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611화 (597/621)

611. 눈치 싸움 (1)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이분은 제 사부님 중 한 분이신 적룡대협이십니다.”

“적룡대협이시라고요?”

독호가 적잖게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청운사신에 천수장주까지만 해도 놀라운데, 적룡대협까지 백독문에 왔다니!

놀람도 잠시, 의심 한 줄기가 독호의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그때 붉은 도포를 휘날리며 수염을 쓸어내리는 적룡대협.

그는 어색하게 독호를 향해서 포권했다.

“나는 대협이란 허울 좋은 호칭을 듣는 적룡이외다. ”

“아,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독호가 마주 포권했다.

슬쩍 눈치를 보니 고수의 기세는 느껴지지 않았다.

적룡대협이 맞는다면 분명 반박귀진의 경지에 오른 것이 분명했다.

고수의 기세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반쯤은 넘어간 것이다.

독호가 눈을 빛냈다.

말도 되지 않는 상황에 독호가 놀라워하고 있을 때였다.

청운사신이 헛기침하며 적룡대협을 바라봤다.

“흠.”

“아, 청운사신도 미리 와 계셨구려.”

마치 아는 듯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청운사신은 지금 석상이 되어 있었다.

그의 시선은 한빈에게 꽂혀 있었다.

아우인 한빈의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이 아니었다.

피에 절은 무복은 피가 말라서 풀을 먹인 것 같았다.

한참을 보던 팽혁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우인 한빈을 보고 있자니 이해가 안 되는 점이 하나 있었다.

처음에는 설화와 청화의 부축을 받았다.

팽혁빈이 보기에 한빈의 몸에는 한 줌의 내공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이전처럼 경공술을 펼쳤다.

피곤에 찌든 모습이긴 해도, 경공술만 본다면 부상을 입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과연 어떻게 된 일일까?

모두의 시선에도 한빈은 먼 산을 보고 있었다.

물론 먼 산이 아니라 용린검법의 구결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심화편]

[속(速) : 일(一)]

[……]

다른 구결은 텅텅 비었지만, 속의 구결은 하나 남아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회복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이 구결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새로 얻은 초식 덕분이었다.

‘대기만성.’

이 초식을 펼치는 데는 공력도 구결도 필요하지 않았다.

대기만성은 한마디로 구결의 회복 속도를 높여 주는 초식이었다.

한빈은 대기만성을 펼치고 혈후와 대화를 나누었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대기만성을 펼치고 나니 바로 다섯 개의 구결이 회복되었다.

그 후에는 일각에 하나씩 구결이 자연스럽게 회복됐다.

그 후 대기만성을 다른 구결로 옮겼다.

한빈의 선택은 바로 지(智)의 구결이었다.

지의 구결은 상단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즉, 머리를 쓰는 데는 이만큼 효과적인 구결이 없다는 말이었다.

문제는 지의 구결은 저절로 회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학자와의 대화 혹은 사건 해결과 같은 상황을 통해서만 늘어나는 것이 지의 구결이었다.

그렇다면 대기만성은 지의 구결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대기만성은 한빈에게 가장 필요한 구결이 맞았다.

대기만성이 영향을 끼치는 구결은 하나.

한빈은 지금 막 구결을 바꾸었다.

순간 용린검법의 심화편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심화편]

[……]

[지(智) : 오(五)]

지의 구결이 바로 늘어났다.

이건 상상도 못 할 만큼 효율이 좋은 초식이었다.

대상 구결을 바꾸자 바로 텅 비어 있던 구결이 다섯 개로 변했다.

이것만 잘 이용한다면, 모든 구결을 순식간에 다섯 개씩 회복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어찌 보면 천급 초식 중에서 최고의 초식이라 할 수 있었다.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그의 표정 변화를 모를 리 없었다.

가장 당황한 것은 다름 아닌 팽혁빈이었다.

그는 아우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결과는 항상 좋았지만, 과정까지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우가 저런 표정을 짓고 난 뒤에, 주변 사람들은 항상 생고생을 했다.

말이 좋아 생고생이지, 죽을 고비를 한두 번 넘긴 것이 아니었다.

팽혁빈은 적잖게 강호의 칼밥을 먹었다고 자부하는 무인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가 이제까지 홀로 겪은 수많은 사건보다 한빈과 함께한 사선이 더 많았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아우는 사건 제조기란 말이었다.

그리고 저 웃음은 사건의 전조 현상이고 말이다.

그때 팽혁빈의 귓가에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대협.”

“아닙니다.”

“불편하시면 먼저 쉬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걱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는 바로 적룡대협이었다.

“걱정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팽혁빈은 자연스럽게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힐끔 적룡대협을 확인했다.

누군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적룡대협을 바라보자 조금 전 마주했던 혈후가 떠올랐다.

혈후라는 자에 관한 것은 탈출하느라 경황이 없어 물어보지도 못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혈후의 무공은 무시무시했다.

아우를 구출하겠다는 신념이 없었다면 그리 능청스럽게 청운사신을 연기할 수는 없었을 것.

그는 오로지 한빈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혈후와 마주했다.

팽혁빈은 이 순간까지 옆을 바라볼 생각도 못 했다.

혈후라는 여인의 무공은 그만큼 대단했다.

기세만으로도 피부가 따끔거리게 할 정도라니!

적룡대협을 바라보며 혈후를 떠올리던 팽혁빈이 미간을 좁혔다.

이제 여유가 생기니 적룡대협이라 밝힌 이의 신분이 궁금해진 것이다.

분명히 누군가 적룡대협으로 변장한 것이 분명했다.

적룡대협을 보던 팽혁빈의 눈이 커졌다.

