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1. 낚시는 미끼가 중요한 법 (1)
백주천의 한마디는 제자들에게 큰 파장을 불러왔다.
제자들은 백주천과 한빈을 번갈아 봤다.
그때 제자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팽 소협 덕분이라면……?”
“내가 한 말 그대로다.”
백주천의 말에 제자는 조용히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여전히 웃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저렴한 사파의 미소가 아니었다.
그 미소에는 현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마치 오래된 절의 불상에서나 볼 수 있는 기운이었다.
물론 이것은 제자의 착각이었다.
제자들은 백주천의 대답을 한빈이 그를 눈을 뜨게 했다는 것으로 오해했다.
뭐, 맹충에 당한 눈을 치료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제자들은 백주천이 맹충에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런 상황에서 백주천이 눈을 뜨니 하북팽가 사 공자가 치료한 것이라고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백독문의 제자가 한빈을 향해 포권했다.
“감사드립니다, 대협.”
“대협의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한빈을 향한 인사가 줄줄이 이어졌다.
다른 독인들은 아직 눈을 감고 있는 상태.
그들의 제자들은 눈을 빛냈다.
이곳에서 벗어나면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맹충에 당한 환자를 모두 치료해 주리라 확신한 것이다.
누군가가 외쳤다.
“천수장주 만세!”
“하북팽가 만세!”
“생불 만세!”
갑작스러운 소란에 한빈이 헛기침했다.
“흠.”
하지만 소란은 멈추지 않았다.
한빈이 손을 높이 들었다.
모두가 준비하라는 신호였다.
독인들의 수장들만이 아는 신호였지만, 그들의 제자들도 바로 입을 닫았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그들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상황을 진정시킨 한빈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한빈이 향한 곳은 백독전의 중앙이었다.
백독전의 중앙은 촘촘한 그물로 한빈과 아성을 갈라놓고 있었다.
한빈의 반대편에서는 아성의 일행이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아성은 한빈과 그물을 번갈아 봤다.
아무래도 그는 이런 상황은 예측 못 한 것 같았다.
아성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네놈이 진짜 하북에서 유명하다던 천수장주더냐?”
“아, 원래는 비밀이었는데……. 그건 그렇고 협상은 마저 끝내야지.”
“협상이라……. 아직도 협상할 것이 있다고 보는가?”
“친구가 생각하기에는 없어?”
“이곳을 반으로 나눠 봤자 문이 열리지 않으면 나가지 못한다. 그런데 이걸로 협상하겠다고? 좋다, 들어나 보자.”
“일단 정신이 멀쩡해야 협상도 가능하니, 내가 준 해약부터 먹어.”
“해약이라…….”
아성은 자신의 손에 든 가죽 주머니를 바라봤다.
뒤쪽에 있던 독인들은 그 모습을 이상하게 주시했다.
기껏 중독시켜서 승기를 잡아 놓고 아무렇지 않게 해약을 준다니?
그들이 봤을 때는 이 상황은 말도 안 되었다.
누군가 작게 속삭였다.
“저 해약이 진짜야?”
“표정을 보니 진짜인 것 같은데…….”
“왜 적한테 해약을 준 거지?”
“그건 나도 이해가 안 되는데!”
그때 다른 독인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저 소협을 하북에서 뭐라 부르는지 아나?”
“생불이라고 부르는 건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닌가?”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제까지 몰랐던 이들도 오늘 모두 알게 되었다.
독인이 말을 이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진짜 생불이라면……. 적의 목숨을 함부로 거둘까?”
“적의 목숨이라고?”
“부처에게 적과 아군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헉!”
다른 독인이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말도 안 되던 상황이 이해된 것이다.
다른 독인도 눈을 빛냈다.
생불이랑 호칭답게 적의 목숨까지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어떤 이는 합장을 하고. 어떤 이는 불호를 외치기도 했다.
“반야바라밀…….”
“관세음보살…….”
연달아 울려 퍼지는 도호에 한빈이 미간을 좁혔다.
그것도 잠시, 표정을 바꾼 한빈이 가죽 주머니를 가리켰다.
“그런 표정 짓지 마. 그 해약은 진짜야.”
