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 눈치 싸움 (2)
장자명이 조심스럽게 한 발 앞으로 나왔다.
“팽 공자님!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독호 대협의 말씀대로 제가 천수장주라는 걸 증명해 주면 됩니다, 장 의원.”
“그야 당연히…….”
장자명이 말끝을 흐렸다.
처음 앞으로 나왔을 때는 누구보다 표정이 당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어루만졌다.
사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장자명은 코웃음 쳤었다.
한빈이 천수장주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증명이랄 것도 없었다.
붉은 무복이 그 증거요, 한빈의 얼굴 자체가 호패나 다름없었다.
거리를 거닐 때면 허리를 숙이는 마을 사람들 또한 그 증거였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북에서의 이야기라는 점이었다.
이곳에서는 달랐다.
천수장주를 나타내는 신분 패가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천수장주를 나타내는 증거 따위는 없었다.
장자명도 사숙인 독호의 말에 백번 동의한다.
뛰쳐나갔다가 돌아온 제자를 믿어 주는 문파가 있던가?
정파가 아니라 사파나 독문이라도 똑같다.
상황을 바꿔 생각해 보면 더욱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돌아온 시점 또한 묘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독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끼어들었다.
독호의 머릿속에 뭔가 석연치 않은 단어가 걸려서였다.
“혹시 지금 팽 공자라고 그랬느냐?”
“네, 사숙.”
“그럼 이 소협이 혹시 하북 쪽에서 온 분이더냐?”
“네, 맞습니다.”
“하북이라면 설마? 하북팽가는 아닐 테고…….”
“왜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북팽가가 맞습니다.”
“하북팽가라고?”
“네, 그렇습니다. 참, 그러고 보니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천수장의 장주라는 건 하북 땅에서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하북팽가에서 생불이라 불리는 천수장주를 배출해 냈다는 말이더냐?”
“네, 맞습니다. 팽 공자는 하북팽가의 사 공자입니다. 그래서 서찰에도 하북팽가 식구들의 안전을 부탁하지 않았습니까?”
“생각해 보니…….”
독호는 서찰의 내용을 떠올렸다.
그 서찰에는 분명히 하북팽가 일행의 안전을 부탁하는 내용이 있었다.
그때 장자명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저도 천수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흠, 그런데 조금 이해가 안 가는 구석이 있구나.”
“그게 무엇인지요? 사숙.”
“저 소협을 보면…….”
독호는 더는 말을 하지 않고 턱짓으로 한빈의 허리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한빈이 애병인 월아가 자리하고 있었다.
독호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장자명은 그제야 독호가 무엇을 묻는지를 알아챘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우리 팽 공자는 도를 쓰지 않습니다.”
“팽가의 직계가 도를 쓰지 않는다고?”
질문을 던진 독호는 뒤쪽에 신호를 보냈다.
동시에 백호문의 무사들이 병장기를 잡은 왼손에 힘을 주었다.
오른손을 슬며시 품에 집어넣는 모습이 여차하면 암기를 날릴 생각인 듯싶었다.
장자명이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우리 팽 공자는 도(刀)가 아니라 검(劍)을 씁니다. 하북팽가의 직계가 검을 쓴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이것 역시 하북 땅에서 꽤 유명합니다. 아마 우리 백독문에서도 아는 자가 있을 겁니다.”
“그래?”
독호가 뒤쪽을 바라봤다.
그중 무사 하나가 뛰어나왔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인 뒤 말을 이었다.
“장 사형의 말이 맞습니다. 제가 하북 근처에 갔다가 들었던 이야기인데,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조금 특이하다고 들었습니다.”
“흠, 계속 말해 보아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북제일의 겁쟁이라고 놀림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도를 쓰지 않는 것도 맞습니다.”
“도가 아니라 검을 쓴다고?”
“하북팽가의 직계들은 거도를 들지 않습니까? 사 공자는 힘이 없어서 검을 드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흠, 그건 말이 되는구나.”
“그럼 천수장주가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것도 들어 보았느냐?”
“그것은 하북 사람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습니다.”
“그런 중요한 소문이 왜 퍼지지 않은 것이지?”
“그건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천수장주라는 것과 검을 쓴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오호라. 혹시 네가 알고 있는 것이 더 있더냐?”
“하북팽가의 사 공자의 사부는 무제자 홍칠개라고 합니다.”
“개방의 장로 홍칠개 대협?”
“네, 맞습니다.”
“그럼 여기 계신 청운사신과 적룡대협은?”
“항간의 소문으로는 청운사신과 적룡대협의 후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부가 셋이라는 것이냐? 아무래도…….”
“가능한 일이라고 합니다. 하북에서는 최초로 사제 계약서라는 것을 썼다고 합니다. 한마디 더 하면 외모는…….”
그는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약제와 독초를 구하기 위해서 하북과 산서를 넘나드는 자였다.
그런 이유로 그는 산서뿐 아니라 하북의 사정도 훤하게 알고 있었다.
다만, 갈 때마다 소문이 달라지기에 이해가 안 되는 점은 적당히 가공했다.
힘이 없어 검을 든다는 것도 그의 상상력에서 나온 보고였다.
수하의 보고를 듣던 독호가 조심스럽게 한빈을 바라봤다.
시선을 마주한 한빈이 웃었다.
“대충 맞는 얘기는 있지만, 모든 것이 일치하지는 않는군요. 검이 편해서 도가 아닌 검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외모를 설명한 부분에서는 좀 서운합니다. 그래도 하북 지역에서는 옥면공자라는 별호까지 듣는 형편인데요.”
“흠.”
장자명이 입을 가리며 헛기침했다.
그 모습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닙니까? 장 의원?”
