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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606화 (592/621)
  • 606. 비몽사몽(非夢似夢) (1)

    혈후로 추측되는 여인의 표정이 기묘하게 뒤틀렸다.

    마치 할머니란 말에 가슴을 찔린 듯한 표정이다.

    잠시 어색한 정적이 이어졌다.

    두 명의 고수 사이에는 바람조차 지나가지 않을 만큼 기세가 촘촘히 쌓여 있었다.

    누군가 움직이면 바로 반응하겠다는 듯.

    실제로 떨어지는 풀잎조차 둘 사이를 비껴가고 있다.

    얼어붙었던 분위기도 잠시, 그녀가 기가 막힌다는 듯 한빈을 쏘아봤다.

    “그렇지. 아이는 아니었지……. 스무 살 아이의 얼굴을 뒤집어쓴 노괴라고 해야 할까?”

    상대는 한빈의 외모나 신분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한빈은 대충 상대를 떠보기로 했다.

    “어떻게 내 나이를 알지?”

    “외모는 속여도 행동은 속이지 못하는 법이지.”

    혈후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한빈을 가리켰다.

    하얀 손 덕분에 그녀의 손가락 끝 손톱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 손톱은 마치 붉은 피로 치장을 해 놓은 것 같았다.

    한빈은 그 손톱의 끝이 살짝 꿈틀대는 것을 보았다.

    아마 그녀가 펼칠 무공과 관계가 있을 듯싶었다.

    “행동이라?”

    한빈은 혈후라고 예상되는 여인을 바라봤다.

    그녀는 혈후가 맞았다.

    혈후의 후인이 아니라 바로 본인이 분명했다.

    기세와 묘한 분위기는 전생의 현장에서 보았던 상황과 일치했다.

    한빈은 혈후를 바라보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혈후도 바로 표정이 바뀌었다.

    살짝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던 그녀의 얼굴은 지금 호기심으로 가득 찬 듯 보였다.

    한빈의 말이 그녀를 만족시킨 모양이다.

    혈후가 입꼬리를 올린 상태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호랑이고 네가 떡장수가 된 것 같은데…….”

    “다 들었군. 어디서부터 들었지?”

    “백경의 아이들을 가지고 놀 때부터 지켜봤다, 아이야.”

    “그럼 우린 볼 장 다 본 사이군.”

    “볼 장 다 본 사이라니. 꼭 우리가 남남처럼 느껴지지 않는구나, 아이야.”

    “그래, 우리는 남남이 아닐 수도 있어.”

    “재밌는 아이구나.”

    “네 목이 내 것이 되면……. 남남이 아니지. 그러니 이제 부끄러워하지 마. 우리 재미있게 놀아 보자고!”

    “기고만장은 화를 부르는 법이지! 나는 놀 테니 너는 한숨 자고 있거라.”

    “과연…….”

    “여긴 품 안이거늘……. 어떤 방법으로 반항하려 하느냐?”

    미소를 피워 낸 혈후가 양쪽 손을 들었다.

    마치 항복을 선언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한빈은 동작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빈은 살짝 한 발 물러나며 기수식을 취했다.

    그때 혈후가 자신의 손바닥을 긴 손톱으로 그었다.

    제법 긴 손톱 때문인지, 마치 단검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자해하는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손바닥을 긋는 동안에 그녀의 손톱 하나가 피부로 파고드는 것이 보인다.

    혈후의 손바닥 안에 그녀의 손톱 하나가 박혔다.

    조그만 대롱을 손바닥 안에 박아 놓은 듯한 상태.

    동시에 희미하게 배어 나오는 혈흔.

    혈후의 손바닥 안에 꽃잎만 한 핏방울이 맺혔다.

    그 핏방울을 허공에 뿌리는 혈후.

    순간 허공에 핏방울이 맺혔다.

    허공에 뜬 핏방울은 마치 꽃잎과도 같았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핏방울이 끝없이 망울져 나왔다.

    그것은 다시 꽃잎이 되었다.

    한빈과 혈후 사이에 작은 꽃잎이 촘촘하게 떠다녔다.

    꽃잎은 세상의 이치에 벗어난 듯 떨어질 줄은 몰랐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광경은 어떤 종교의 신성한 의식처럼 보이기도 했다.

    순간 한빈이 이를 악물었다.

    눈앞이 점점 흐려졌기 때문이다.

