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9. 비몽사몽(非夢似夢) (4)
독인들이 풀 죽어 있는 이유는 이번 사건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경지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몇몇 독인은 눈을 빛내고 있다.
그중 미독 문도희는 고개를 돌려 굉음이 울려 퍼지는 금지 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문도희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감정을 드러냈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닌 분노라는 감정이었다.
상대방에 대한 분노가 아닌,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하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었다.
이번 빚을 갚으려면 살아남는 것이 먼저였다.
일단 몸을 피하고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문도희는 조용히 대문의 앞쪽에 서 있는 푸른 도포의 사내를 바라봤다.
바로 청운사신이라는 영웅이었다.
그자가 어떻게 여기에 나타났는지는 모른다.
사실 처음에 문도희는 그자가 청운사신이라는 것에 반신반의했다.
문도희와 독인을 구한 사천당가의 여식도 그를 청운사신으로 부르는 것을 보았다.
모든 정황을 미루어 보아 저 푸른 도포의 고수가 청운사신임은 확실했다.
거기에 남아 있던 제자들도 그를 영웅으로 받드는 모습이, 더욱 믿음을 주었다.
문도희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가 포권했다.
“대협, 저희는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잠시 기다리시오.”
청운사신으로 변장한 팽혁빈이 문도희를 차분히 바라봤다.
물론 속마음은 요동치고 있었다.
아우에게 청운사신으로 변장하라는 쪽지를 받았다.
그 뒤로 설화로부터 청운사신으로 변장해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도 전달받았다.
팽혁빈은 청운사신으로 변장한 채 한빈이 전한 물건을 백독문의 안쪽에 던져 넣었다.
그것을 던져 넣으면 문이 열릴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일각이 지난 지금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팽혁빈이 던져 넣은 것은 다름 아닌 현철로 만든 상자였다.
한빈이 덧붙인 말도 없었다.
그저 그 상자를 던져 넣으면 문이 열릴 것이라고만 했다.
지금 팽혁빈이 믿을 것은 아우인 한빈의 말뿐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문도희를 바라보고 있지만, 결과는 알 수 없었다.
물론 불안한 감정은 숨겨야 했다.
청운사신으로 변장한 팽혁빈은 얼굴에 철판 하나를 깔아 놓은 듯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다른 이가 보았을 때는 팽혁빈의 표정이 묘하게 침착하게 보였다.
팽혁빈의 표정에 문도희도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도희가 고개를 돌렸다.
순간 문도희의 얼굴에 의구심 한 줄기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청운사신이라는 영웅을 믿고 싶긴 했지만, 과연 백독문의 문이 열릴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백독문은 독충의 독으로 오염된 내부를 정화한다는 명분으로 문을 열지 않고 있다고 했지만, 지금 보면 거짓이 분명했다.
적의 출현을 예상하고 문을 잠근 것이 분명했다.
독을 다루는 문파나 가문 중에서는 사천당가와 더불어 최고가 바로 백독문이지 않은가?
백독문이 적을 두려워 피한다는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천하의 백독문이 적이 두려워서 문을 걸어 잠갔는데, 그 문을 연다고?
청운사신의 호언장담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백독문의 대문이 소리를 냈다.
끼익.
문이 활짝 열리고 중년인이 밝게 웃는 모습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순간 뒤쪽에서 바라보던 문도희는 눈을 크게 떴다.
문도희가 재빨리 중년인의 앞으로 뛰어갔다.
그 뒤를 이어 적혈문주도 달려갔다.
문도희가 재빨리 그를 향해서 포권했다.
“독호 대협, 오랜만에 뵙습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중년인이 안으로 손짓했다.
그는 다름 아닌 백독문의 이인자 독호였다.
그의 등장은 독인들의 구겨졌던 인상을 돌려놓을 만했다.
비록 백독문의 문주는 아니지만, 문이 열리고 책임자가 나왔다는 것은 몸을 피할 곳이 생겼다는 것이다.
