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 비몽사몽(非夢似夢) (2)
한빈의 눈앞에는 희미하게 혈후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아직 수마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금제가 완벽하게 깨진 것이 아니라 반만 깨진 듯했다.
눈은 뜨고 있지만, 몸을 통제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용림검법의 글귀가 다시 떴다.
[비몽사몽의 상태가 몽유(夢遊)로 변경됐습니다.]
‘흠.’
꿈속의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몽유라?
정확한 해석은 안 되지만, 반쯤은 꿈에서 깼다는 말 같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과연 현실이 맞을까?
그때 다시 글귀가 이어졌다.
[몽유의 특별 효과가 추가됩니다. 시전자의 의지를 일 할 반영할 수 있습니다. 기회는 한 번입니다.]
이건 혈후의 금제에서 반쯤 깨어났다기보다는 비몽사몽 속의 자각인 듯싶었다.
어찌 되었든 이것은 기회였다.
일 할이라!
한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잠을 자면서도 무공을 펼치는 것도 모자라 그곳에 의지를 담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몸을 움직일 수는 없지만 볼 수는 있고, 그 안에 자신의 의지를 일부 담을 수 있다면?
한빈이 혈후를 보고 미소 지었다.
혈후의 몸에 남아 있는 천급 구결은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분명히 현실이었다.
순간 혈후의 손이 천천히 다가온다.
한빈의 머리를 향해서 다가오는 혈후의 하얀 손.
그녀가 피워 낸 피로 된 꽃잎이 불의 형상이라면, 눈앞에 다가오는 혈후의 손은 얼음 같았다.
아니, 얼음이라고 보기에도 기묘했다.
너무도 하얀 손은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그때 혈후가 입을 열었다.
“너는 내 손안에서 영생을 누릴 것이니. 이것이 내 마지막 선물이다. 너의 영혼은…….”
마치 중이 법문을 외는 듯 알 수 없는 단어를 뱉은 혈후가 한빈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니, 정확히는 손이 한빈의 아마에 닿기 직전이었다.
한빈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금선탈각!’
용린검법의 의지로 펼치는 초식이었다.
한빈의 몸이 껍데기만 남기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마치 몸만 남기고 영혼이 이탈하는 듯했다.
한빈의 시선이 혈후의 몸을 스쳤다.
순간 한빈은 혈후의 몸을 훑었다.
한빈의 눈에 먹음직스러운 구결의 흔적들이 들어왔다.
일 할의 의지만 있어도 천급 구결을 취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쉽게도 한빈은 일 할의 의지를 발동시킬 방법을 몰랐다.
일단 용린검법의 움직임대로 몸을 맡기는 것이 맞았다.
상대의 하얀 손은 중원의 그 어떤 보검보다도 위험해 보였다.
그리고 주변에 떠다니는 꽃잎 하나하나가 사천당가의 암기보다 위협적이었다.
휙!
혈후의 손이 허공을 공격했다.
한빈의 몸이 신기루처럼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는 혈후가 석상이 된 것처럼 멈췄다.
상의만 빈껍데기처럼 바람에 날리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펄럭.
“대체 이건…….”
혈후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눈이 커졌다는 점에서 혈후는 다시 한번 놀라야 했다.
자신이 근 오십 년간 한 번이라도 놀란 적이 있었던가?
신경질이 난 적은 있어도 자신이 놀란 적은 없었다.
물론 강호인 때문에는 신경질조차 난 적도 별로 없었다.
벌레라면 귀찮기라도 하지.
눈에 띄는 강호인들은 그녀를 귀찮게 할 자격조차 없었다.
무림삼존 정도는 되어야 그녀가 조금 신경을 쓸 정도였다.
그런데 무림삼존도 아닌데 자신을 이렇게 놀라게 하는 자를 만났다는 것 자체가 황당했다.
자신의 공간 안에서 눈을 뜰 수는 있어도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그것은 신선이 아니라 신선의 할아버지가 와도 결과는 똑같다.
이곳은 그녀의 집이자 그녀의 품 안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빠져나간다는 말인가?
혈후는 눈을 감았다.
자신의 감각을 흩어진 꽃잎과 연결하기 위함이었다.
혈수신공은 무공이면서도 진법이었다.
