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 눈치 싸움 (3)
무슨 이유 때문인지 황궁은 어느 순간부터 그 천산혈랑에 관한 정보를 철저히 틀어막고 있었다.
황궁뿐 아니라 하오문과 개방에서도 정보를 막고 있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독호의 오해가 있었다.
처음부터 황궁에서 정보를 막은 것은 아니었다.
가장 먼저 막은 것은 십대세가를 견제하는 구대문파였고, 그 뒤 현비와 효명 공주를 견제하는 세력들이 정보를 막은 것이다.
다만, 황궁에서 어떤 조처를 내렸는지는 황궁에 있는 끈을 통해서 들었다.
황궁에서는 천산혈랑의 발톱으로 단검을 만들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단검을 왕자와 공주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남은 두 자루는 천산혈랑을 잡은 고수에게 내렸고 말이다.
그 검이 바로 혈랑검이었다.
딱 보기에도 저건 천산혈랑의 발톱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저자가 가지고 있단 말인가?
이런 경우는 셋 중 하나였다.
상대가 왕자거나, 아니면 천산혈랑을 잡은 고수이거나.
그도 아니라면 천산혈랑을 잡은 고수와 친분이 있든가.
이 셋 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무조건 황궁과 끈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강호인에게 황궁이란 단어는 독약이란 말보다도 꺼림칙한 말이었다.
살짝 긴장하고 있는 독호에게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한빈이 우혈랑검의 검신을 검지와 엄지로 슬쩍 쥐고 방향을 돌렸다.
휙.
손잡이가 자연스럽게 검호 쪽으로 돌아갔다.
“그럼…….”
검호가 혈랑검을 받았다.
손으로 쓱 쓰다듬고 난 그의 눈이 커졌다.
설마 했는데 진짜 혈랑검이 맞았다.
가벼우면서도 무쇠도 잘라 버릴 정도의 예리함은 영물의 발톱이 분명했다.
혈랑검과 한빈을 번갈아 보던 검호가 물었다.
“이, 이게 진짜 천산혈랑의 발톱으로 만든 물건이란 말입니까? 제가 알기로는 이건 황궁에서 만들어진 물건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맞습니다.”
“그럼 혹시 황궁에서 나오신…….”
“그런 오해는 하지 마시고요. 황궁에서 만들어서 제게 선물로 준 단검입니다. 혈랑검이라는 이름의 물건입니다.”
“혈랑검이라……. 들어 봤습니다. 황궁에서 왕자와 공주들에게 한 자루씩 나눠 줬다고 들었습니다. 두 자루는 혈랑공자라는 분에게 하사했다고 들었는데, 왜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가지고 계시는 겁니까? 혹시 혈랑공자라는 정체불명의 고수분과는 어떤 관계기에…….”
독호가 한빈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한빈이 표정의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제가 바로 혈랑공자니까요.”
말을 마친 한빈은 청화를 향해 턱짓했다.
청화가 달려오더니 품에서 좌혈랑검을 꺼냈다.
한빈은 좌혈랑검을 받아 들고는 슬쩍 검집에서 뽑았다.
스륵.
그 모습에 검호가 말했다.
“똑같은 혈랑검이 두 자루라니…….”
살짝 놀란 검호의 앞에 설화가 불쑥 나타났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그의 손에서 우혈랑검을 낚아챘다.
설화는 마치 우혈랑검을 슬쩍하려는 도둑을 보듯 검호를 바라봤다.
단검을 내준 검호가 입맛을 다셨다.
“진위를 살피기 위함이었지, 강탈한 생각은 추호도 없소이다.”
검을 다시 검집에 넣은 설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
“똑같은 게 아니에요. 이건 우혈랑검, 저건 좌혈랑검이에요.
“이름이 있군. 죄송하네그려.”
독호가 살짝 당황했다.
빼앗을까 봐 기분 나빴던 것이 아니라, 이름을 잘못 불러 삐졌다니!
이건 독호도 상상 못 한 상황이었다.
“네, 우리 공자님이 붙여 주신 이름이에요.”