백독문의 무사들이 백독지회에 온 독인들은 조심스레 안내했다.
그들이 안쪽으로 들어가자 독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청운사신으로 변장한 팽혁빈을 바라봤다.
“대체 누구신지…….”
경계의 눈빛을 띤 독호는 살짝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중원에서 독을 다루는 이는 많았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독인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거기에 더해 상대의 몸에서 독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기세로 봐서는 제법 정순한 게, 정파의 인물임이 분명했다.
독호가 경계하는 사이, 청운사신의 뒤쪽에서 젊은 사내가 걸어 나왔다.
“사숙!”
“흠.”
독호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이 불쌍한 표정으로 독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젊은 사내는 백독문을 뛰쳐나가 소식이 끊긴 장자명이었다.
독호는 청운사신의 존재보다 돌아온 장자명에 온 신경을 쏟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집 나간 제자가 독인이 아닌 정파 무인으로 보이는 자를 끌고 왔으니 당연했다.
그때 장자명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사숙,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분은 강호에 위명을 떨치는 청운사신 대협이십니다.”
“청운…….”
독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조용히 눈앞의 청운사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요즘 강호에서 청운사신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의 유명세는 정파, 사파 가리지 않고 강호 전체에 퍼져 있었다.
그런 자가 왜 백독문에 방문했단 말인가?
독호는 뒤를 힐끔 바라봤다.
사형이자 문주인 백주천의 비밀 연공실이 있는 쪽이었다.
그쪽에는 백룡의 고수 셋이 머물고 있었다.
백룡의 고수와 청운사신이라…….
독호는 청운사신이 아군인지 적인지가 판단이 되지 않았다.
그때 독호의 머릿속에 담장 너머 날아온 하나의 물건이 떠올랐다.
사실, 백독문이 문을 연 것은 그 물건 때문이었다.
그것은 독각을 담고 있는 상자였다.
백룡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는 대량의 독각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독각을 구하러 나간 제자들은 연락이 끊긴 상태.
그 상황에서 날아 들어온 독각은 하늘에서 내려 준 동아줄과도 같았다.
과연 그것이 미끼일까?
독호와 사형인 백주천은 이것에 대해 논의를 했다.
들여보낸 다음 독진에 묶어 둔 후 신분을 확인하자는 것이 결론이었다.
지금 눈치를 보아하니 먼저 들여보낸 독인들은 상자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남은 것은 청운사신의 일행.
독호는 다시 한 발 물러났다.
별것 아닌 것 같은 동작이지만, 백독문의 독인들에게는 많은 의미가 담긴 한 걸음이었다.
그러고는 장자명을 바라봤다.
그 의미를 아는 장자명이 눈을 크게 뜨며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사숙님, 지금 무슨 짓을…….”
“묻는 말에 답하거라. 왜 외인을 데리고 여기에 왔느냐?”
“도움을 주러 온 분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순순히 묻는 말에 답하거라. 만약 대답이 미흡하다면 독진을 열 것이다.”
“허…….”
이건 예상 못 한 상황인 듯 장자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장자명과 하북팽가에서 온 일행이 서 있는 곳은 사선(死線)이라 불리는 구역이었다.
독인들이 백독문의 담장을 넘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이 사선에 있다.
백독문의 독진은 모든 것을 녹여 버리기로 유명하다.
자세히 주변을 보면 깊은 골짜기인데도 벌레 한 마리 없었다.
그리고 독진이 영향을 미치는 사선의 안쪽으로는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은 모두 독진의 영향이었다.
장자명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뒤쪽에서 적혈맹호대 대원 중 하나가 걸어왔다.
그를 본 장자명은 화들짝 놀랐다.
지금 걸어오는 자는 적혈맹호대로 분장한 장자명의 사매였다.
죽을 고비에서 적혈맹호대가 구했던 사매.
그녀가 나선다면 오해는 단번에 풀릴 것이다.
