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4. 눈치 싸움 (4)
한빈의 대답은 오만하기까지 했다.
스스로 생불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신묘한 의술이란 말도 나왔다.
그런 당당함이 독호에게는 묘한 신뢰감을 주었다.
독호의 눈이 반짝였다.
“네, 맞습니다. 소협.”
“그 전에 하나만 묻겠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소협.”
“환자는 백룡의 고수가 맞지요?”
“…….”
“그런 눈으로 보지는 마십시오.”
“어떻게 알았습니까?”
“밖에 있던 혈후라는 여인이 찾더군요.”
“혈후라, 그렇다면 이해가…….”
독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한빈이 슬쩍 턱짓했다.
“그럼 안내하시지요.”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독호가 재빨리 한빈의 앞으로 나섰다.
한빈과 독호가 자리를 떠나자 귀빈실의 안쪽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서로 눈치만 보는 상황.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아니면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지 그들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밖에서는 물론이요, 백독문의 안에 들어와서도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팽혁빈이었다.
팽혁빈은 조용히 장자명을 바라봤다.
“장 의원, 우리 아우는 괜찮은…….”
그는 말을 끊고는 주변을 살폈다. 벽에도 귀가 있다는 강호 속담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장자명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대공자, 여기는 괜찮습니다. 이곳은 제가 알기로 엿들을 자가 없습니다. 저 벽 뒤에는 무쇠가 버티고 있어서 웬만해서는 엿듣지 못합니다.”
“무쇠로 된 벽이라나요?”
“이곳은 말이 접객실이지, 사실상 감옥입니다.”
“자, 잠깐. 지금 뭐라 했소?”
“이곳은 귀빈 접객실이면서 감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말이 되오?”
“당연히 말이 되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독인, 아니 강호의 귀빈이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최고의 독인 또는 최고의 무공 고수가 아니겠습니까?”
“그건 장 의원이 말이 맞습니다.”
“네, 그러니……. 당연히 귀빈은 극진하게 대접해야 할 대상이면서도 최고의 경계 대상이지요.”
“허, 그래도 귀빈을 옥에 가둔다는 것은 좀처럼 이해가 안 되는군요.”
“대공자도 제가 얘기하기 전까지는 이곳의 정체를 모르지 않았습니까?”
“이것 참…….”
“독호 사숙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할 걸 알고 있을 겁니다. 다만, 자신이 경계하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을 전하고 싶은 것이겠죠. 그리고 환자를 만난 사 공자의 태도에 따라 우리를 처리하겠죠.”
“무림에서 유명한 청운사신과 적룡대협을 이렇게 대한단 말이오?”
“진짜도 아니지 않습니까? 대공자!”
“흠, 그건 그렇지만…….”
“그런데…… 저분은 대체 누구십니까?”
장자명이 바라본 것은 적룡대협이었다.
그 시선에 적룡대협이 헛기침했다.
“험!”
수염까지 쓸어내리는 모습은 마치 진짜 노고수 같았다.
하지만 장자명의 의심은 가라앉지 않았다.
청운사신이 가짜인데, 적룡대협이 진짜일 리가 없지 않은가?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접니다, 장 의원.”
“저라니요?”
“저, 이 호위입니다. 하하.”
이무명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너털웃음조차 노고수의 목소리였다.
물론 철저하게 연기하다 보니 사적인 자리에서도 연습한 특유의 웃음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이 호위라는 말에 장자명이 눈을 빛냈다.
“이 호위는 천리 표국의 상행을 따라잡기 위해 급하게 북해로 떠나지 않았습니까? 북해로 가는 상행이면 적어도 일 년은 걸릴 텐데요.”
“사정이 있어서 중간에 돌아왔습니다.”
“그럼 형님, 아니 천리 표국주는 못 만난 것입니까?”
장자명은 중간에 호칭을 바꿨다.
하북팽가 사람들 대부분은 천리 표국의 국주가 이무명의 형이라고 확신하고는 있었다.
