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610화 (596/621)

610. 비몽사몽(非夢似夢) (5)

한편 한빈은 신호를 보낼 틈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직 반 정도는 잠이 든 상태.

그렇다고 성과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용안으로 구결을 획득하셨습니다.]

[천급 구결 성(成)을 획득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모아 놓은 천급 구결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천급 – 대(大), 만(晩), 기(器), 성(成)]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결과를 기다렸다.

구결이 깜짝이는 것을 보아 새로운 천급 초식이 조합되는 것이 분명했다. 이어지는 글귀에 한빈의 눈이 커졌다.

[천급 초식, 대기만성(大器晩成)을 획득하셨습니다. 대기만성은 용린검법의 심법 중 하나입니다. 대기만성은 장인이 그릇을 빚듯 사용자의 구결에 도움을 줍니다. 대기만성을 적용하면 구결이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늘어납니다. 대기만성은 하나의 구결에만 적용됩니다.]

대기만성이라?

순간 한빈은 눈을 크게 떴다.

[몽유가 해제됩니다.]

[비몽사몽이 해제됩니다.]

한빈은 적잖게 당황했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재빨리 심화편에 남아 있는 구결을 살폈다.

한빈의 눈이 커졌다.

심화편의 모든 구결이 바닥을 드러냈다.

순간 느껴지는 현기증.

다리가 살짝 휘청이는 것이 느껴졌다.

모든 감각이 완벽하게 돌아왔다.

문제는 지금 본신의 내공까지 모두 소모한 상태라는 것이었다.

한빈은 조용히 혈후를 바라봤다.

혈후와의 사이는 스무 걸음.

상대의 옷소매는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비몽사몽을 펼치는 동안 상대에게 제법 타격을 입힌 듯싶었다.

한빈은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린 한빈은 그제야 왜 현기증이 느껴지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한빈의 붉은 무복은 땀에 젖은 것처럼 척척했다.

그것은 땀이 아니라 한빈의 피였다.

아마 회복의 구결로도 감당이 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한빈은 잠시 혈후와 마주 보았다.

상대도 쉽사리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한빈은 일단 기력을 보충해야 했다.

기사회생이나 금의환향을 쓸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용린검법의 초식을 펼칠 여력이 없었다.

그에 비해 혈후의 모습은 굳건했다.

비록 상처를 입긴 했어도, 눈에 띄는 출혈은 없어 보였다.

거기에 기세도 줄지 않았다.

만약 이 상황에서 혈후가 치고 들어온다면?

한빈은 죽은 목숨이었다.

지금은 먼저 선수를 쳐야 할 때였다.

한빈이 표정을 바꾸며 피식 웃었다.

“안 속네!”

“그게 무슨 말이지?”

혈후의 표정도 변했다. 경계심 어린 표정에서 더욱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이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을 이었다.

“내가 틈을 보이면 들어올 줄 알았거든. 그런데 안 넘어가고 계속 경계하고 있잖아, 할망구.”

“이놈이…….”

혈편을 쥔 혈후의 손이 살짝 떨렸다.

쓰러질 듯하면서 버티는 상대의 정신력과 교묘하게 허점을 파고드는 상대의 초식은 어떤 면에서 낯설었다.

혈후의 앞에서 이렇게 버틴 자는 이제까지 없었다.

거기에 끈질기기는 초원에 핀 잡초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씹어도 씹히지 않는 그런 잡초 말이다.

혈후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손뼉을 쳤다.

짝!

그 모습에 한빈이 눈을 크게 떴다.

“뭐지? 지원군이라도 부르려고?”

“그럼 안 되는 건가?”

“둘이 오붓하게 싸우는데 똥개가 끼어들면 방해되지 않아?”

“똥개라…….”

“괜찮아. 똥개 정도야 뭐……. 그냥 삶아 먹으면 되지.”

“그게 무슨 말이더냐?”

“나도 지원군을 불렀거든.”

“지원군이라?”