“진짜라고 하면 내가 믿을 것 같나?”
그는 눈을 매섭게 뜨고 한빈을 쏘아봤다.
한빈을 쏘아보던 아성의 눈길이 독인들이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경건한 자세로 한빈을 향해 합장하고 있었다.
아성은 조용히 한빈을 바라봤다.
하북 지역의 생불에 대해서는 그도 알고 있었다.
앉은뱅이 거지 소녀를 고친 것을 시작으로, 하북 지역의 수많은 환자를 대가 없이 치료했다고 들었다.
죽어 가는 토끼도 지나치지 못하고 품에 담았다는 것은 제법 유명한 이야기였다.
물론 그것은 사람들의 오해였다.
사람들이 말하는 앉은뱅이 소녀는 지금 한빈의 옆에 있는 설화였고.
한빈이 토끼를 품에 안은 것은 광개에게 토끼구이를 부탁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사실을 세인들이 알 리가 없는 법.
이런 미담들은 하북뿐 아니라 강북 지역 곳곳에 퍼져 있었다.
아성은 다시 한빈을 바라봤다.
얄미운 얼굴만 봐서는 생불이란 칭호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뒤쪽에 있는 독인들의 표정을 보면 앞에 있는 상대는 분명히 생불이 맞았다.
겁에 질린 자들이 저런 연기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생불이라면 그가 준 해약도 진짜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때 다시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다.
고민하던 아성은 가죽 주머니에 든 환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이곳을 왜 백독전이라고 부르는지 알아?”
“…….”
아성이 눈을 감더니 말없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해약을 전신 세맥으로 퍼뜨리려는 듯 보였다.
한빈은 그의 상태는 확인도 안 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백 가지 독으로 중독시키고 백 가지 해약을 시험하는 곳이거든. 중독시키는 방법 중에는 독을 품은 맹수를 이용할 때도 있지. 이 그물은 그 맹수를 가두기 위한 거야. 일단 나와 친구는 싸울 일이 없어졌군.”
그때 아성이 다시 눈을 떴다.
“어차피 같이 갇힌 것이 아니더냐?”
“과연 그럴까?”
“밖은 내 수하들이 접수했을 텐데…….”
“잠시만!”
한빈이 다시 손바닥을 보였다.
그러고는 손을 그대로 입술에 갖다 댔다.
한빈의 입에서 울리는 휘파람 소리.
휘이익.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였다.
뒤쪽에서 굉음이 울렸다.
드르륵.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 향하는 것은 당연했다.
거대한 강철 문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갔다.
굉음과 그 위용만 보면 마치 성문이 열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드르륵.
강철 문이 열린 곳은 한빈의 뒤쪽이었다.
반으로 나뉜 백독전 중 한빈이 속한 공간의 문이 열린 것이다.
그물을 사이에 두고 한쪽만 생문이 열렸다는 뜻이다.
반대쪽에 있는 아성이 당황한 것은 당연했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열린 문을 가리켰다.
“어, 저쪽에 어떻게 문이…….”
“백독문을 공략할 거면 일단 전각부터 잘 공부해 뒀어야지. 친구는 이곳에 문이 하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렇다면 공부가 부족한 거고.”
한빈이 피식 웃었다. 이 웃음에는 두 가지 뜻이 있었다.
백독섬멸진은 일대제자라면 모두 알고 있는 수법이었다.
하지만 문의 뒤쪽에도 있다는 것은 백주천만이 알고 있었다.
조기명을 품은 아성이란 자는 아마도 일대제자의 지식을 기반으로 작전을 짰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백독문 안에 있는 다른 세력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도 그의 실책이었다.
한빈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고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독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점은 독인들이 문이 열리리라는 걸 예상했다는 것.
하나같이 새로 난 문 쪽으로 다가가 있었다.
반대쪽에서 그 모습을 보던 아성이 검을 뽑았다.
스릉.
그의 검이 공간을 가로지른 그물을 갈랐다.
챙.
그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성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다시 검을 그었다.
챙.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그거 인면지주의 껍질을 녹여서 만든 그물이야. 웬만해서는 안 끊길 거야. 뭐 끊는다고 해도 이미 우리는 밖에 있겠지.”