“그런데 자네는 누구지?”
“저는 공자님을 모시는 설산신녀 설화라고 해요.”
“자네가 설산신녀라고?”
“네, 저기 옆쪽은 청산신녀 당청화고요.”
설화가 청화를 가리켰다.
청화는 쑥스러운지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다른 때와는 달리 청화에게 성까지 붙여서 부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설화가 기대하던 반응이 나왔다.
“혹시 사천당문의 자제인가?”
“네, 맞아요. 직계예요. 그것도 독왕 어르신이 점찍어 둔 후계자죠. 저랑 같이 공자님을 모시는 동생이에요.”
설화는 청산유수처럼 말을 이었다.
독인들에게 사천당문이란 선망의 대상.
독문의 양대산맥이라는 백독문도 사천당문을 평할 때는 조심스럽다.
그때 유난히 거슬리는 말 하나가 귀에 박혔다.
그것은 바로 ‘모신다’라는 표현이었다.
그렇다면?
독호의 머릿속에 모였던 정보가 엉키기 시작했다.
하북팽가는 십대세가 서열 중 아래쪽을 차지하는 가문.
그런데 천하 십대세가 중 가장 위쪽이라는 사천당문의 직계가 하북팽가 사 공자의 시녀라고?
독을 연구하며 백독문에서 묻혀 지냈어도 귀와 눈을 감고 산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하북팽가의 사 공자를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자신의 정보력에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리로…….”
독호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새카맣게 젊은 후배에게 존칭을 쓰다니!
사천당문의 직계가 모신다는 표현을 썼어도 자신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다.
독호는 잠시 수하들을 바라봤다.
수하들이 시선을 피한다.
독호의 표정이 구겨졌다. 수하들이 벌써 눈치챈 것이 분명했다.
체면이 땅끝에 떨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독호는 한빈 일행을 직접 안내하기로 했다.
* * *
얼마나 갔을까.
한빈의 눈에 커다란 전각이 들어왔다.
그의 옆에 있는 장자명은 입을 삐죽 내밀고 있다.
한빈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한빈이 사매의 정체를 감추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적은 사매 일행의 숨을 붙여 놨다.
머릿수를 줄여서 백독문에 타격을 입히려는 것이 아닐 것이다.
숨은 붙여 놓은 상태로, 정보가 있다면 마저 캐낼 의향이 있었던 것이다.
구출한 후 한빈은 그들과 면담을 했다.
문제는 그들 중 누구도 정신을 잃고 나서의 기억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미혼술 혹은 섭혼술의 후유증일 수도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들의 목표를 알아내려면, 이쪽의 패를 숨기는 것이 맞았다.
언제까지?
적이 이를 드러낼 때까지!
이것이 한빈의 기본적인 계획이었다.
이런 계획을 모두에게 말해 줄 수는 없었다.
진실을 안다면 무의식중에 드러날 수도 있는 법이다.
이제 접객실이 있는 전각이 코앞이다.
먼저 이곳의 수장과 백룡문의 고수를 만나는 것이 먼저였다.
그들을 만나고 나면, 혈후와 백경이 왜 이곳을 노리는지 명확해질 것이 확실했다.
한빈이 계획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뒤쪽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타다닥.
타다닥.
고개를 돌려 보니 정문을 지키는 무사들이 분명했다.
그들은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독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한빈의 일행을 다시 한번 바라본다.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다.
독호가 상체를 기울이자 무사는 그제야 귓속말로 뜻을 전했다.
순간 독호의 눈이 커졌다.
“정말이냐?”
“네, 맞습니다. 지금 도착했습니다.”
“밖에 있는 적들은 어찌 되었느냐?”
“모두 물러갔습니다. 그러니 무사히 도착한 것이겠죠.”
“앞장서거라.”
“존명.”
무사가 포권하며 몸을 돌려 왔던 방향 그대로 달렸다.
다급한 사안인 듯 경공술까지 펼친다.
독호가 한빈을 바라봤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얼마든지요.”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독호가 몸을 날렸다.
휙.
