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8. 진위(眞僞) (3)
의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동료를 살피는 독인들은 서열이 낮은 제자들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동료를 의심하는 그들.
성별뿐 아니라 외모와 체격까지 바뀌는데 놀라지 않을 독인은 없었다.
독인이 아니라 강호의 고수들이라고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헐거워진 천 사이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한빈도 눈을 크게 떴다.
암제는 칼을 대서 사람의 얼굴을 바꿨다.
하지만 이건 칼을 댄 것도 아니고 변장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근골을 자유자재로 축소시키고 얼굴까지 바꿀 수 있는 무공이라니!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침을 삼켰다.
물론 그 무공이 탐나서였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욕심을 낼 때가 아니었다.
어찌 보면 백척간두에서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상황이라고 봐야 했다.
즉,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할 수 없었다.
모두가 놀라움에 웅성거리고 있을 때 비웃음이 울려 퍼졌다.
“하하, 아주 재미있어. 그래야 재미있지.”
그의 웃음은 독인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듯했다.
상대방을 깔아뭉개는 듯한 목소리에 여유 있는 표정.
그들은 마치 거대한 성벽 같았다.
독인들 중 서열이 낮은 이들은 사내의 분위기에 압도당한 듯 뒷걸음쳤다.
독인들이 웅성거리자 백주천이 손을 들고 외쳤다.
“모두 대열을 흩트리지 마시오!”
“…….”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
백주천은 고개를 돌리며 귀를 쫑긋했다.
그의 오른쪽 귀가 향한 곳에는 한빈이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백주천이 오른손을 높이 들었다.
그러고는 내공을 실어서 외쳤다.
“지금부터 백독섬멸진을 전개한다!”
순간 백독문 제자들의 표정이 굳었다.
백독섬멸진은 동귀어진의 수법.
공간을 밀폐하고 독탄과 독물을 쏟아붓는다.
백독문의 동귀어진 수법인 백독섬멸진은 숨 몇 번 쉴 시간이면 사람을 핏물로 만들 수 있었다.
백독섬멸진을 펼친다면 어떤 고수라도 몸을 성히 보존할 수 없다.
시간이 문제이지, 궁극에는 한 줌의 핏물로 변할 수밖에 없는 악랄한 수법이다.
그 수법을 전개한다는 것은 미리 독탄과 독물을 준비해 놨음이 분명했다.
대적 못 할 상황에서 동귀어진을 선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모두의 마음이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비장한 표정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독인들도 있었지만,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며 살길을 찾는 독인들도 있었다.
그때였다.
백주천이 그의 검을 뒤쪽 벽을 향해서 던졌다.
눈을 감고는 있었지만,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팡!
파공성을 내며 날아가는 검을 막을 자는 없었다.
백주천의 검이 뒤쪽에 있는 족자에 박혔다.
푹!
뒤쪽 족자에는 용이 그려져 있었다.
그가 던진 검은 용이 물고 있는 여의주에 정확히 박혔다.
그 의미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일부 백독문의 제자들만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난데없는 상황에 대부분의 독인들이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뒤쪽에서 쇳덩이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모두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을 때 출입문 쪽에서부터 시작해서 굉음이 울렸다.
쿵. 쿵.
그 굉음은 절구 찧는 소리 같았다.
문 쪽을 보니 거대한 강철판이 아래로 떨어진다.
쿵.
이것은 천 근의 무쇠가 바닥을 내리찧는 듯한 소리였다.
그 굉음이 멈췄을 때 백주천이 외쳤다.
“이제 천장에서는 이곳을 가득 채울 독물이 쏟아질 테지! 화경의 고수라 한들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진짜 그렇게 생각합니까? 백 문주.”
“너희와 우리는 한배를 탔다는 얘기지.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 내가 열을 세기 전에 투항하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살아 나갈 자는 없을 것이다. 섬멸진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하나밖에 없다. 하나, 둘, 세…….”
사내는 그 모습을 비웃었다.
“푸웁, 재미있군요. 벌써 시간은 다 간 것 같은데……. 이미 그대가 말한 백독섬멸진은 무력화됐습니다. 그러기에 줄 하나에 모든 걸 맡기면 안 되는 법.”
사내가 끊어진 동아줄 하나를 바닥에 던졌다.
탁.
그것은 백독섬멸진을 발동시키는 기관과 연결된 밧줄 중 일부분으로 보였다.
“대체 어떻게…….”
“동귀어진하시겠다는 그 자신감은 어디 갔습니까? 동귀어진은 힘이 비슷할 때나 가능한 겁니다, 백독문주.”
“누가 기관을…….”
백주천은 이번에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였다.
백독문의 제자 중 하나가 백주천을 향해 포권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너, 너는…….”
당황도 잠시, 그는 재빨리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오른손을 내뻗었다.
그의 우장에는 백독문의 문주만 익힐 수 있는 백독단명장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단 한 수로 상대의 숨통을 끊어 버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하얗다 못해 투명한 기운이 그의 오른손에 일렁이자 주변에서는 비명이 튀어나왔다.
아우성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백주천의 손.
팡!
백주천의 백독단명장이 허공을 강타했다.
그가 이렇게 분노한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목소리의 주인공이 백주천이 가장 아끼는 제자인 조기명이었기 때문이다.
그 옆에 있던 독호는 뭔가 깨달은 듯 입술을 깨물었다.
백독문에서 생각지도 못한 배신자가 나온 것이다.
자리에서 사라진 조기명은 이미 원숭이 가면 무사들이 모인 곳에 서 있었다.
백주천이 허공을 보며 외쳤다.
“대체 왜? 아니 진짜 네가 맞느냐?”
내공이 실린 목소리에 모두가 움찔할 때였다.