“우리 사부님을 불렀어. 생각해 봐. 내 사부랑 할망구가 부른 사부랑 누가 더 셀까?”

“대체 그럴 시간이 어디…….”

혈후가 말을 멈췄다.

한빈이 품에서 조그만 원통형 물체를 꺼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아도 경계하고 있는 상황.

혈후가 혈편을 잡고 앞으로 뻗었다.

날아올 암기를 막기 위해서였다.

순간 원통 모양의 물체가 하늘로 올라갔다.

허공으로 솟구친 물체가 터졌다.

펑!

동시에 하늘에서 파란 불꽃이 천천히 내려왔다.

마치 파란 먹으로 난을 그리듯 여러 줄기의 불꽃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빈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불렀어.”

“이런 쥐새끼 같은 놈이 있나!”

혈후의 눈썹이 부르르 떨렸다. 농락당한 느낌에 분을 참지 못하는 상황.

그때 혈후의 뒤로 백색 무복의 무인이 바람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사사-삭.

그들은 원숭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

외모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모두의 몸이 엇비슷해서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그 모습에도 한빈은 당황하지 않았다.

혈후는 아직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마치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상대의 시선 때문이다.

거기에 묘하게 걸리는 단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상대가 내뱉은 사부라는 단어였다.

상대도 만만치 않은데 사부라?

사부라면 분명히 상대보다 강할 터.

그 전력이 가늠되지 않았다. 강호를 주유하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때였다.

상대의 옆에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렸다.

사사.

그 소리와 함께 하얀 무복의 소녀 셋이 나타났다.

그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저는 설산신녀 설화.”

“나는 청산신녀 청화라고 해요.”

먼저 도착한 설화와 청화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뒤쪽에서 그보다 더 여자아이가 나왔다.

“나, 나는……. 소군.”

소군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몰라 살짝 버벅거렸다.

사실 안으로 대피해 있어야 했지만, 한빈을 두고 들어가지 않는다고 우겨서 밖에 남게 된 소군이었다.

그때 소군의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껄껄!”

그 웃음소리에 혈후가 반응했다.

“누구냐?”

“나를 모르다니? 칼밥을 덜 먹은 게군. 나는 청운사신이라고 한다.”

“청운사신이라…….”

혈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히 혈후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백경이 가장 경계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무림삼존과 더불어 청운사신과 적룡대협이었다.

그중 적룡대협은 백이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청운사신이라…….

설산신녀도 들어 보긴 한 것 같았다.

물론 소군이란 아이는 금시초문이었다.

혈후는 팔짱을 끼고 고민 가득한 표정으로 상대를 쏘아봤다.

이대로라면 양패구상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상대의 목을 단번에 끊지 못했는데 그 사부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 사부가 하필이면 무림삼존에 버금가는 청운사신.

혈후가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다시 낯선 목소리가 갈대 사이로 울려 퍼졌다.

“껄껄, 나도 있네.”

“당신은 또 뭐지?”

“강호인들은 나를 적룡대협이란 이름으로 부르곤 하지.”

그 말에 혈후의 눈이 커졌다.

붉은 도포가 유난히 눈에 띈다.

아니, 정확히는 짙어진 노을빛 덕분에 피를 뒤집어쓴 듯 보이기까지 했다.

강호에 떠도는 적룡대협의 외모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혈후가 망설이고 있을 때, 한빈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때? 우리 사부님들이 오셨으니, 잠시 휴전하는 게 좋지 않아?”

“네놈은 뭐기에 청운사신과 적룡대협을 사부로 두고 있다는 말이냐?”

“에? 내 명성도 우리 사부님들과 비교해서 뒤떨어지지는 않는데, 나를 모른다고?”

“…….”

“다음에 만날 때 가르쳐 주지. 내가 지금 기운이 허해서 그러니, 밥 먹고 조금 이따가 보자고.”

이것은 휴전 제의였다.

한빈은 혈후의 의견을 듣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슬쩍 눈짓했다.

