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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605화 (591/621)

605. 혈후(血后) (5)

그 목소리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자청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혈후라니, 누굴 말하는 거지?”

“혈후는 혈후다. 이제 너는 죽었다. 물론 우리도…….”

자청은 말을 멈추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자청의 모습에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한빈이 바라보는 방향은 피리 소리가 들려온 방향과는 달랐다.

전혀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빈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물론 용린검법이었다.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천급 구결 몽(夢)을 획득하셨습니다.]

안(眼)의 구결을 이용한 동체 시력의 향상으로 구결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중요한 것은 지금 획득한 구결이 천급이라는 점이다.

글귀를 바라보던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얻었던 구결이 다시 들어왔기 때문이다.

한빈은 재빨리 고개를 내려 아래쪽을 확인했다.

[천급 – 대(大), 비(非), 만(晩), 사(似), 몽(夢), 몽(夢)]

[알 수 없는 구결 : 사(四)]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용린검법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천급 초식을 조합할 수 있습니다. 지금 조합하시겠습니까?]

순간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렇게 용린검법이 물어본 것이 오랜만이기 때문이다.

용린검법은 이제까지 조합할 수 있는 초식이 모이면 바로 보여 주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물어보고 있다.

초식을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리긴 해도,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조금 의외였다.

한빈은 일단 고개를 흔들었다.

고개를 흔든 이유는 초식을 확인하는 도중에 생기는 작은 틈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대신 용린검법 속에서 반짝이는 구결을 확인했다.

비(非), 사(似), 몽(夢), 몽(夢).

이 네 글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한빈의 예상이 정확하다면?

틈을 주지 않고 이 초식을 펼칠 기회가 올 것이 분명했다.

어찌 보면, 이번에 초식 확인을 선택하게 만든 것은 용린검법의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한 배려라면?

생각지도 못할 만큼 강한 적이 다가왔다는 뜻이다.

그것도 바로 코앞으로 말이다.

한빈은 자청이 말한 혈후라는 인물을 떠올렸다.

혈후라?

한빈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혈수신공(血手神功)을 쓴다는 여인에 관한 전설이었다.

전설이라고 하면 누군가는 현실과 전혀 관계없는 일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한빈이 전생에 확인했던 무공이었다.

한빈이 귀검대주로 활동했던 전생의 기억 속에 분명히 봤던 무공이 혈수신공이었다.

정마대전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였던 곤륜산맥 초입 혈투의 막바지 때였다.

당시 곤륜산맥의 초입에서 정파와 마교인은 모두 후퇴를 지시받았었다.

그런데 후퇴하려고 하던 도중, 이백여 명이 넘는 무사가 한자리에서 비명횡사하는 사건이 벌어졌었다.

사건 현장에는 고급 향낭에서 풍기는 듯한 냄새가 가득 남아 있었으며, 죽은 자의 얼굴에는 자그마한 손바닥 자국이 하나 남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정파인이나 마교인 가리지 않고 눈을 감았다는 점이었다.

이 사건 덕분에 흐려져 가던 정마대전의 불씨가 다시 한번 타올랐었다.

우연히도 정파와 마교, 양쪽의 생존자는 한 명씩이었다.

정의맹에서 당시 사건을 맡은 것이 귀검대주였던 한빈이었다.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하얀 경장 차림의 미인이었다고 했다.

이마에 붉은 점이 다섯 개 찍힌 여인.

덕분에 정의맹에서는 그 여인을 마교도로 특정했었다.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한나라 때의 대표적인 미인인 조비연을 닮았다고 했다.

조비연은 가녀린 미인의 표상이었다.

마른 몸매는 버드나무를 닮아 있었고, 가느다란 손가락 끝으로 뻗어 있는 손톱은 버드나무잎과 같았다고 했다.

생존자는 어렴풋한 기억으로 조비연을 닮았다고만 증언했었다.

재미있는 것은 미인이라고는 했지만, 정확한 얼굴을 떠올리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기억이 조작되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한빈은 그것이 백 년 전의 무공인 혈수신공이라고 상부에 보고했었다.

한빈이 혈수신공이라고 보고한 이유는 한 가지였다.