“옥면공자는 저도 처음 들어 보는…….”
“장 의원이 천수장에서 치료하느라 바빠서 못 들은 것 같군요. 하긴, 장 의원은 주변 백성들이 관음보살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몸을 돌보지 않고 환자에게 신경을 썼으니, 못 들은 것도 이해가 갑니다. 오죽하면 마을 사람들이 신의라고 하겠습니까?”
한빈은 장자명의 칭찬 속에 자신에 대한 자랑을 살짝 녹였다.
전면에 드러난 것은 장자명에 대한 칭송.
순간 장자명은 가슴이 뿌듯해졌다.
영웅으로 만들어 준다는 한빈의 약속이 첫걸음을 뗀 것만 같았다.
장자명이 손을 내저었다.
“아, 그, 그건 과찬이십니다.”
그들의 대화에 독호가 눈을 크게 떴다.
천수장에는 다른 의원인 신의에 대해서도 들어 봤다.
독호가 끼어들었다.
“누렇게 뜬 얼굴에 곧 죽을 것 같은 흐리멍덩한 눈으로도 치료의 손길을 멈추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의원이 신의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게 장자명 의원입니다.”
“허.”
독호가 작게 탄성을 흘렸다.
상대의 신분을 밝히기 위한 대화에서 갑자기 백독문의 제자가 신의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목적도 잊은 채 장자명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한빈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신분을 증명하는 것이겠죠.”
“네, 맞습니다.”
장자명도 고개를 끄덕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장자명은 이 상황 자체가 불만이었다.
자신의 사매를 그들에게 보이고 사정을 설명하면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끝난다.
그런데 한빈은 끝까지 사매의 신분을 감추라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장자명은 지금의 상황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사숙인 독호는 의문이 풀리지 않으면 여기서 한 걸음도 들여보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장자명은 힐끔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이 검지를 들어 좌우로 까닥인다.
장자명이 할 수 없다는 고개를 돌려 독호를 바라봤다.
“이 정도면 대충 신분에 대한 증명은 끝난 게 아닙니까? 사숙.”
“잠시만 기다려 봐라.”
“또 증명해야 할 것이 남아있습니까?”
“하북팽가의 사 공자와 천수장주가 동일인임은 알았다. 하지만 증명할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얼마든지요.”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걸 증명해야 할 차례입니다.”
그의 말에 옆에 있던 장자명이 헛숨을 터뜨렸다.
“헉, 아니 사숙…….”
백독문을 떠나온 지 삼 년이 넘었지만, 어떻게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사숙인 독호는 예전부터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았다.
보통 무림인들은 사람을 한번 믿고 나면 끝까지 신뢰하기 마련인데, 독호만은 달랐다.
믿는다고 해 놓고도 계속 상대를 의심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장자명이 백독문을 뛰쳐나온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사숙인 독호 때문이 아니던가?
기가 찬 듯 한숨을 내쉬며 독호를 바라보는 장자명.
그 시선에 독호가 아무렇지 않게 한빈을 바라봤다.
그의 태도는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상대를 아직 믿지는 않지만, 상대가 진짜 천수장주라면 반드시 그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문파의 이인자로서는 부적격한 자였다.
문파의 기둥이 갈대처럼 흔들린다면 문도들은 어찌 되겠는가?
하지만 한빈은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은 진심이었다.
이런 아수라장에서 독호의 저런 성격은 살아남기에 최적이었다.
한빈은 전생에 작전을 앞둔 귀검대에게 매번 같은 말을 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고 말이다.
쉬운 길이 적의 함정일 수도 있다.
그걸 가정하고 어려운 길에 함정을 파는 경우도 있었다.
의심하고 의심하되, 선택은 빠르게!
이것은 한빈이 수하들에게 당부했던 말이었다.
이제 독호가 선택해야 할 때였다.
한빈이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럼 제가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면 되겠습니까?”
“그래 주면 고맙겠소, 소협.”
“제가 증명 못 하면 접객실에 남아 있는 하북팽가의 식솔들도 위험하겠지요?”
“험.”
놀란 독호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대충 눈치챘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여기에 발을 묶어 둘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건 오해…….”
“괜찮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을 튕겼다.
탁!
그러자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있던 설화가 바람처럼 나타났다.
사사-삭.
그 모습에 독호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설화가 보여 준 경공술에 놀란 것이다.
그때 설화는 품에서 단검 한 자루를 한빈에게 건넸다.
한빈은 그 단검을 뽑았다.
스륵.
가볍게 뽑힌 단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무튀튀한 검신은 어찌 보면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순간 독호의 뒤쪽에 있던 무사들이 달려왔다.
파바닥.
뽑힌 단검을 본 독호가 다급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모두 멈춰라!”
뒤쪽에서 한빈을 향해 달려오던 백독문의 무사들이 그대로 멈췄다.
하지만 손에 든 병장기는 그대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겠다는 듯 그들은 독호와 한빈을 번갈아 바라봤다.
잠시 어색한 정적이 주변을 뒤덮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독호였다.
“그건 혹시 천산혈랑의…….”
“네, 맞습니다. 천상혈랑의 발톱으로 만든 물건이죠.”
“봐도 되겠습니까?”
독호의 표정이 변했다.
독을 다루는 이는 영약과 영초 그리고 내단에 민감하기 마련이었다.
독호가 천산혈랑이란 영물을 모를 수 없었다.
하북 지역에 나타났다고 하는 얘기도 들었다.
그 내단과 사체는 은밀하게 황궁으로 옮겨졌다는 이야기까지도 알고 있다.
독호는 황궁에도 끈이 있었다.
하지만 그 천산혈랑을 누가 잡았다는 것까지는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