꽃잎 하나가 일류 고수에 상응하는 파괴력을 지녔다.
그녀가 감각을 끌어올리자 핏방울로 만들어진 꽃들이 휘돌기 시작했다.
혈후가 눈을 번쩍 떴다. 혈후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희미하게 움직이는 물체 하나가 잡혔기 때문이다.
도망가는 것도 모자라 공격을 해 온다고?
혈후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피어났다.
그 미소가 풍겨 내는 짙은 혈향은 그녀의 손과 연결되었다.
그녀는 왼손을 뒷짐을 진 채 오른손만을 움직였다.
마치 무희의 손동작처럼 허공에 곡선을 그렸다.
하지만 우아한 손동작과는 달리, 그녀의 독문 무공이라 볼 수 있는 혈수신공이었다.
혈수신공의 두 번째 초식인 혈잠마수(血蠶魔手).
본격적으로 싸우기로 한 것이다.
“흠.”
그녀는 가느다란 침음을 뱉어 냈다.
강호의 누군가가 손을 섞을 줄은 몰랐다.
지나가다가 개미 한 마리를 밟았다고 그걸 기억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이제까지 그녀의 손에 죽어 나갔던 강호인은 모두가 개미였다.
손을 섞는다는 감정이 있을 수 없었다.
스르륵.
그녀의 오른손에서 다시 혈화(血花)가 피어났다.
획!
혈화는 바로 뭉그러지더니 선이 된다.
가느다란 나뭇가지처럼 얼기설기 선이 엉킨다.
그녀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풋, 예쁜 혈잠이 만들어졌구나. 이리 오너라, 아가야.”
그녀가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순간 피로 만든 그물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출렁인다.
그녀의 손과 그물이 완벽하게 연결된 것처럼 보였다.
마치 거미가 날아오는 먹이를 기다리는 형국이 되었다.
먹이가 거미줄을 향해 날아오면 거미는 무엇을 해야 할까?
거미줄에 걸린 먹이를 먹기 위한 준비만 하면 된다.
스륵.
오른손의 손톱이 살짝 더 돋아났다.
그녀는 이제까지 상대를 보냈던 방법은 쓰지 않기로 했다.
눈앞에 서 있는 놈은 행복하게 죽을 권리가 없었다.
힘이 없는 개미야 그냥 밟고 지나가면 될 일이지만, 자신을 향해 검날을 세운 인간에게는 조그만 선물이라도 줘야 했다.
그 선물이란 그녀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을 상대에게 안겨 주는 것이었다.
이제 불과 다섯 걸음.
상대의 검 끝에 푸른 강기가 일렁이는 것이 생생하게 보인다.
혈후의 미소는 거리가 가까워지자 점점 진해졌다.
그녀의 혈잠마수를 파훼할 자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거미줄로 독수리를 옭아맬 수는 없는 법이지 않은가.
하지만 무림삼존을 제외하고는 그녀가 만든 혈잠마수를 베어 낼 강호인은 없었다.
강호의 몇몇은 제외한다면 모두가 꿀벌이나 파리에 불과했다.
거미줄에 걸린 파리는 죽어서도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법.
썩어 문드러져 흙이 된 후에야 자리를 떠날 수 있다.
혈후는 상대를 파리처럼 만들 생각이었다.
이제 때가 되자 혈후가 손을 뻗었다.
“오랜만에 펼쳐 보는 수법이구나. 어디 재미있게…….”
혈후는 말을 잇지 못했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던 검 끝이 그녀의 바로 앞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혈후는 손을 살짝 흔들었다.
그녀가 만든 그물이 좌측으로 움직인다.
스르륵.
그물이 완벽하게 움직이기 전에 파고드는 푸른 검기.
혈후는 뒷짐 진 왼손을 풀었다.
순간 그녀의 왼손이 푸른 검기를 낚아챘다.
획.
하지만 푸른 검기는 뱀처럼 꿈틀댔다.
곧게 뻗은 검이 뱀의 혀처럼 자연스럽게 구부러진 것이다.
“이런 사특한!”
혈후는 신경질 난 듯 외쳤다.
들어올 듯하면서 혈잠에 얽히기 바로 전 손을 빼는 모습이 마치 자신을 놀리는 듯 보였다.
