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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619화 (605/621)
  • 619. 진위(眞僞) (4)

    사내의 요구에 백주천이 헛기침했다.

    “흠.”

    모두는 백주천이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이지 않아도 백주천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서열이 낮은 독인들은 백주천이 승낙할 것을 기대하는 듯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사내는 마치 선심이라도 쓰는 듯 지켜보기만 했다.

    실내에는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실내에는 살얼음판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이번 적막을 깬 것은 사내가 아니었다.

    딱!

    어디선가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사내가 반응했다.

    사내가 고개를 돌렸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였다.

    독인들의 가장 앞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만약에 못 들어주겠다면?”

    그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그곳에는 붉은 무복의 사내가 있었다.

    그는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노란색과 붉은색으로 어지럽게 물들어 있는 천을 보자니 더럽기 짝이 없었다.

    누가 봐도 핏물과 진물이 뒤엉킨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는 한빈이었다.

    눈이 멀쩡한 독인들 중 일부는 입을 벌렸다.

    지금 상황은 적에게 사로잡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단 협상을 해서 위험을 피한 후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누가 봐도 맞았다.

    그런데 갑자기 한빈이 이리 나서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내는 피식 웃으며 한빈을 바라봤다.

    이 중에서도 가장 상태가 심해 보이는 것이 바로 한빈이었으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누구지?”

    “혹시 혈후가 말하지 않았나?”

    “그럼 네가 우리 주군으로부터 도망간 쥐 새끼더냐?”

    “쥐 새끼는 아니고 강아지 정도로 해 주면 고맙겠는데! 솔직히 이렇게 큰 쥐 새끼가 어디 있어?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비슷한 말을 한 것 같은데……. 요즘 들어서 기억이 가물거려서 걱정이네.”

    한빈은 어이없다는 듯 사내를 바라봤다.

    사내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처음 보인 표정의 변화였다.

    그것도 잠시, 사내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게 한 가지 있군. 왜 나선 거지? 운만 좋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텐데.”

    “내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거든.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안 나서?”

    한빈은 독인들을 가리켰다.

    돌아보는 순간 한빈은 헐거워진 안대 사이로 독인들의 눈빛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이는 놀란 듯 입을 벌리고 있었고 어떤 독인은 무섭게 한빈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빈은 다시 사내를 바라봤다.

    사실 그들의 눈빛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한빈과 적혈맹호대는 맹인이니까!

    그 모습에 사내가 말을 이었다.

    “마치 보인다는 듯 주변을 돌아보는군.”

    “사실이니까.”

    “뭐라?”

    “사실이라고, 이건 내가 잘 때 쓰는 안대거든. 내가 호롱불에 조금 예민해서. 불이 일렁이면 잘 수가 있어야지.”

    “지금 뭐라는 건가?”

    “깨어 있을 때는 벗어도 되는데, 안대를 벗기도 전에 사람들이 날 이리로 데려왔지 뭐야?”

    말을 마친 한빈은 천을 풀어 팽개쳤다.

    눈을 가렸던 천이 나풀거리며 사내 쪽으로 날아갔다.

    아무 힘 없이 날아가는 천은 묘하게 사내의 발아래 떨어졌다.

    툭.

    사내가 허리를 숙여서 천을 잡았다.

    그의 머릿속에 의심이란 글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가 던진 천 쪼가리는 우연히 자신의 앞에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나풀거리면서 방향도 못 잡던 천 쪼가리를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허공섭물이 가능한 자로 봐야 했다.

    아무도 눈치 못 채는 허공섭물이라?

    그런 수법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애초에 이런 비겁한 속임수 따위는 쓰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물론 지금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진 한 수에는 백발백중의 묘용이 담겨 있었다.

    사내는 천을 주워 자세히 살폈다.

    그는 의심 없이 냄새도 맡고 혈흔의 진위를 따져 봤다.

    천을 다 살피고 난 사내가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 가짜였군. 가짜 피와 가짜 진물, 이런 말도 안 되는 경극에 놀아나다니……. 너에게는 최고로 고통스러운 죽음을 안겨 주지.”

