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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603화 (589/621)

603. 혈후(血后) (3)

백경의 초아는 이렇게 당황해 본 적이 처음이었다.

그녀가 당황한 이유는 상대의 말투가 유림 서원에서 마주했던 적룡대협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자가 아니라면 친척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묘하게 신경을 박박 긁는 말투는 아무리 생각해도 비슷했다.

만약 적룡대협, 그 작자라면?

문제는 심각했다.

분명 적룡대협의 죽음을 확인했다.

그런데도 살아 있다면? 그건 강호의 무인이 아니라 신선에 가까운 존재라는 말이었다.

거기에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이곳의 임무를 맡기 전에 백경은 조직을 삼 등분 해서 현지로 파견했다.

한 곳은 적룡대협을 쫓기 위한 무리였다.

유림 서원에서 목숨 줄을 끊은 적룡대협이 나타났다고 보고가 된 것.

그뿐이 아니었다.

청운사신이란 작자도 나타났다고 소식이 들어왔다.

조직의 삼 분의 이는 그자들을 쫓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런데 적룡대협이란 작자가 이곳에 나타났다고?

그렇다면, 소식 속의 적룡대협은 가짜일 수밖에 없었다.

가짜가 출몰한 이유는 당연히 유인책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위험한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적룡대협을 쫓기 위해 파견된 다른 백경의 무사도 위험에 처했다는 말이었다.

이것은 초아에게는 엄청난 문제였다.

유림 서원에서 적룡대협을 자신이 죽였다고 선주에게 보고하면서 생긴 오해였다.

그런데 상대는 유림 서원 말고 다른 곳에서도 봤다고 비꼬는 어투로 말하고 있었다.

초아는 호흡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대체 너와 어디서 봤다는 거지? 내가 보기에 너는 분명히 적룡대협이란 작자다. 그렇지?”

“참, 머리가 나쁘면 삼대가 고생한다던데……. 갑판 위에서 기억 안 나?”

“갑판 위라면…….”

초아는 본능적으로 품속에서 신호탄을 꺼냈다.

그러고는 가차 없이 끈을 당겼다.

다른 신호탄과는 다르게 제법 위쪽으로 높이 올라갔다.

태양을 향해 꽂힐 듯한 기세로 날아가던 신호탄이 터졌다.

팡!

하얀 불꽃이 천천히 지면으로 내려온다.

마치 난을 그리듯 말이다.

대낮에 하얀 불꽃인데도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묘한 불꽃이었다.

이 신호는 백경의 무사들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이 신호탄의 의미는 백경의 경계경보 중 두 번째 단계인 지급 경보였다.

이 신호탄 하나면 외부에 있는 백경의 무사들은 이곳으로 몰려들 것이었다.

초아가 이 신호탄을 쓴 이유는 간단했다.

갑판 위에서 본 외부인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

그것은 청운사신이란 작자였다.

상대의 말에 의하면, 청운사신과 적룡대협이 같은 인물이란 의미였다.

즉, 청운사신의 출몰도 함정이란 뜻이었다.

가짜가 둘이나 출몰했다는 것은 진짜 중요한 곳이 바로 이곳 백독문이라는 말이었다.

신호탄을 쏜 초아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신선이 되겠다는 꿈은 저 멀리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몇 걸음 안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중원의 쥐새끼 하나 때문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씩씩대던 초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상대의 이상한 행동 때문이었다.

청운사신인지 적룡대협인지 알 수 없는 상대는 아무렇지 않게 먼 산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먼 산이 백경의 배가 있는 쪽이었다.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다는 말인가…….”

초아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백경의 전력을 분산시킨 것부터 시작해서 저렇게 백경의 위치까지 알고 있다면?

상대의 깊이가 짐작되지 않았다.

이제는 어느 쪽이 진짜 적룡대협인지도 헷갈릴 정도였다.

눈앞에 있는 자가 유림 서원에서 마주친 자일까?

상대는 그렇다고 하지만, 그것조차 거짓일 수 있었다.

가장 궁금한 것은 백경이 있는 곳을 어떻게 알고 있냐는 점이었다.

혹시 상대가 백경의 모든 계획을 알고 있다면?

초아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물론 한빈이 백경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는 것은 초아의 착각이었다.

한빈이 보고 있는 것은 용린검법의 책장이었다.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천급 구결 몽(夢)을 획득하셨습니다.]

초아의 허벅지에 은침을 찔러 넣으며 획득한 구결이었다.

이어진 책장에는 그동안 획득한 천급 구결과 알 수 없는 구결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천급 – 대(大), 비(非), 만(晩), 사(似), 몽(夢)]

[알 수 없는 구결 : 삼(三)]

천급 구결이 다섯 개가 모였다.

아직 적절한 짝을 못 찾은 듯 조합되지는 않았지만, 한두 개만 더 모으면 새로운 천급 초식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빈은 지금 조급해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초아라는 무사의 몸 곳곳에는 천급 초식이 넉넉하게 남아 있었다.