문제는 그게 사실인지는 둘이 얘기를 나눠 봐야 아는 일이었다. 그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그냥 천리 표국의 국자이자 낭인왕 이세명일 뿐이었다.
이무명이 웃었다.
“형님은 만났습니다.”
“네?”
“형님을 만나서 모든 사정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돌아오셨다고요?”
“북해의 상행은 수하들에게 맡기고 중요한 일이 있다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낭인왕 어르신이 그 중요한 표행을 맡기고 돌아오셨다는 겁니까? 그 표행은 황궁에서 의뢰한 것이 아닙니까?”
장자명은 쉬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그는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의심병은 사숙인 독호만의 특징이 아니라는 것이다.
백독문의 제자들이라면 공통적으로 항상 의심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독호가 조금 과할 뿐, 장자명도 비슷했다.
이무명은 가볍게 웃었다.
“하하. 그 황궁의 의뢰보다 중요하니 이렇게 돌아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장 의원.”
“그보다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건 비밀입니다.”
“그럼 낭인왕 어르신은 어디 계시는 거죠?”
“그것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허, 외모만 우리 공자와 닮은 것이 아니라 이제는 성격까지 판박이가 되셨군요. 조금 서운합니다, 이 호위.”
“죄송합니다, 장 의원.”
“저는 예전의 이 호위 성격이 좋았습니다.”
“뭐, 변한 건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알게 되실 겁니다.”
팽혁빈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장 의원, 지금 이 호위의 사정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제 아우는 괜찮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니, 우리가 사 공자를 걱정할 처지는 아니죠.”
장자명이 손을 내저었다.
그의 표정에는 진심이 담겨 있다.
장자명은 사 공자 한빈을 걱정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만 주변 사람들과 자신의 안위가 걱정될 뿐이다.
그때였다.
밖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각의 호위하는 무사들이 어딘가를 보고 들뜬 목소리로 소곤대기 시작했다.
흥분한 듯 떠들고 있지만, 뭐라 하는지는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문틈으로 들리는 불확실한 목소리에 팽혁빈이 황급히 달려갔다.
그러고는 재빨리 문을 밀었다.
툭.
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장자명이 말했다.
“대공자, 제가 이곳은 감옥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강제로 열지는 마십시오. 그러다 큰일 납니다.”
“이것 참……. 후.”
팽혁빈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포기 못 하겠다는 듯 귀를 문에 갖다 댔다.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조금 더 듣기 위해서였다.
그제야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 저기 오네그려.
-그러게 말이야. 모두가 걱정했는데 저렇게 무사해서 다행이지 뭐야.
-문주님도 한시름 덜었네.
-그러게 말이야. 이제 폭풍이 지나갔으니 백독지회를 여는 일만 남았어.
팽혁빈은 눈을 감고 귀를 쫑긋 세웠다.
마치 토끼가 된 것처럼 귀를 세운 그는 밖에서 일어난 일을 머릿속으로 그려 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팽혁빈은 백독문의 모든 상황을 알지 못했다.
설마…….
팽혁빈은 눈을 뜨고 문고리를 바라봤다.
이걸 부수고 나가야 하나 고민되어서였다.
팽혁빈이 문고리에 댄 손을 멈칫하고 있을 때. 장자명이 그의 옆에 다가왔다.
“상황부터 살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대공자.”
말을 마친 장자명이 휘적휘적 벽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귀빈실의 족자를 걷어 냈다.
족자 뒤에는 조그만 상자가 나왔다.
장자명이 능숙하게 그 상자를 벽에서 뺐다.
순간 그 뒤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장자명은 뒤쪽을 보며 눈짓했다.
그 모습에 적혈맹호대로 변장한 그의 사매가 반대쪽으로 다가가 장자명과 똑같이 족자를 걷고 상자를 뺐다.
그 구멍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
팽혁빈은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저, 저건 통로가 아닙니까? 그럼 저곳으로 빠져나가면 되는 겁니까?”