덧붙인 턱수염 속에 가려진 얼굴이 왠지 눈에 익었다.

“허…….”

팽혁빈이 자신도 모르게 헛숨을 뱉었다.

그 얼굴은 아우인 한빈의 모습과 비슷했다.

청운사신으로 변장한 팽혁빈은 아우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다시 적룡대협을 바라봤다.

분명 상대는 한빈에게 허락을 받고 천리 표국의 이세명을 쫓아 북해로 향했던 이무명이었다.

여러 감정이 팽혁빈의 생각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중 가장 큰 것은 불안감이었다.

그가 이렇게 왔다는 것은 천리 표국의 표행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었다.

할 말은 많지만, 지금은 물어볼 수도 없는 처지였다.

아니나 다를까.

독호가 반응했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발견한 것이다.

서로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서로 협력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서로 경계하기도 하는 것 같은 묘한 상황이었다.

독호는 백독문의 지낭이라 불리는 무인이었다.

그는 남을 함부로 믿지 않는 성품을 지녔다.

묘한 분위기에 독호가 다시 머리를 굴렸다.

독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상황을 바라봤다.

적룡대협에 청운사신 그리고 천수장주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거기에 천수장주가 적룡대협과 청운사신의 제자라고?

독호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아직 사선이었다.

백독문의 독진은 사선을 두 단계로 나눈다.

첫 번째 사선은 누가 봐도 흉흉한 몰골로 길이 나 있는 담장 아래였다.

죽은 나무와 풀 그리고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첫 번째 사선을 알아본다.

하지만 두 번째 사선은 독인들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이 바로 두 번째 사지였다.

발아래에는 정상적으로 풀이 자라나 있으며 흙도 보기 좋은 갈색이었다.

독호는 아직 완전히 그들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적혈맹호대를 안으로 들인 이유도 상대를 믿지 못해서였다.

만약 상대가 확신을 못 준다면?

먼저 들어간 적혈맹호대를 인질로 삼을 예정이었다.

비록 적이 밖에서 백독문을 노리고 안쪽에는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있지만, 독호는 말만으로 상대를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동안 그가 강호에서 먹은 독밥은 쏠쏠했다.

거기에 더해 이곳에서 문주를 모시고 백독문을 천하제일의 독문으로 만든 그였다.

독호는 재빨리 표정을 감추고 한빈을 바라봤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청운사신도 적룡대협도 아니었다.

백룡의 수장을 치료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천수장주였다.

어찌 보면 그의 서찰 하나에 대문을 열지 않았던가?

독호가 나긋나긋한 말투로 물었다.

“대, 아니 소협. 아까 한 말이 진심입니까?”

그는 호칭을 수습했다.

대협이라고 하자니 상대가 너무 젊어서였다.

사실 천수장주가 이렇게 젊은지도 오늘 처음 알았다.

산서에서도 천수장주의 위명은 꽤 퍼져 있었다.

대가 없이 굶주린 백성을 치료하고 집 없는 이들에게 땅까지 대여해 줬다는 이야기는 고관대작에서부터 거지들까지 모두 아는 이야기였다.

덕분에 천수장이 있는 마을에서는 현감보다도 입김이 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아까 서찰에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는…….”

독호가 슬쩍 눈치를 보자 한빈이 손뼉을 쳤다.

짝.

“아, 제가 그 서찰을 남겨 드렸지요. 당연합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닙니다.”

“대체 무엇을 원하십니까? 아니…….”

독호는 말을 끊었다.

그는 상대의 진의를 파악하고 싶었다.

그런데 대화가 이어지자 묘하게 상대에 끌려갔다.

독호는 이런 분위기를 끊고 싶었다.

지금의 대화는 자신이 주도해야 했다.

그의 표정을 본 한빈이 손짓했다.

“천천히 말씀하시지요.”

“본론을 이야기하기 전에 소협이 천수장주라는 증거가…….”

말끝을 흐린 독호가 슬쩍 눈치를 봤다.

생불이라 불리는 천수장주라면 분명히 백룡의 환자를 치료할 가능성이 있었다.

확률은 반반.

말은 아끼되 조심하는 것이 현재는 최고였다.

조심스러운 독호의 표정을 본 한빈이 말을 이었다.

“장자명 의원을 불러오시지요.”

“장자명이라면?”

“네, 백독문을 뛰쳐나갔다가 오늘 돌아온 장자명 의원 말입니다. 집을 나갔다고는 하나 백독문의 식구이니 가장 믿을 만할 게 아닙니까?”

“흠.”

독호가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했다.

단순한 헛기침이 아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뒤쪽의 무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 눈짓 한 번에 무사가 뒤로 슬금슬금 빠지더니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들은 잠시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것은 독호의 의도였다.

사실 지금은 그런 잡다한 얘기로 시간을 때울 때가 아니었다.

독호도 알고 한빈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에는 절차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감정을 숨기고 대화를 이어 나가던 독호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장자명이 적혈맹호대 대원 몇과 도착해 있었다.

그 뒤쪽으로는 적혈맹호대 대원들보다 많은 백독문의 무사들이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독호는 장자명만을 데려올 것을 지시하지 않았다.

백독문의 정예 무사들도 함께 이곳으로 오라 명했다.

정예 무사들은 장자명과 적혈맹호대를 호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히는 감시였다.

뒤쪽에 도열한 백독문의 문도들을 보자, 독호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여유를 되찾은 것이다.

독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장자명을 데려왔습니다. 어떻게 증명하시겠습니까? 소협.”

“장 의원에게 직접 물어보시죠.”

“집을 나갔다 돌아온 친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는 일이죠.”

“부족한 부분은 제가 보충하겠으니, 일단 물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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