조기명이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저는 진짜가 맞습니다, 사부님.”
“…….”
백주천이 입을 굳게 다문 채 미간을 좁히자 조기명이 되물었다.
“사부님, 이번 일은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뭐가 당연하다는 말이냐?”
“백독문 정도의 독문이라면, 돈을 쓸어모아야 정상입니다. 사천당문처럼요. 그런데 지금 이 꼴이 뭡니까?”
“그래서 우리가 불편했던 적이 있느냐?”
“우리가 왜 음지에 있어야 합니까? 사천당문은 양지에 있는데 말입니다.”
“허, 네가 문주가 되고 바꾸면 될 것이 아니야? 어차피 차기 문주는 너인 것을…….”
“십 년? 아니면 이십 년? 그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살짝 울분이 섞인 듯 목소리가 떨렸다.
“허허, 진심이더냐?”
“네, 진심입니다.”
“그게 전부더냐?”
“저는 백 사매도 원합니다.”
“그 아이가 여기에서 왜 나오는 것이냐?”
“사매가 반년 전, 제 마음을 거부하더군요. 제가 가질 수 없는 꽃이 세상에서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 딸이 네 꽃이더냐?”
“제가 꽃이라 하면 꽃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가짜 꽃이라고 해도 제 것이어야 합니다. 제 것이 아니면 밟는 것이 강호의 이치입니다.”
“그래서 저들이 네게 준 것이 무엇이냐?”
“돈과 권력 그리고 사랑이죠.”
“사랑이라니…….”
백주천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조기명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까도 보셨잖습니까? 저는 사매와 똑같이 생긴 여인이면 족합니다. 그리고…….”
그는 쉴 새 없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놨다.
입을 놀리는 조기명의 얼굴에는 광기가 가득했다, 그는 자신이 육 개월 전부터 사문을 배신했다는 것까지 털어놨다.
그의 말이 끝나자 백주천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혹시 네가…….”
“네, 맞습니다. 진짜 사매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의 말에 백주천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표정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
자세히 보면 시원하다는 듯 한숨을 뱉고 있었다.
물론 다른 이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백주천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사문을 배신한 것이냐?”
“그렇습니다. 그 정도의 이유라면 차고도 넘친다고 생각합니다.”
조기명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순간 백독문의 제자들뿐 아니라, 다른 독인들도 당황했다.
그중 가장 당황한 이는 다름 아닌 장자명이었다.
장자명이 생각하는 조기명은 백독문이란 호수 위의 백조였다.
미운 오리 새끼들만이 정신없이 꽥꽥대는 백독문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한 마리의 백조.
그런데 사형이 배신을 했다고?
장자명은 믿을 수 없었다.
장자명은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안대를 풀어 헤칠 뻔했다.
그러나 곧 손을 멈칫했다. 바로 한빈의 신신당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행동 하나로 계획을 그르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장자명도 사람이기에 흘러나오는 눈물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 눈물이 안대를 적시자 안대에 묻혀 놨던 가짜 피가 번졌다.
누가 봐도 피눈물을 흘리는 모습.
피눈물을 흘리는 장자명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조기명의 말을 듣다 보니 만약 이곳에 자신이 안 왔다면 어찌 되었을까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자고 한 것은 하북팽가의 사 공자.
자신은 사 공자 한빈을 극구 말렸다.
한빈이 아니었다면, 사매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 분명했다.
장자명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한빈이 있는 쪽이었다.
장자명은 이제 느낌만으로도 한빈이 있는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장자명의 눈을 가렸던 천이 이제는 완전히 붉게 물들었다.
그를 지켜보던 백독문의 제자 하나가 깜짝 놀라 장자명의 소매를 잡았다.
“사형, 괜찮으십니까? 아무래도 빨리 치료를 받으셔야…….”
“나는 됐다.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적을 주시하거라.”
장자명이 눈이 멀쩡한 백독문의 제자를 향해 속삭였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도 이곳을 어떻게 탈출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적혈맹호대를 비롯한 하북팽가 전력은 멀쩡하지만, 나머지 독인들이 문제였다.
그들을 데리고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까?
사 공자와 적혈맹호대만 탈출한다면 몰라도, 이미 짐이 되어 버린 독인들을 데리고 탈출하는 것은 무리 같았다.
만약 이곳에 있는 독인들만 멀쩡했다면…….
그랬다면 상황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몰랐다.
수십 마리의 개미가 늑대를 몰아내는 것은 힘들다.
하지만 독인들은 개미보다는 벌에 가까웠다.
벌떼가 늑대 몇 마리를 몰아내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장자명은 아쉬움에 한숨을 삼켰다.
문도희가 이끄는 삼독문의 제자들도 비슷했다.
그중 문도희의 첫 번째 제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문도희의 표정이 묘했기 때문이었다.
공포에 질린 것도 아니요, 울분을 삼키는 모습도 아니었다.
입술이 살짝 움직이는 것이 숫자를 세고 있는 것 같았다.
문도희의 제자는 자신의 사부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자가 생각하기에 이 정도 상황이면 미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삼독문의 모든 기반이 무너질 판이니, 어찌 미치지 않겠는가.
제자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독인들이 술렁이고 있을 때 사내가 다시 한 발 앞으로 나와 손뼉을 쳤다.
짝짝!
“장난은 여기까지. 세 가지 부탁만 들어주면 목숨은 살려 주지.”
사내의 말에 실내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잠시, 침묵은 계속되었다.
적막을 깨뜨린 것도 사내의 목소리였다.
“만일 여기서 살아 나가고 싶다면, 백룡의 쥐새끼를 내놓아라. 그리고 백독곡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연못을 열어라. 마지막으로 청운사신과 적룡대협이란 작자를 내 앞에 대령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