“사람이 빠져나갈 수는 없지만, 밖의 정황을 살필 정도는 됩니다. 그리고 이건 사람이 빠져나가라고 만들어 둔 것이 아니라, 독기를 빼는 환기구입니다.”
“헉.”
팽혁빈은 이 방의 용도를 완벽하게 알 것 같자, 자연스럽게 신음을 흘렸다.
놀람도 잠시, 팽혁빈은 재빨리 구멍 쪽을 다가갔다.
지금 전각 앞으로는 짐을 실은 수레가 지나가고 있었다.
수레를 이끄는 여인의 모습이 왠지 낯이 익었다.
팽혁빈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적혈맹호대로 변장한 장자명의 사매가 통로를 통해 광경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멍으로 보이는, 수레의 앞에서 걸어오는 저 여인은 분명히 장자명의 사매가 맞았다.
방금 한빈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듣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믿어지지 않았다.
안력을 돋워 여인을 보니 변장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밖에 있는 무사들도 그 여인이 장자명의 사매라는 것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상황을 살피고 있을 때, 통로 밖으로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장자명의 사매가 비명을 터뜨렸다.
“어, 어떻게 내가 저기에…….”
그녀는 말을 맺지 못하고 쓰러졌다.
순간 장자명이 재빨리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사매! 정신 차리시오.”
“…….”
그녀가 혼절하자 장자명은 그녀를 귀빈실의 침상에 눕혔다.
귀빈실은 웬만한 세가의 가주전 규모였다.
장자명은 그녀를 눕히고 아무 말 없이 그 옆을 지켰다.
사실 장자명은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지금 침상에 누워 있는 사매보다 밖에 있는 사매가 진짜 같았기 때문이다.
비밀 공간에서 죽어 가던 사매를 발견했을 때는 피골이 상접해서 장자명이 아니었다면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지금은 많이 회복되었다고는 해도, 예전의 외모가 아니었다.
그때부터 팽혁빈과 장자명 그리고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장자명은 혼란스러워했다.
두 명의 사매 중 진짜가 누군지?
백독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반면 팽혁빈은 살짝 분노했다.
하북팽가의 대공자로 강호를 주유하며 이런 대접을 받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거기에 지금은 청운사신으로 변장한 상태.
청운사신은 하북팽가의 대공자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높은 배분에 있는 고수였다.
거기에 아우와 자신은 밖에 있던 혈후라는 여인을 막아 준 은인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이런 대우라니!
한참을 말없이 눈치만 살피던 그들은 조용히 문을 바라봤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듯이 말이다.
이 상황을 타개한 열쇠를 가져올 사람은 한빈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이미 해가 진 상태.
시간을 추측하려고 작은 구멍을 통해 밖을 살폈지만, 칙칙한 날씨 때문인지 달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팽혁빈은 조용히 호롱불을 바라봤다.
밖으로 뚫린 작은 구멍을 제외하고는 빛이 들어오는 곳이 없기에 귀빈실의 벽에는 호롱불이 박혀 있었다.
호롱불의 기름을 통해서 시간을 추측하려 했지만, 호롱불 안의 기름은 전혀 줄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우는 괜찮을까?
팽혁빈은 고개를 힘없이 저었다. 모두 자신이 풀 수 없는 문제였다.
그때였다.
조용히 문이 열렸다.
스르륵.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한빈이었다.
팽혁빈은 벌떡 일어나 한빈에게 달려갔다.
“한빈아, 괜찮은 것이냐?”
“네, 저는 괜찮습니다.”
“일은 잘됐느냐?”
“뭐, 그건 시간이 지나 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때 한빈의 뒤쪽에서 낯선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 처음 뵙겠소이다.”
“…….”
팽혁빈이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나는 백독문의 문주인 백주천이외다.”
“아, 백 장문이셨군요. 인사드립니다. 저는 하, 아니 하북팽가의 사 공자와 같이 온 청운사신이라고 합니다.”
“위명은 익히 들었소이다.”
서로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귀빈실의 구석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타다닥.
다름 아닌 장자명의 사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