한빈의 말은 반은 사실이었다.
인면지주란, 사람의 얼굴을 한 거미를 말한다.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인면지주의 껍질은 도검불침으로도 유명하다.
물론 진짜 이것이 인면지주로 만든 그물인지 확인하지는 않았다.
백주천으로부터 검기로도 못 가를 것이라고 확답을 받았을 뿐이다.
인면지주를 언급한 것은 상대를 절망에 빠뜨리려는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후우.”
아성이 심호흡하며 옆에 있는 수하들에게 턱짓했다.
원숭이 가면을 쓴 수하들이 미친 듯 그물을 그어 댔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챙. 챙!
마치 연회가 열린 것처럼 규칙적인 소리가 장단에 맞춰 울릴 뿐이었다.
한빈은 뒤를 확인했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은 백독전을 빠져나간 상태.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미안해, 아무래도 내가 아프게 한 모양이지?”
“…….”
아성이 아무 말 없자 한빈이 피식 웃었다.
“나는 지금 밖으로 나간다, 친구.”
“흠.”
“참, 내가 왜 친구라고 하는지 알아?”
“…….”
“소중한 포로한테 그 정도의 예의는 차리는 게 강호의 도리 같아서 그래.”
“포로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나가서 무슨 짓을 할 것 같아?”
“…….”
아성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매섭게 눈만 떴다.
그 모습에 한빈이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는 누님 한 분과 진솔한 대화를 나눌 거야. 만약에 대화가 잘 안되면 뭐…….”
“잘 안되면 어떻게 할 거지?”
“싸움은 붙이고 흥정을 말리라는 강호 속담이 있잖아.”
“그거 순서가…….”
“순서는 중요한 게 아니잖아. 어쨌든 그 강호 속담처럼 일단 싸움, 아니 불은 붙여야지. 바로 여기에!”
한빈이 바닥을 가리켰다.
백독전을 뜻하는 것임을 아성도 알고 있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조용히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걸어가던 한빈이 멈췄다.
그러더니 아성이 보란 듯 안과 밖의 경계선에서 폴짝 뛰었다.
뒤돌아본 한빈이 인심이라도 쓴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참, 아까 말했듯이 해약은 진짜야. 다만 횡사독이 가짜라서 그렇지. 사횡혈을 점혈한 다음 독기를 누르기 위해서 운기하면 누구라도 가슴이 무리가 오기 마련이지. 그러니까…… 힘만 믿는 애 중에는 머리 나쁜 애들이 많다니까.”
“이런 썩을!”
아성의 입에서 처음으로 험한 말이 쏟아졌다.
원숭이 가면을 쓴 무사들이 그런 아성을 조용히 바라봤다.
마치 비현실적인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 듯이 말이다.
그들이 갇혔다는 사실보다도 아성이 험한 말을 뱉었다는 것이 더욱 놀라운 듯싶었다.
그것도 잠시, 그들은 다시 그물을 찢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챙. 챙.
그때 문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드르륵.
문이 닫히기 전 틈새에서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남의 목숨을 노릴 때는 자신의 목을 거는 게 강호의 법칙이지. 강호에 온 걸 환영해, 친구.”
그 목소리에 그들의 검이 멈췄다.
* * *
밖으로 나온 한빈은 주변을 살폈다.
그때 뒤쪽에서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쿵!
한빈이 빠져나오자 아성과 원숭이 가면 무사들만을 남겨 둔 채 백독전의 문이 다시 닫힌 것이다.
출구 앞에는 백주천과 그의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빈이 나오자 백주천이 재빨리 달려왔다.
백주천은 독인들이 모여 있는 백독전 옆으로 한빈을 안내했다.
그나마 멀쩡한 제자들이 눈이 불편한 사부들을 부축하고 있었다.
탈출하긴 했지만, 이곳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향해서 걸어가던 중 백주천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팽 소협,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러는데 물어봐도 되겠소이까?
“말씀하시지요, 문주님.”
“그자에게는 왜 해약을 건넨 것이요?”
“그거 해약 아닌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