모두가 행복한 표정으로 죽었다는 점.

그리고 그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점.

이것이 그 무공을 신공이라 부르는 이유였다.

물론 그 보고는 그대로 묵살되었다.

백 년 전의 무공이 어떻게 세상에 나오냐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지금 상황은 전생과 달랐다.

잊힌 무공과 마주한 것이 벌써 몇 번이나 된다.

근묵자흑을 써서 수하로 만들었던 음마혈녀조차 세상에 나오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고수였다.

암제의 무공은 또 어떠한가?

상대는 혈수신공을 익힌 백 년 전의 혈후 본인은 아니더라도, 그 후인일 가능성이 컸다.

잠시 상념에 빠진 한빈을 본 자청이 외쳤다.

“그쪽이 아니라니까!”

“고것참 시끄럽네.”

“이제 우리는 죽었다니까.”

“쉿.”

한빈은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며 고개를 돌렸다.

“설화야.”

한빈의 모습에 설화가 바로 반응했다.

“네, 공자님.”

“다시 묻어라.”

“진짜로요?”

“이왕이면 아혈도 같이 만져 주면 좋고!”

“네, 공자님.”

설화가 들고 있던 당과 꼬치를 내팽개치고 다시 흙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들의 머리 위에는 갈대 하나만 삐죽 솟아 나왔다.

모든 광경을 바라보던 초아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후의 발악이었다.

그때 은침 하나가 날아와 그녀의 목덜미에 박혔다.

픽!

동시에 그녀의 혀가 움직였다.

상대가 아혈을 풀어 준 것이다.

물론 아혈을 풀어 준 것은 한빈이었다.

멀리서 침을 쏘아 초아의 아혈을 풀어 준 한빈이 천천히 걸어왔다.

초아는 이게 마지막 기회임을 알았다.

“나를 꺼내 주면 여기에서 살아날 방법을 가르쳐 주지. 이제 너를 살릴 수밖에 없다.”

“내가 같이 죽기를 원한다면?”

“이, 이 또라이 같은!”

“나한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죽음을 자초하느냐? 혈후와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이곳에서 백경밖에 없다.”

“너, 혈후란 사람 말이야…….”

“말해 봐라.”

“너희와 같은 백경 맞지? 다른 배의 선주.”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맞네. 그럼 너도…….”

한빈이 말끝을 흐렸다.

슬쩍 입꼬리를 올린 한빈이 다시 검집을 꺼냈다.

검집 그대로 날아오는 상대의 일격.

초아는 피할 수 없었다.

푹.

초아의 눈이 커졌다. 통증보다 상대의 표정이 묘했다.

“희열에 찬 그 표정은 대체…….”

“일단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그만 쉬어.”

“정녕 같이 죽자는 거냐!”

초아의 외침에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한빈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이미 작업을 마친 설화가 어디서 났는지 당과 꼬치를 들고 있었다.

한빈은 설화에게 턱짓했다.

동시에 설화가 당과 꼬치를 뒤로 숨기며 초아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녀의 머리 위로 흙을 던졌다.

퍼벅.

그때였다.

다시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필리리, 휘이익.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바람을 타고 오는 것이 소리뿐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전생에 맡았던 고급 향낭의 냄새가 그대로 실려 오고 있었다.

마친 설화가 손을 털고 일어났다.

“공자님, 다 됐어요.”

“일단 청화가 있는 곳으로 튀어라.”

“튀어요?”

“이건 부탁이 아니라 지시다. 그리고 이걸 모두 털어 넣고!”

한빈이 주머니 하나를 던졌다.

반사적으로 주머니를 잡은 설화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피독주잖아요.”

“그래, 남은 피독주를 입에 다 넣고 저쪽으로 달려가거라. 구걸십팔보를 극성까지 펼쳐서!”

한빈이 북서쪽을 가리켰다.

“아, 알았어요. 공자님.”

설화가 표정을 굳혔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이다.

한빈이 이렇게까지 다급하게 지시를 내린 적이 있던가?

단연코 그런 경우는 없었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던 암제와의 일전에서도 담담하게 적진을 바라봤던 한빈이었다.