    시야를 가득 채운 핏방울이 꼭 혈후의 날개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혈후가 이곳이 자신의 품이라는 말은 맞았다.

    상대의 공간 안에서 통제를 받는 것을 한빈이 모를 리 없었다.

    입술을 깨문 한빈이 고개를 들었다.

    눈을 번쩍 뜬 한빈이 외쳤다.

    “잠깐!”

    “…….”

    혈후가 동작을 멈췄다.

    허공을 떠다니는 그녀의 꽃잎도 멈췄다.

    혈후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한빈을 바라본다.

    시선을 마주한 한빈이 말했다.

    “그냥 죽이기에는 아깝지 않아? 누님.”

    “죽을 때가 되니 그 알량한 혓바닥이 자연스레 움직이는구나.”

    “설마, 내 얘기가 실없는 소리처럼 들려?”

    “그럼 아니더냐?”

    “내 진심을 몰라주는군. 풋.”

    “왜 웃지?”

    “……적의 적은 뭐다?”

    “갑자기 적 타령을 왜 하는 거지?”

    “적의 적은 아군이잖아.”

    “흠, 그게 무슨 말이냐?”

    “당신도 백경의 선주(船主) 중 하나라면서?”

    “재미있는 아이구나. 그 나이에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어……. 그런 얘길 하는 이유가 뭐지?”

    “밑천을 내놔야 얘기가 될 것 같아서 말한 거야.”

    “살고 싶다면서 그걸 말하다니, 희한한 놈이로군.”

    “살고 싶다고 한 적은 없는데!”

    “방금 말하지 않았느냐? 그냥 죽이기에는 아깝지 않으냐고 말이다.”

    “아까 할머니라고 한 건 미안했어, 누님.”

    “누님이라……. 클클.”

    “누님의 관점에서 얘기한 거고. 솔직히 다른 백경이랑 경쟁 관계 아니야? 상단으로 치면 금와 상단과 천하 상단 같은 앙숙 관계? 그렇다고 대낮에 상대의 목은 칠 수 없는 형편이고…….”

    한빈은 슬쩍 상대의 눈치를 봤다.

    혈후의 눈썹이 살짝 꿈틀대는 것이, 한빈의 말에 영향을 받은 게 분명했다.

    그렇게 눈치를 보면서 한빈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지금 바로 초식을 확인해 줘!’

    이것은 용린검법에 내린 지시였다.

    순간 한빈만 볼 수 있는 용린검법이 희미하게 빛났다.

    용린검법을 확인하던 한빈은 다시 혈후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냥 나랑 편먹는 게 어때?”

    “후후.”

    “왜 웃지?”

    “너는 사람이 쥐새끼와 같은 편을 먹는 걸 본 적 있느냐?”

    “내가 쥐새끼라는 거야?”

    “같이 적에게 맞설 힘은 없으면서 아군의 식량이나 좀먹으면 그게 바로 쥐새끼지.”

    “이렇게 큰 쥐 봤어? 만약에 있다면 그냥 내가 쥐새끼가 된 거로 하고.”

    한빈이 피식 웃으며 자신을 가리키자 혈후가 입꼬리를 올렸다.

    “후후, 쥐라는 걸 인정하는 걸 보니 그나마 착한 쥐구나. 행복하게 보내 주마.”

    “왜 자꾸 보내려고 그래? 내가 이래 봬도 힘깨나 쓰거든. 같이 편먹으면 할망구 인생이 확 펼 텐데 말이야.”

    “뭐라?”

    “같은 편을 먹으면 누님이고, 적이면 할망구지. 안 그래?”

    “네놈은 죽어야겠구나.”

    “과연 그게 쉬울까?”

    말을 마친 한빈은 힐끔 허공을 바라봤다.

    [천급 초식 비몽사몽(非夢似夢)을 획득하셨습니다. 비몽사몽은 시전자의 생명을 연장해 주는 초식입니다. 전설 속에 그 어떤 고수라도 잠을 자면서 적을 상대할 수는 없는 법. 수많은 고수가 잠결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비몽사몽은 잠이라는 가장 큰 약점 속에서 용린검법의 주인을 보호해 줍니다. 구결이나 공력이 남아 있지 않을 경우, 비몽사몽의 사용이 중지됩니다.]

    한빈은 입가에 미소를 피워 냈다.

    그 미소에 혈후가 바로 반응했다.

    “그 웃음은 뭐지?”

