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7. 진위(眞僞) (2)
한빈의 말에 장자명이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어렸을 때는 술래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한빈이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쫓는 자가 당연히 유리하겠지요. 힘이 없으면 어떻게 상대를 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힘이 우리에게 있는 겁니까? 팽 공자.”
“있으니까 이렇게 술래를 자처했겠지요. 잠시 눈을 감고 때를 기다린 다음, 적을 쫓으면 됩니다.”
“제 사매는…….”
“가장 안전한 곳에 숨겨 놨으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안전한 곳이라면 설마…….”
장자명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그는 조용히 현철로 만든 관을 바라봤다.
당황하던 장자명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귀빈실이 제일 안전할 것이요.
이곳에 있는 관은 어떤 충격에서도 보호될 것이었다.
사천당가에서 한빈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저 관 덕분이었다.
그래도 장자명은 불안했다.
만약 자신들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사매는 저곳에서 굶어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우리가 돌아오지 못한다는 건 딱 한 가지 이유겠지요.”
“그게 뭡니까? 팽 공자.”
“우리가 죽었을 때는 이곳에 못 돌아오겠죠. 이곳에 오는 순간 어찌 보면 우리는 백독문과 같은 배를 탄 겁니다.”
순간 장자명이 눈을 붉혔다.
눈을 붉히는 장자명에게 한빈이 턱짓했다.
빨리 눈을 가리라는 뜻이었다.
장자명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저만 모르는 겁니까?”
“우리 형님과 이 호위도 몰랐습니다. 셋의 공통점이 뭔지 아십니까?”
“…….”
“죄송하지만, 세 분의 공통점은 조금 연기가 서툴다는 점이지요.”
말을 마친 한빈은 뒤를 가리켰다.
한빈이 가리킨 곳에서는 설화가 천으로 팽혁빈의 눈을 가려 주고 있었다.
청화는 이무명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한빈이 다시 물었다.
“제가 해 드릴까요?”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우리는 잠시 술래가 되는 겁니다.”
한빈이 말을 마쳤을 때 귀빈실의 문이 열렸다.
끼익.
육중한 소리의 뒤를 이어 백독문의 무사들이 들어와서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들 중 가장 앞에 선 이가 정중하게 포권했다.
“변고가 생겨서 모시러 왔습니다. 그러니 따라 주시지요.”
“안내하시지요.”
눈을 가린 한빈이 앞을 가리키자 무사가 부축했다.
무사가 조용히 한빈을 이끌었다.
한빈은 살짝 헐거워진 천 사이로 무사들의 표정을 확인했다.
모두의 표정을 확인한 한빈은 보이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 * *
한빈과 적혈맹호대가 도착한 곳은 백독문의 백독전.
백독전은 단층짜리 전각으로, 이곳 백독문의 전각들 중에도 가장 컸다.
본래 여기에서 백독지회의 본대회가 치러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현재, 이곳 백독전에는 백독지회에 참가한 독인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백독지회에 참가한 문파의 수장들은 대부분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와 비교해 문도 중 서열이 낮은 자들은 대부분 멀쩡했다.
수뇌부가 눈을 뜨지 못하는 상황에도 그들은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독인들 대부분은 적과의 전쟁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독인들에게 전쟁이란 무엇일까?
독과 독충 그리고 독이 묻은 암기가 난무하는 대결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그들의 판단은 맞았다.
그들은 백독문주 백주천에 의해서 원인을 알아낸 상태였다.
지금 그들의 눈을 공격한 것은 바로 남만의 독충(毒蟲) 중 하나라는 맹충.
문파들의 수장들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하는 중이었다.
한빈 일행이 도착하자 백주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사의에서 일어난 백주천이 주의를 둘러봤다.
물론 눈은 찔끔 감고 있었다.
그의 상태는 다른 이들보다 심각했다.
눈꺼풀 사이에 진물이 흘러내려 굳어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려 하는 모습이다.
“모두를 모이라고 한 이유는 한 가지요. 아무래도 우리는 맹충에 당한 것 같소이다. 우리 백독지회에 참가해서 생긴 불상사인 만큼 백독문에서 책임지는 것이 맞으나…….”
백주천은 상세하게 지금의 상황을 털어놨다.
요약하자면, 모든 책임을 백독문에서 진다는 것이다.
다만, 이번 사태가 심상치 않으니 힘을 모으자는 것이다.
서열이 낮은 독인들은 그나마 멀쩡하기에 그들이 독인들의 눈이 돼 준다면 위험을 벗어나는 것은 가능할 것이라며 도움을 호소했다.
서열이 낮은 독인들이 멀쩡한 것은 문파의 어른들과 다른 시간에 식사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이유까지 밝힌 이유는 내분을 막기 위해서였다.
“……여기까지가 내가 할 부탁이요.”
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직설적인 그의 성격에 반해 지금의 단어 선택은 신중하기 짝이 없었다.
평소 같으면 ‘부탁’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 터.
모두는 말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삼독문의 문도희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백 문주님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저는 시기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언제가 좋다고 보오?”
“바로 지금이 적기라고 봅니다. 여기서 더는 시간을 끌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습니다. 맹충을 제거할 해약은 이곳에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마을까지는 가까우니, 근처에 있는 조위현까지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제안을 할까 합니다.”
“말씀하시오.”
“무리는 셋으로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각의 시간을 두고 방향을 나누어 가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이곳에 그 정도의 탈출구는 마련해 놓으셨겠죠?”
“흠……. 좋소. 그리하리다.”
“감사해요. 그럼 저희도 최대한 협조하도록 하겠습니다.”
문도희가 포권하자 뒤쪽에 했던 적혈문주도 맞장구쳤다.