문제는 한빈이 그녀의 정체를 끝까지 숨기라고 신신당부했다는 점이다.
지금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사매의 정체를 밝히느냐?
아니면 한빈의 말을 끝까지 들을 것이냐?
장자명은 함부로 결정할 수 없었다.
그때 장자명의 사매가 코앞까지 걸어왔다.
장자명은 결심한 듯 사매의 소매를 잡았다.
순간 사매는 그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장자명은 재빨리 그녀를 따라잡았다.
장자명은 한빈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다.
만약 사숙에게 그녀가 정체를 털어놓게 된다면?
왠지 몰라도 뒷골이 뻐근한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장자명의 사매가 향한 곳은 사숙 쪽이 아니었다.
청운사신으로 변장한 팽혁빈의 앞에 선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냈다.
“설화 소협이 이걸 청운사신께 전해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건 뭔가?”
“이걸 수뇌부에게 전하면 알 거라고 하셨습니다.”
말을 마친 장자명의 사매는 조용히 자리로 돌아갔다.
순간 장자명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 한숨에 팽혁빈이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서찰을 독호에게 건넸다.
서찰을 받은 독호는 슬쩍 경계의 눈빛을 보였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서찰을 살폈다.
독인답게 함정을 조심하는 것이다.
한참을 살피던 그는 서찰을 펼쳤다.
슬쩍 읽어 나가던 독호의 눈이 커졌다.
독호는 재빨리 서찰을 구겼다.
구긴 서찰을 쥔 손을 비비자 재가 된 서찰이 바닥에 떨어졌다.
독기로 서찰을 녹인 것이다.
갑작스러운 광경에 팽혁빈의 손이 그의 등으로 향했다.
팽혁빈의 등에는 그의 거도가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장자명이 팽혁빈의 앞으로 나섰다.
“대협,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흠.”
“사숙님의 행동에는 적의가 없습니다. 다만……. 그 서찰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펼친 수법일 뿐입니다.”
장자명의 말에 팽혁빈이 도를 쥐었던 손을 풀었다.
그 모습에 독호가 나섰다.
“그 말이 맞습니다. 다 읽어 본 후 태우라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백독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팽혁빈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때 장자명이 앞으로 나서며 뒤쪽을 보고 손짓했다.
장자명의 손짓에 적혈맹호대 대원들이 짐을 끌고 사선을 넘기 시작했다.
백독문의 무사들은 그들을 안내했다.
모두가 사선을 넘은 가운데 오직 청운사신으로 변장한 팽혁빈만이 자리에 남았다.
그 모습에 독호가 갸웃했다.
“왜 그러십니까?”
“저는 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 들어가시지요. 밖에서 파란 불빛이 보이면 그때 다시 문을 열어 주십시오.”
“대체 무슨…….”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팽혁빈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이것은 아우인 한빈과의 약속이었다. 아니, 약속이 아니라도 아우를 사지에 남겨 두고 혼자 몸을 피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밖으로 걸어가는 청운사신의 모습을 보며 독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독호는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바로 조금 전 읽은 서찰 때문이었다.
하북팽가에서 온 일행이 다치지 않는다면 백룡의 부상자를 치료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서찰을 보낸 자는 강북 쪽에서는 청운사신만큼 유명한 자였다.
바로 신의라고 불리기도 하고 생불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천수장주였다.
청운사신에 천수장주라?
강호의 기인들이 모두 백독문으로 몰려드는 모양새였다.
독호의 끈끈한 시선을 뒤로한 채 문을 나선 팽혁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금지 쪽을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고개를 돌려 문 앞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설화가 팔짱을 끼고 점점 진해지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화뿐 아니라 청화와 소군도 있었다.
팽혁빈은 은은한 미소를 풍겼다.
설화와 청화 그리고 소군은 아예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아우를 저리 생각해 주는 측근이라!
그들이 기특하기도 하고 아우가 부럽기도 했다.
설화 일행은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가 한빈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