    사내는 이를 부득 갈았다.

    동시에 옆에 있던 원숭이 가면을 무사들이 제각기 병기를 들었다.

    누가 봐도 일촉즉발의 상황.

    한빈이 한 발 앞으로 나오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너무 태연해서 누구라도 의문을 가질 정도였다.

    앞으로 나가려던 원숭이 가면 무사들마저 멈칫했다.

    앞으로 걸어가던 한빈이 멈췄다.

    아무렇지 않게 멈춘 것 같지만, 한빈은 이곳의 어떤 지점을 찾고 있는 듯 힐끔 아래를 계속 확인했다.

    슬쩍 아래를 확인한 한빈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게 과연 뜻대로 될까?”

    누가 봐도 얄미운 표정.

    원숭이 가면 무사들이 다시 움찔한다.

    그때 사내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그러고는 말없이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묘한 위화감이 손끝을 타고 들어왔다.

    그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상대를 바라봤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무래도 느낀 모양이군.”

    “느끼다니 ……. 무엇을 말이냐?”

    “네가 들고 있는 천이 이상하다는 점!”

    “이 천이라면…….”

    “그래, 그 천 말이야. 손끝이 살짝 아려 오지 않아?”

    “혹시…….”

    사내는 재빨리 천을 바닥에 던졌다.

    탁.

    그 모습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이제 조금 감이 잡히나? 솔직히 나는 너처럼 둔한 놈을 본 적이 없어.”

    “그게 무슨 말이냐?”

    “백독지회에 참석해서 아무 물건이나 만지는 짓은 강호의 하룻강아지도 안 하지. 어떤 물건에 독을 발라 놨을지 누가 알아?”

    그 말에 사내가 반응했다.

    그는 재빨리 오른팔의 팔꿈치에 있는 사횡혈을 찍었다.

    오른팔에 있는 혈맥의 흐름을 멈춘 것이다.

    중독되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독이 퍼지는 것을 막는 것이다.

    사내는 미간을 좁히며 살짝 신음까지 흘렸다.

    “흠.”

    그 모습에 한빈이 입꼬리를 올렸다.

    “어이쿠, 모르고 내가 그 독의 이름을 말해 주지 않았네.”

    “…….”

    “그 독의 이름은……. 비밀이야.”

    순간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장난을……. 윽.”

    그가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았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떴다.

    “……말도 안 돼!”

    “표정을 보니 그냥 말해 줘도 될 것 같네. 그 독은 횡사독이야. ‘비명횡사(非命橫死)’ 할 때 그 횡사가 맞아. 사실 만진다고 해서 중독되는 독은 아니야. 그 독은 코로 중독되지.”

    “왜 다른 자들은 멀쩡하지?”

    사내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한빈이 피식 웃었다.

    “팔꿈치에 있는 혈맥들을 안 건드리면, 자연스럽게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독이지. 방금 네가 사횡혈을 건드렸을 때 중독된 거야. 솔직히 이렇게 복잡한 독을 누가 써. 멍청이들한테 쓰면 모를까.”

    “아니, 분명히 손끝에서 독기를 느꼈다.”

    “아마도 그건 양지초 때문이겠지. 독기는 없지만, 양기 때문에 그냥 만지면 손끝에 통증을 느끼는 것은 일반 백성이나 무림 고수나 똑같지. 그러니 멍청이라는 거야. 하하.”

    한빈이 진득하게 웃었다.

    끈적끈적한 웃음을 보내는 한빈의 모습은 마치 사파의 고수 같았다.

    그 모습에 놀란 이들 중 하나는 바로 삼독문의 문도희였다.

    그녀는 독을 저리 쓰는 자를 이제껏 보지 못했었다.

    차라리 바로 상대에게 독을 썼다면 이리 놀라지는 않았다.

    손쉬운 방법을 제쳐 두고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상대가 제 발을 찍게 했다.