그런데 그런 한빈의 음성에 다급함이 묻어 나왔다.

설화는 자신이 옆에 있어 봤자 방해만 됨을 깨달았다.

입 속에 피독주를 다 털어 넣은 설화는 눈을 가늘게 떴다.

주머니 속에 쪽지 하나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 한빈이 준 비단 주머니일 터.

설화는 주머니를 품속에 넣고 한빈이 가리킨 방향으로 냅다 뛰었다.

사사-삭.

낙엽 밟는 소리만 남기고 사라진 설화의 신형!

이제 다섯 개의 구덩이 가운데 한빈만이 남아 있었다.

주위를 바라보던 한빈이 월아를 뽑았다.

스릉.

가냘픈 소리와는 달리, 월아의 검신이 내뿜는 예기는 대기를 얼릴 것처럼 빛났다.

순간 한빈이 검을 뻗었다.

‘일촉즉발!’

그러고는 눈을 감았다.

한빈은 적의 수법을 대충 알 것 같았다.

적은 지금 자신의 판을 이 갈대숲 주변에 깔아 놓은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냄새로 판단이 가능했다.

설화는 그 상대가 깔아 놓은 판의 빈 공간으로 빠져나갔다.

“후.”

한빈이 다시 숨을 들이켰다.

설화가 빠져나가고 상대가 깔아 놓은 판 속의 빈틈이 완전히 막혔다.

이제 전생에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한빈이 직접 해결해야 했다.

수많은 정파인과 마교인이 모두 한자리에서 죽어 간 사건.

얼굴에 끔찍한 혈수가 남아 있으면서도 행복한 표정으로 숨을 거둔 기묘한 상황.

아마도 지금 적이 짠 판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듯했다.

그 판은 지금 풍겨 오는 향기와 관련있는 것이 분명하고 말이다.

행복한 표정과 향기라?

화살처럼 앞으로 나아가던 한빈이 월아를 살짝 꺾었다.

앞쪽에서 다가오는 가공할 기세 때문이다.

기세가 점점 가까워지자 어렴풋이 형태가 보였다.

흰색 소매를 너풀거리면서 날아오는 모습이 마치 선녀 같았다.

거기에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를 잘 나타내는 복장까지.

뭇 사내가 본다면 단번에 빠져들 용모였다.

거기에 하얀 소맷자락 사이로 드러난 손도 마치 누군가 조각을 해 놓은 것처럼 정갈했다.

하얀 손가락 끝에 뻗은 가지런한 손톱.

아마도 한 번도 싸우지 않은 손이든가 아니면 철저하게 단련된 부분일 듯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손톱이 저리 온전히 붙어 있을 수는 없었다.

한빈은 일단 거리를 가늠했다.

‘오십 걸음, 스무 걸음.’

딱 여기까지 셋을 때, 하얀 무복이 한빈의 시야를 가렸다.

전생에 살아남은 생존자의 증언과는 약간 다른 것이, 경장 차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복장이 화려했다.

상대는 공작이 날개를 펼치듯 하얀 의복을 뒤쪽에 펄럭이며 사뿐히 내려앉았다.

“아이야!”

그것이 상대의 첫마디였다.

점점 진해지는 향은 한빈의 몸을 옭아매려 달려드는 것만 같았다.

한빈의 후각은 무림에서도 최고.

그 향기는 어떤 독도 품고 있지 않았다.

물론 지금 풍겨 오는 향기만을 얘기할 때에 한해서였다.

그 향기와 다른 독이 결합해서 치명적인 상황을 만들어 낼 수도 있는 법이었다.

한빈은 상대의 외모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외모로만 보면 이십 대 중반 정도.

여인으로서는 물이 올랐다고 봐야 할 나이대였다.

그렇다고 기억이 안 날 만한 외모는 아니었다.

생존자의 머릿속을 삭제한 그 무언가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한빈의 시선에 상대가 말했다.

“그렇게 바라보니 부끄럽구나.”

“뭘 그리 부끄러워해요, 혈후 할머니.”

한빈 입에서 나온 첫마디에 상대가 움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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