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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604화 (590/621)

604. 혈후(血后) (4)

경황이 없어서 자신의 사태를 그제야 파악한 초아는 망연자실했다.

살려 주고 다시 파묻는다는 상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거기에 다시 드러낸 사악한 미소.

이건 최악의 상황이었다.

초아가 다시 발악하듯 외쳤다.

“왜 나를 살렸느냐! 대체 무슨 짓을…….”

“비밀이라니까! 참 말 많네.”

“네놈은…….”

“안 되겠다. 저 친구 입 좀 막아라. 집중이 안 되잖아.”

한빈의 뜻 모를 말에 초아가 눈을 크게 떴다.

동시에 초아는 어깨 쪽에서 통증을 느꼈다.

아혈이 지나가는 혈맥 중 하나인 견정혈이었다.

초아는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멍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볼 뿐이었다.

뒤쪽에 있던 설화가 손을 쓴 것이다.

아혈을 제압당한 초아는 졸지에 금붕어가 되어 버렸다.

목소리는 못 내고 입술만 달싹이며 눈만 끔뻑거리는 모습이 금붕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었다.

그때 설화라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 토끼 언니, 미안해요. 할 말은 많겠지만, 우리 공자님이 화 안 나게 하는 게 더 중요해요. 일단 공자님이 묻는 건 바로 대답해 주세요.”

“…….”

“에? 왜 대답이 없어요? 대장이라서 자존심을 세우겠다는 말인가요?”

설화가 눈을 매섭게 떴다.

마치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입을 삐죽 내미는 모습이, 손에 쥔 단검으로 목을 벨 기세였다.

순간 초아는 이 집단이 정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아혈을 제압해 놓고 대답을 하라니!

이건 듣도 보도 못한 고문 방법이었다.

그때 설화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직도 대답이 없네. 셋 셀 동안 대답이 없으면 거칠게 다룰 수밖에 없어요, 대장 토끼 언니.”

“…….”

초아는 미칠 것만 같았다.

공자라는 젊은 사내가 뭔가 이상한 건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미친놈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

초아는 손 모양으로라도 대답하기 위해 팔을 움직였다.

순간 초아는 자신의 팔이 묻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혈을 제압당하지 않아도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때 설화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대답할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설화의 손이 움직였다.

픽!

초아의 마혈을 제압하고 난 설화가 말을 이었다.

“제가 마혈도 제압했어요. 이제 마지막 기회예요. 묻는 말에 대답할 거죠?”

“…….”

마혈까지 점혈해 놓고 대답을 재촉하는 상대의 모습은 광기가 가득해 보였다.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설화를 말렸다.

“너무 재촉하지 말아라.”

“공자님, 재촉 안 하면 해 넘어가요.”

“네가 아혈과 마혈을 찍었으니 상대가 어떻게 대답을 하겠느냐?”

“아……. 그럼 지금 풀까요?”

“그냥 놔두거라.”

“그럼 대답을 못 하잖아요.”

“마혈과 아혈을 제압당했어도. 대답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충분히 의사를 나타낼 수 있는 법이지. 자신의 의견을 못 나타낸다면 그건 대답하겠다는 마음이 없는 거야.”

“아, 그렇죠. 역시 제 생각이 맞았어요.”

설화가 빙긋 웃으며 초아를 바라봤다.

그들의 짧은 대화에서 초아는 확신했다.

이들은 백경이 이제까지 알던 집단이 아니라고 말이다.

사파도 아니고, 마교도도 아니었다.

이건 모욕을 주려는 건지 진심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초아에게 젊은 공자는 더는 적룡대협도 아니고 청운사신도 아니었다.

초아가 보기에 상대는 중원의 인물이 아니었다.

초아가 오해에 오해를 더하고 있을 때,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살아 있는 잉어처럼 펄쩍펄쩍 뛰며 초아의 신체 위에서 돌아다니는 점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전에 혼자 있을 때보다 점이 더욱 진해졌으며 생기 또한 느껴졌다.

