막 황제와 그 일가가 황궁과 함께 산채로 불타 처형당하며, 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탁! 시엔이 책을 덮었다.
“이거 내 얘기지······.”
그리곤 마른세수를 했다. 손을 떼자 짙게 드리운 피곤함이 드러났다.
제국이 멸망했다. 그게 무려 천 년 전 일이란다.
후우, 한숨을 크게 내쉬고 나서도 풀리지 않는 속에 결국 거친 소리를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이런 젠장. 왜 벌써 망하고 지랄이야.”
< 여는 이야기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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