동시에 설화와 청화가 한빈을 부축했다.

뒤쪽으로 물러나는 한빈 일행.

혈후는 멀어지는 적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혈후의 시야에서 적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다.

원숭이 가면의 무사가 혈후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추적할까요?”

“아니다. 그냥 놔둬라. 잠시 상황을 지켜보자꾸나.”

그때였다.

다른 원숭이 가면이 다급하게 외쳤다.

“조금 이상합니다!”

그 외침에 혈후가 재빨리 달려갔다.

혈후가 나타나자 원숭이 가면 무사가 바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흔적이 조금 경박합니다.”

“이건…….”

“청운사신이란 자와 적룡대협이란 자의 흔적입니다.”

무사가 가리킨 곳에는 발자국이 어렴풋하게 나 있었다.

혈후는 그 발자국을 자세히 살폈다.

순간 혈후의 눈이 커졌다.

수하의 말대로였다.

청운사신이 남긴 족흔(足痕)은 설산신녀라고 밝힌 아이보다 더 경박해 보였다.

잠시 바라보던 혈후가 외쳤다.

“쫓아라!”

“존명!”

수하들이 갈대 사이로 사라졌다.

동시에 혈후의 신형도 사라졌다.

잠시 후,

백독문의 앞에 도착한 혈후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앞을 바라봤다.

백독문의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족흔으로 봐서, 그들은 이미 안으로 피신한 것이 분명했다.

“속았군.”

혈후의 한마디에 원숭이 가면 무사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모두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혈후의 성격상 폭발할 것이 분명해서였다.

그때 혈후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하하.”

무사들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때 혈후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다음 계획을 시행하거라!”

“…….”

원숭이 가면의 무사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다음 계획을 아는 이가 없는 듯 보이기도 했다.

원숭이 가면의 무사 뒤로 다른 가면 무사가 걸어 나왔다.

그의 체격은 다른 무사들과 같았다.

혈후의 앞에 도착한 새로운 무사가 포권했다.

“준비는 다 됐습니다. 바로 투입하면 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군.”

“그래, 너를 믿고 나는 자리를 떠나겠다.”

“네, 믿으셔도 좋습니다.”

“만약에 살아남는 자가 있다면……. 이걸 전하거라.”

혈후가 은패 하나를 내밀었다.

무사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살아남았으니 포상은 줘야지.”

“존명!”

무사가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무사를 뒤로한 채 혈후가 자리를 떠났다.

노을을 향해 걸어가는 혈후의 신형이 사라지자, 새로운 무사가 가면을 벗었다.

드러나는 하얀 피부.

가면 속의 인물은 젊은 사내였다.

옥을 깎아 놓은 듯한 외모를 가진 사내였다.

어찌나 희고 고운지 사방을 적신 붉은색 노을도 그의 외모를 감추지 못했다.

그 사내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 * *

한빈은 독호와 마주 보고 있었다.

백독문이 독진을 발동시켰으니 일단 안심해도 되는 상황이었다.

안심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한빈과는 달리, 앞에 선 독호는 입을 벌리고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무복과 코를 찌르는 듯한 혈향.

눈앞에 사내가 어떻게 살아 있는지 궁금한 상황이었다.

독호가 가장 걱정되는 것은 바로 아까 받았던 서찰이었다.

천수장의 장주라는 사람은 이곳에 백룡의 환자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그에 대한 치료도 자신하고 있었다.

대신 조건이 하북팽가에서 온 일행 중 다친 이가 없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사내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독호는 다급하게 수하들을 불렀다.

“여기 환자를 의당으로 데려가라!”

“존명.”

그때 사내가 손을 저었다.

“저는 됐습니다. 그러니 환자부터 보죠.”

“환자라니…….”

“제 서찰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당신이…….”

“네, 맞습니다. 제가 바로 하북에서 생불이라 불리는 천수장주입니다.”

“그럼 옆에 분은 누구십니까?”

독호가 한빈의 옆에 있는 붉은 도포 무인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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