    중독 증상보다도 더 심각한 마음의 내상을 입힌 것이다.

    격장지계의 수법 중에서도 상위의 수법.

    물론 마음의 내상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저렇게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은 진기가 불완전해질 수밖에 없다는 말도 되었다.

    그렇다면 몸속의 독은 더욱더 빠르게 번져 나갈 터.

    아무것도 아닌 듯하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음흉함은 그녀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대화만 듣고 있으면 지금 입을 터는 것이 하북팽가의 사 공자보다는 사파 혹은 독문의 노고수라고 해야지 적당할 터였다.

    그녀는 하북팽가 사 공자에게서 진정한 독심(毒心)을 느꼈다.

    자신이 다치지 않고 독을 쓰는 것은 중수요.

    남들 모르게 독을 쓸 수 있는 경지가 고수의 경지라 들었다.

    그보다 더 윗줄의 경지는 무엇이라고 할까?

    그녀의 사부는 예전에 그런 경지는 자신의 마음속에 독을 심는 것이라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하북팽가의 사 공자를 보니 알 것 같았다.

    그야말로 마음속까지 독인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도희는 독인으로 걸어온 그녀의 이십 년 인생이 허무해졌다.

    순간 원숭이 가면을 쓴 무사들이 못 참겠다는 듯 한빈에게 들이닥쳤다.

    슝.

    화살처럼 몸을 날려 한빈에게 날아오는 원숭이 가면 무사들.

    그때 한빈의 앞을 누군가 막아섰다.

    가장 앞에 선 자는 곡괭이를 들고 있었다.

    곡괭이에 강기를 실은 모습에 원숭이 가면 무사들도 동작을 멈췄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가녀린 듯한 몸매, 거기에 곡괭이까지. 모든 것이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심미호였다.

    심미호가 곡괭이를 상대에게 겨눈 채 말했다.

    “누가 주군의 말씀 중에 딴짓해?”

    그녀의 뒤로 적혈맹호대가 늘어섰다.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도기를 풀풀 피워 내며 상대에게 날을 세웠다.

    적혈맹호대의 등장에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때 한빈이 사내를 바라봤다.

    “혈후의 쫄따구, 하나만 묻지.”

    사내가 눈썹을 꿈틀댔다.

    대화를 듣고 있던 독인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적이라지만, 고수에게 대놓고 하대할 줄은 누구도 몰랐다.

    사내가 아무 말 없이 눈매를 좁혔다.

    미남자의 얼굴에 살짝 금이 가기 시작했다.

    “…….”

    “네 이름이 뭐냐? 서로 검을 마주 댔으면 통성명을 하는 게 예의지.”

    “나는 혈후를 모시는 아성이라고 한다. 네 이름은?”

    “비밀이야.”

    순간, 모두가 본능적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한빈을 응시했다.

    그들의 눈빛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날이 선 시선도 있었고 감동한 듯 촉촉한 눈빛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눈빛에 한 가닥 희망을 담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한빈의 대화가 너무 저렴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명문 정파, 그것도 십대세가에 속하는 하북팽가의 직계의 말치고는 너무 싸 보였다.

    또 다른 이는 한빈의 대화가 격장지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상대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틈을 공략하려는 수법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한빈은 그런 깊은 뜻 따위는 없었다.

    한빈은 적들이 이곳에 들어오면서부터 숫자를 셌다.

    이것은 외부 조력자와의 약속이었다.

    모든 게 딱 들어맞아야 한빈이 원하는 것을 끌어낼 수 있었다.

    상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네놈은 독인이 아니군. 사파더냐?”

    “사파라 하기에는 내 행동이 너무 점잖지 않은가?”

    “이놈이…….”

    아성은 말을 잇지 못했다. 가슴에 밀려오는 통증 때문이었다.

    이건 격장지계 때문에 흥분해서 느끼는 통증이 아니었다.

    아성은 눈을 가늘게 떴다.

    횡사라고 한 독은 처음 들어 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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