용린검법의 통제에 자신이 몸을 맡긴 한빈은 나름 놀라고 있었다.
그것은 용린검법이 혈후를 상대로 초식을 적절하게 쓰고 있기 때문이다.
방어용으로만 용린의 주인을 보호할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공격 일변도로 가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위험이 닥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발을 뺀다.
비몽사몽은 한빈이 몽유의 특별한 효과를 사용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한빈은 혈후가 만들어 낸 혈잠을 바라봤다.
월아로는 베어 낼 수 없는 그물이 분명했다.
상대를 바라보던 한빈의 후각에 혈후가 만들어 낸 혈잠의 향기가 잡혔다.
아직 잠을 깨지는 못했지만, 가장 예민한 코가 반응한 것이다.
처음 마주할 때부터 풍겨 오던 혈향과는 약간 다르다.
후각이라면 중원제일인인 한빈이 아니던가.
미세한 혈향을 감지하지 못할 리 없었다.
어디선가 맡아 본 익숙한 향기였다.
순간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용린검법이 만들어 냈던 용린검의 향기와 비슷했다.
비슷한 듯하면서도 달랐지만, 용린검의 향기와 비슷했다.
피로 독문 병기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한빈은 한 번 쓸 수 있는 몽유를 어디에 써야 할지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것은 바로 몸속에 잠들어 있는 용린검을 깨우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몽사몽이 쓸 수 없는 방법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용린검을 깨우려면 한빈의 피가 필요했다.
비몽사몽은 용린의 주인을 보호하는 초식.
주인을 상하게 하는 동작 따위는 애초에 펼칠 엄두조차 못 내는 것이 분명했다.
한빈은 일 할의 의지를 손에 집중했다.
뒤쪽으로 물러난 상태에서 월아로 자신의 왼손을 그었다.
스윽.
순간 왼손에 피가 맺혔다.
흐르는 피는 멈출 줄 몰랐다. 손바닥에서 흘렀던 피는 자연의 이치를 무시한 듯 한빈의 왼팔을 감쌌다.
이어서 눈앞에 보이는 글귀.
[용린검이 활성화됩니다.]
[부창부수를 사용합니다.]
[전광석화를 사용합니다.]
[비몽사몽의 효과로 초식의 한계를 극복합니다.]
뭐지?
한빈이 눈을 크게 떴을 때였다.
다시 문구가 이어졌다.
[구걸십팔보를 사용합니다.]
[……]
줄줄이 이어지는 글귀!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초식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었다.
비몽사몽의 효과라?
그럼 이전에는 왜 초식을 남발하지 않았을까?
잠시 고민하던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이었다.
이전에는 상대가 펼친 혈잠을 파훼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초식을 절제한 것이 분명했다.
혈잠을 파훼할 방법이 생기자 비몽사몽의 효과가 늘어난 것이라고 한빈은 판단했다.
비몽사몽이란 초식은 자동으로 발동되는 것이다.
지금 초식을 펼치는 주체는 용린검법 자체.
그렇기에 시전자의 능력을 벗어난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는 법.
즉, 한계가 없다는 말이었다.
한빈은 조용히 용린검법을 살폈다.
특히 용린검법의 심화편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순간, 가늘게 떴던 눈이 점점 커졌다.
눈앞에서 줄어드는 구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공력을 나타내는 공(功)의 구결은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공(功) : 육십오(六十五)]
[……]
[공(功) : 사십일(四十一)]
한빈은 그제야 비몽사몽이 계획 따위는 없이 모든 것을 쏟아붓는 초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는 모든 본신의 공력과 심화편의 구결을 모두 쏟아붓고 난 후.
그때가 되면 비몽사몽의 효과는 사라진다.
깨어나더라도 도망칠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을 것.
순간 주변의 광경이 휙휙 지나간다.
모든 초식을 쏟아부어 속도를 높인 결과였다.
이전과는 다르게 한빈은 혈후가 만든 혈잠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순간적으로 거대한 충격파가 둘의 중심에서 퍼져 나갔다.
덮어 놓은 구덩이가 드러날 정도였다.
쿠릉!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질 때 한빈의 눈앞에 글귀가 나타났다.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순간 한빈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