점에서 생기가 느껴진다고 하면 다른 이들은 미친 게 아니냐고 하겠지만, 한빈은 진심이었다.

강호에 흩어진 구결을 모으다 보니 점이 팔팔한지 죽어 있는지조차 감이 잡힐 정도였다.

지금 초아에게 나타난 점은 기사회생으로 회복했다고만은 볼 수 없었다.

그보다 더 심오한 규칙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여기에서 그대로 구결을 획득하면 그만이지만, 한빈은 조금 더 다른 관점에서 이 현상을 바라봤다.

이건 구결이 생성되는 규칙을 알아볼 좋은 기회였다.

강호에 흔한 속담으로, 어부가 아들을 진정으로 위한다면 물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 주라는 말이 있다.

지금도 상황은 비슷했다.

앞날을 위해서는 당장 구결을 획득하는 것이 아닌 구결이 모이는 규칙을 알아내는 게 중요했다.

이 규칙을 알아낸다면 상대를 키워서 구결을 획득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저렇게 생생하게 점이 살아 숨 쉬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분노? 아니면 정말 기사회생의 영향?

생각을 이어 가던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설화가 번개처럼 한빈의 앞에 섰다.

“말씀하세요, 공자님.”

“음, 묻었던 애들 좀 파내.”

“네? 힘들게 묻었는데…….”

“그냥 반만 파내. 확인해 볼 게 있어서 그래.”

“존명!”

“그런 말 쓰지 말라니까.”

“조호 오라버니가 하는 거 보니 멋있어 보여서요.”

“허, 설화 네 마음대로 해.”

“감사해요, 존명.”

설화가 포권한 뒤 주변을 둘러봤다.

백경의 무사를 파묻은 곳을 찾아 조심스럽게 흙을 다시 파냈다.

마혈과 아혈이 제압당한 상태에서 그 광경을 보던 초아는 아연실색했다.

그녀는 역시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마혈을 제압당한 상태에서도 초아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자체가 두려웠다.

적을 죽이는 게 아니라 가지고 놀다가 생매장하다니!

어떤 문파가 저리 사악할 수 있단 말인가?

거기에 오랫동안 고통을 받으라는 뜻인지 얇은 갈대를 입에 물려 놨다.

땅속에 잠복해 본 무사라면 갈대가 얼마나 소용없는지를 안다.

갈대를 물고 물속이나 땅속에서 숨어 있어도, 버텨 봐야 이틀이다.

이틀 정도 지나면 마른 갈대는 이슬에 축축해져 막힌다.

어떤 갈대를 써도 이틀이 한계였다.

이틀 뒤에는 희망을 품은 채 더 큰 고통 속에서 죽어 간다.

저건 살려 주기 위함이 아니라 고문에 가까웠다.

물론 이건 초아의 오해였다.

한빈은 애초에 그런 계산 따위는 없었다.

한빈의 목적은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 주며 적의 정신을 무력화시키는 데 있었다.

거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구결이었다.

한빈은 다시 몸을 드러낸 백경의 무사를 보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진득한 미소에 설화마저도 한 발짝 물러설 정도였다.

이 미소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까는 확인 못 했던 구결이 백경의 무사들에게 나타났다.

한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멀리서 봤을 때 구결이 보였는데, 하나씩 잡아 오니 구결이 없어진 이유.

그리고 초아의 몸의 점들이 다시 생동감을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뭉치면 더욱 강해지는 무인들이었다.

그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처음 봤을 때는 뭉쳐 있었으니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보인 것이고, 나중에 하나씩 사로잡았을 때는 흩어졌으니 점이 없어진 것이 분명했다.

지금은 다시 모였으니 점이 살아났고 말이다.

한빈이 네 명의 무사에게 확인한 점은 모두 네 개.

초아라는 아이에게 확인한 점이 모두 두 개였다.

이중 천급 구결을 얼마나 취할 수 있을까?

한빈은 일단 월아를 검집 그대로 뻗었다.