바람 소리를 낸 독호는 이내 앞서가는 무사를 따라잡았다.
그들이 사라지자 장자명이 다가왔다.
“팽 공자, 대체 무슨 일입니까?”
“독각을 구하러 갔던 일행이 무사히 도착했답니다.”
“자, 잠시만요. 독각을 구하러 간 일행이라니요?”
“무사의 말에 의하면 실종됐던 일행들이라더군요.”
“실종됐던 백독문의 제자라면…….”
장자명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적혈맹호대로 변장한 사매와 백독문의 제자가 있었다.
그들은 한빈과 장자명의 대화를 못 들은 것처럼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장자명은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다.
지금 말도 안 되는 일이 백독문에서 벌어지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장자명은 한빈과 동행하며 많은 일을 겪었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똑같이 생긴 괴인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그리고 감쪽같은 변장술을 펼치는 자객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장자명은 다시 한번 저쪽에 있는 자신의 사매를 바라봤다.
혹시나 사매가 가짜일까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사매가 가짜일 리가 없었다. 사매를 구출하고 나서 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지난 삼 년간 못다 한 이야기를 날이 틈틈이 나누며 살짝 감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사매와 둘만 아는 비밀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사숙인 독호가 또 다른 사매 일행을 마중 나간 상태.
둘 중 하나는 가짜라는 말이었다.
과연 누가 가짜일까?
변화무쌍한 장자명의 표정을 본 한빈이 작게 말했다.
“장 의원이 걱정하는 게 뭔지는 알겠는데, 너무 티를 내지는 말죠.”
“네?”
“장 의원, 나를 믿죠?”
“제가 언제 팽 공자를 안 믿는다고 했습니까?”
“그럼 편안하게 상황을 지켜보시죠, 장 의원.”
“그, 그래도 될까요?”
“그런 질문은 나를 안 믿는다는 증거입니다. 실망입니다, 장 의원.”
“아, 아닙니다. 믿습니다.”
잠시 말이 끊기고 전각의 앞에는 긴 침묵이 찾아왔다.
그 침묵이 끊긴 것은 바로 독호가 돌아오고 나서였다.
독호는 적룡대협과 청운사신에게 정중하고 포권한 후 한빈을 보며 말을 이었다.
“급한 일 때문에 대협들께 폐를 끼쳤구려.”
“괜찮습니다. 뭐, 문밖에서 이슬도 맞았는데 그깟 반 시진 정도야 어떻겠습니까?”
“험, 그건 백독문 내에 사정이 있어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구려.”
“저는 한시라도 빨리 환자를 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아, 그 말씀이라면……. 내 기별을 넣어 두었소.”
“참, 급한 일을 잘 해결되었습니까?”
“불행 중 다행인지, 다행 중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끝났소이다.”
묘한 말을 남긴 독호를 보며 한빈이 웃었다.
대충은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독각을 구하러 나갔던 백독문의 제자는 무사하다는 이야기였다. 다만, 독각을 못 구해 왔다는 것이 불행이라는 뜻.
한빈은 환자의 상태가 궁금했다.
독각으로 치료할 수 있는 병 혹은 독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독각이 독인들에게는 영약이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치료할 수 있는지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환자가 독각이 필요하다는 것도 장자명의 사매에게 들었을 뿐, 그 이상은 한빈도 모른다.
사매에게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백독문 안에 독각을 던진 것이 적중한 것일 뿐, 나머지는 순전히 운이라고 봐야 했다.
한빈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하하, 잘되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그럼 이리 오시지요.”
독호는 백독문에서 가장 큰 접객실로 그들을 안내했다.
대화를 나누는 도중 독호는 계속 문 쪽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환자와의 만남은 독호의 권한이 아닌 듯싶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수하가 들어왔다.
수하의 보고를 받은 독호가 얼굴을 활짝 폈다.
“준비됐습니다. 그런데 한 분만 가야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하북 땅에서 신묘한 의술로 이름을 떨치며 생불이란 이름을 듣고 있는 제게 도움을 청하시는 게 확실하다면요! 기꺼이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