    “그냥…….”

    “네놈이 무슨 수를 썼는진 몰라도 내가 네 얘기를 듣고만 있었을까? 네놈의 마지막 남은 퇴로마저 막혔다.”

    혈후가 한빈의 뒤를 가리켰다.

    한빈은 힐끔 뒤를 돌아봤다.

    혈후는 역시나 노련했다.

    한빈이 새로 얻은 초식을 펼칠 준비를 할 때 그녀도 가만히 있던 것이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는 척하면서 뒤쪽으로 핏방울로 만든 꽃잎을 보냈다.

    한빈의 뒤쪽에는 혈후가 피워 낸 핏방울이 여기저기 몽우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몽우리가 살짝 벌어진다.

    동시에 핏방울은 꽃으로 변했다.

    꽃이 흩어지더니 꽃잎으로 변한다.

    하나의 몽우리가 수십 개의 꽃잎이 된 것이다.

    한빈은 조용히 상대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살짝 입꼬리를 더 올렸다.

    핏방울로 만든 꽃잎은 다른 이가 봤다면 공포에 휩싸여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필요한 초식을 준비한 한빈은 상대를 살필 만큼 여유가 있었다.

    한빈에게 보이는 것은 천급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었다.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씁. 기대되네, 기대돼!”

    “혓바닥만 긴 아이였구나. 잠들거라.”

    그와 동시에 사방에 모여 있던 꽃잎이 한빈을 감쌌다.

    순간 한빈은 기분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옆에서 자장가를 불러 주는 느낌이었다.

    한빈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휘날리는 꽃잎이 만들어 낸 거대한 나무 한 그루였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한빈은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희미하게 뜬 용린검법의 문구.

    [비몽사몽이 발동됩니다. 잠이 깨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습니다. 구결이나 공력이 다 소모되면 즉시 비몽사몽은 해지됩니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본 글귀였다.

    한빈은 지금 자신이 꿈속에 있음을 깨달았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으니…….

    이건 꿈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얼굴도 희미한 친모였다.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환상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한빈은 전생의 사건 현장에서 왜 그들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죽어 갔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쾌락 같은 감정이 아니었다.

    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혈후의 피는 상대의 정신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섭혼술의 효과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효과가 그게 끝일 리는 없었다.

    일종의 공간 장악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고 봐야 했다.

    동서남북으로 넓게 공간을 장악한 뒤 한빈에게 다가온 것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상대를 잠재운 후 목숨을 빼앗는 것은 그녀에게는 일도 아닐 터였다.

    하나 다른 점은 혈후가 마주한 상대가 이제까지의 상대와는 다르다는 점이었다.

    용린검법의 주인인 한빈.

    그것도 전생의 경험부터 시작하면 강호에서 닳고 닳은 한빈이었다.

    여기까지는 한빈의 예상대로였다.

    이렇게 공간과 상대의 정신을 장악하지 않고서는 수백의 고수를 반항할 틈도 없이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말이다.

    한빈은 꿈속에서 잠시 다른 생각에 빠졌다.

    자신도 혈후에게 죽어 간 고수 중 하나가 될까?

    그럴 리가 없었다.

    한빈은 자신을 믿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의 안에 있는 용린검법의 힘을 믿고 있었다.

    마지막에 본 초식이 발동되었다고 했으니 어찌 되었든 이 아수라장에서 무사할 것이었다.

    자문자답은 끝났다.

    이제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해야 했다.

    꿈속의 한빈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한빈은 지금 간절히 기원하고 있었다.

    혈후의 몸 위로 떠다니는 천급 구결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잠이 들지 않았다면, 저 중에 몇 개는 획득했을 가능성이 컸다.

    비몽사몽이란 초식은 용린검법의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장치 같았다.

    그렇다면 용린검법은 무리해서 구결을 획득하기보다는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적인 초식을 펼칠 것이 분명했다.

    한빈에게는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당연한 욕망이 꿈틀대자 눈앞의 포근했던 광경이 멈췄다.

    한빈이 가장 행복했던 것은 어머니의 품이 아니었다.

    한빈이 제일 즐긴 순간은 바로 용린검법의 구결을 획득하는 순간이었다.

    그것을 깨닫자 한빈이 바라보던 행복한 형상이 얼음 깨지듯 부서졌다.

    쩌저적!

    한빈을 옭아매던 금제가 깨지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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