획!

한빈의 일격이 백경의 무사 중 하나의 어깨에 작렬했다.

팍!

순간 한빈의 눈이 커졌다.

어깨에 있던 점이 사라진 것이다.

이건 마치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이형환위를 펼친 것만 같았다.

“휴.”

한빈은 잠시 심호흡하고 상황을 다시 살폈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닌, 이번에는 심화편의 구결 중 안(眼)의 구결을 사용했다.

안의 구결은 동체 시력뿐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볼 수 있게 만드는 효능이 있었다.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안의 구결이 필수적이었다.

안의 구결을 사용하자 어렴풋이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백경의 무사 네 명 모두에게 구결이 있다는 것은 한빈의 착각이었다.

그들은 구결을 나타내는 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의 구결이 빠르게 이동하는 바람에 네 개가 있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정확한 상황을 알았으니 그에 따른 처치는 당연했다.

‘전광석화!’

‘구걸십팔보!’

한빈은 속도에 중점을 두고 검집을 뻗었다.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구결을 획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상대가 다쳐서 구결이 사라진다면?

이 소중한 기회를 허투루 날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슝! 퍽!

비슷한 타격음이 여러 구덩이에서 동시에 울렸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설화는 눈을 크게 떴다.

사실, 백경의 무사들을 다시 파내라고 했을 때 설화는 한 가지 의심을 했었다.

설화가 보기에 백경의 무사들은 모두 미모가 우월했다.

만약 가면을 벗고 저잣거리를 거닌다면 모든 사내가 눈길을 돌릴 정도였다.

설화는 한빈이 그들의 미모에 반해 살려 주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하지만 지금의 광경을 보니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한빈에게는 그들의 미모 따위는 필요가 없었다.

그만큼 한빈의 손 속은 가차 없었다.

이건 설화가 보기에도 고문이었다.

그것도 가장 무서운 고문.

설화가 생각하는 가장 무서운 고문이란 무엇일까?

그녀는 특급 살수 출신.

설화도 고문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었다.

고문 중에 가장 적이 두려워하는 것은 목적이 없는 고문이었다.

고문의 목적은 보통 정보를 알아내는 데 있다.

정보를 알아내고 나면 풀어 주든지, 죽여서 입막음하든지 둘 중 하나였다.

그런데 상대의 목적이 없다면?

이건 고문당하는 자의 처지에서는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다.

설화가 보기에는 한빈은 목적 없이 상대를 고문하고 있었다.

그것도 숨이 끊길까 조심해서 말이다.

보통 한 순번이 돌면 고문의 목적을 말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한빈은 몇 번씩 같은 고문을 되풀이하면서도 목적을 말하지 않았다.

설화가 보기에는 이건 고문을 위한 고문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초아도 마찬가지였다.

무작정 패는 한빈의 모습은 마치 타작하는 농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아니, 농부라고 하기보다는 두더지를 잡는 동네 아이들과 같았다.

머리를 내밀면 두더지를 잡기 위해 손을 뻗는 평범한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백경의 무사들을 패고 있었다.

‘이런 죽일…….’

초아는 한빈을 무섭게 쏘아봤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상대를 증오한다는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무엇인가가 머리를 옥죄여 왔기 때문이다.

손오공의 머리에 씌워진 긴고아처럼, 초아는 자신의 머리에 무형의 금제가 걸려 있음을 깨달았다.

정확히는 머리의 외부가 아니라 머릿속이었다.

그때였다.

한빈이 손 속을 멈췄다.

그러고는 희열에 찬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필리리. 휘이익.

피리 소리는 바람 소리와 섞여 묘한 느낌을 만들어 냈다.

순간 초아의 눈이 커졌다.

그 피리 소리에 반응한 것은 초아뿐이 아니었다.

한빈에게 맞을 때만 해도 이를 악물고 있던 백경의 무사 네 명의 얼굴색이 동시에 변했다.

그중 자청이란 아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외쳤다.

“설마, 혈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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