“저희 적혈문도 협조하겠소이다.”
그때였다.
주변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탁.
탁.
창문들이 동시에 닫히더니 바로 출입문이 닫혔다.
끼익.
동시에 모든 이들이 출입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보이지는 않지만, 모두가 병장기를 틀어쥐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백주천이 미간을 좁히며 외쳤다.
“누구냐? 어서 모습을 드러내라!”
“하하, 우린 모습을 감춘 적이 없거늘…….”
상대가 말을 끊었다.
동시에 암기가 상대를 향해 날아갔다.
슉! 슉!
삼독문의 문도희가 준비하고 있던 암기를 날린 것.
상대는 자리에서 사라지고 문짝에는 암기가 박혔다.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클클, 지금 다들 뭐 하는 것입니까?”
“무슨 짓이냐?”
“물어본다고 순순히 얘기해 주는 상대가 이 바닥에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탈출하시겠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데 탈출이라니요? 혹시 경극 좋아하십니까?”
상대는 누가 봐도 이곳에 모인 독인들을 비꼬고 있었다.
독인들이 지팡이 대신 짚고 있는 병장기들이 부르르 떨렸다.
투두둑.
마치 추수 때 곡식의 껍질을 털어 내는 듯한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잠시 소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한빈은 흐트러진 안대 사이로 그들을 바라봤다.
예상대로 그들은 혈후의 수하들이 맞았다.
눈처럼 하얀 무복은 먼지 한 톨도 내려앉을 것 같지 않았다.
하얀 무복의 소맷자락에는 붉은색 잎 세 개가 수놓아져 있었다.
혈후의 이마에 있던 문양과 똑같은 것이 확실했다.
거기에 더해 한 명을 제외한 모두는 원숭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
백경이란 조직이 십이지신을 본떠 만든 것이라고 백룡의 고수가 말했었다.
지금 보니 그 말이 맞은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초아가 속한 백경은 토끼 가면을 쓰고 있었다. 십이지신 중 묘(卯)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토끼가 아니던가?
그와 비교해 혈후의 수하들로 보이는 이들은 신(申)에 해당하는 원숭이 가면을 쓰고 있다.
한빈은 일단 거기까지만 생각했다.
지금은 백경이란 조직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적에게 집중해야 했다.
한빈은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 사내를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가면을 벗은 것으로 봐서 그가 이 무리의 책임자가 맞았다.
그렇다면 혈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한빈은 미간을 좁혔다.
혈후가 이곳에 와야 한빈의 계획은 완성된다.
혈후가 오지 않는다면 명화에 낙인을 찍지 않는 꼴이 된다.
아무리 그림을 잘 그려 놔도 화공을 상징하는 낙인을 찍지 않는다면 그림의 알맹이가 없는 법이었다.
그들을 분석하고 있는 한빈과는 달리.
독인 중 눈이 멀쩡한 이들은 놀란 듯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들 대부분은 서열이 낮은 독인들.
난데없는 괴인들의 등장에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저, 저들은 대체…….”
“사부, 이상한 자들이 문을 막고 있습니다.”
“강호에서 저런 자들은 본 적이 없습니다.”
소란이 심해지자 백주천이 손을 들었다.
“모두 진정하고, 눈이 멀쩡한 독인들은 각파의 수장들을 보호한다.”
백독문의 주인으로서 내리는 지시였다.
백주천의 한마디는 효과가 있었다.
독인들은 문파별로 대열을 정비했다.
그들은 다시 병장기를 움켜쥐고 품속에서 암기를 꺼내 적을 상대할 준비를 했다.
눈이 멀쩡한 제자들은 그들의 수장들에게 적의 외모와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그 모습에 적의 수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앞으로 나온 그는 검으로 바닥을 찍었다.
쿵.
내공이 실린 소리.
그의 무공은 이곳에서 가장 고수라고 할 수 있는 백주천의 아래가 아니었다.
쿵.
사내는 자신의 내공을 자랑이라도 하듯 다시 검을 바닥을 찍었다.
이제 실내가 조용해졌다.
사내가 흡족한 듯 입을 열었다.
“수고를 덜어 주는군. 이제 임무는 끝났으니, 다들 복귀하도록.”
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내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듣는 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잠시 정적이 백독전 내부에 흘렀다.
모두가 귀를 쫑긋하고 있을 때였다.
터벅터벅.
대열을 갖춘 독인들 사이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눈이 멀쩡한 독인들은 그쪽을 바라봤다.
누군가 천천히 출입문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백독문의 제자들이었다.
앞장선 사람은 장자명의 사매, 백리연이었다.
그녀를 중심으로 약재를 구하러 갔던 백독문의 제자들이 모두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모두는 문 쪽으로 다가가는 그들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는 출입문을 막아서며 어디선가 원숭이 가면을 꺼냈다.
순간, 비교적 멀쩡한 백독문의 제자들이 놀라 외쳤다.
“배, 배신자다!”
“허, 백 사매가 어떻게……!”
모두가 놀랄 때였다.
사내가 입을 열었다.
“마지막이니 보여 주도록.”
“명에 따를게요.”
백리연이 포권하며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순간 얼굴이 찹쌀 반죽처럼 일그러졌다.
백리연뿐이 아니었다. 백리연을 따라 사내 옆에 선 백독문의 제자들의 모습이 모두 변했다.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은 백리연의 외모였다.
본래의 모습을 찾자 키도 커졌다.
거기에 누가 봐도 남자의 외모였다.
그들을 바라보던 독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근골을 저렇게 바꾸다니……!”
“여자에서 남자로 바뀌었어!”
“대체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독인들의 일부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적을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그들은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