한빈은 마른침을 삼키며 초아의 몸 곳곳을 확인했다.

처음 봤던 구결이 없어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빈의 눈빛에 초아는 자신도 모르게 뒤쪽으로 물러났다.

가면 뒤로 얼핏 보이는 상대의 눈빛이 이상하리만큼 끈적였기 때문이다.

저런 눈빛은 어디선가 본 듯하기도 했다.

그녀가 목숨을 거뒀던 색마들이 저와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가공할 무공에다가 사람의 마음을 긁어 놓는 격장지계.

그뿐 아니라 뒤틀린 색욕까지 가지고 있는 자라…….

초아는 이쯤에서 상대를 다시 판단해야 했다.

상대는 적룡대협이나 청운사신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때였다.

상대가 움직였다.

상대의 검 끝에서 푸른 강기가 일렁였다.

그것은 검이라고 볼 수 없었다.

마치 한 마리의 독사 같았다.

휘릭.

혀를 날름거리며 품 안으로 날아오는 적의 검에 초아의 검이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파 팍!

유림 서원에서 썼던 마지막 초식을 토해 냈다.

남은 내공으로 그녀의 주변을 불사를 수 있는 마지막 초식이었다.

초아가 외쳤다.

“모든 것을 삼켜라!”

그 외침의 끝에 초아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몸의 곳곳을 노리고 달려들던 상대의 기세가 봄날 눈 녹듯 사라졌기 때문이다.

대신 붉은 불꽃 하나가 초아의 발아래로 떨어졌다.

순간 초아의 눈이 커졌다.

쌉싸름한 화약 냄새가 주변으로 퍼졌기 때문이다.

생각할 틈도 없이 굉음이 귀청을 찢었다.

쿠아-앙!

초아는 검집과 검신을 교차시켜 기막을 펼쳐 냈다.

기막을 펼쳐 냈지만, 하염없이 몸이 뒤로 밀렸다.

유림 서원에서 당했던 폭발보다 몇 배는 강한 것 같았다.

그때였다.

다시 목덜미에 통증이 밀려왔다.

목 부근을 더듬자 침 하나가 손에 걸렸다.

초아는 침을 뽑아 땅에 던지고 재빨리 자신의 목을 점혈했다.

픽.

목이 뻐근하긴 했지만, 침에 찔린 부근은 완벽하게 피의 흐름을 차단했다.

그때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꽤 하는데?”

“그때 그 적룡이란 작자가 맞느냐?”

이건 초아의 당연한 의문이었다.

무공의 격차가 너무 컸다.

당시에는 초아도 마지막 힘까지 짜내서 적룡대협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마지막 힘을 짜내기도 전에 상대가 모든 초식을 차단하고 있었다.

힘을 쓰기도 전에 당하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곳곳에 깔린 함정은 마치 자신을 알고 준비해 놓은 것만 같았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이전에 마주했던 적룡대협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떨리는 초아의 표정을 본 한빈이 웃었다.

“하하, 왜 그렇게 놀라나?”

“…….”

“이번에는 내가 판을 깔았잖아. 그러니 당연히 내가 유리하지. 옛 성현의 말씀에 고수들끼리의 싸움은 백지장 하나의 차이로 판가름 난다고 하지……. 물론 네가 고수라는 건 아니야.”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상대는 고수가 맞았다.

그 증거로 몸 곳곳에 천급 구결을 피워 내고 있었다.

천급 구결을 몸에 담고 있는 자가 고수가 아니라면 누가 고수겠는가?

천급 구결의 유무야말로 한빈이 고수와 하수를 구별하는 기준이었다.

쉽게 말해서 먹을 게 있으면 고수, 먹을 게 없으면 하수였다.

한빈은 이번에도 구결을 얻었다.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알 수 없는 구결을 획득하셨습니다.]

천급 구결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구결이 하나 더 늘었다.

[……]

[알 수 없는 구결 : 사(四)]

구결을 확인하고 다시 월아를 살포시 잡은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상대의 몸에서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제길!”

한빈이 비명을 토해 내며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일촉즉발.’

눈 깜짝할 사이에 상대에게 달려든 한빈은 손을 뻗었다.

그 도중에도 한빈은 상대를 분주히 살폈다.

상대의 몸에서 구결이 사라진 이유는 간단했다.

상대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초아라는 무사의 입술에는 뿔피리가 물려 있었다.

앞에 네 명을 심문하면서 밝혀낸 사실 중 하나가 뿔피리는 구조 요청을 하는 도구이면서 자결 도구라는 것이었다.

물고 있는 모양새로 봐서 뿔피리로 자결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한빈이 누구던가?

상대의 의도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아직 그들에게 시킬 일도 많았고 취해야 할 구결도 산더미였다.

이대로 보내 주는 것은 한빈의 방식이 아니었다.

‘기사회생.’

한빈은 가장 효과적인 초식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하나의 초식을 더 펼쳤다.

‘근묵자흑.’

약을 먼저 줬지만, 독도 심어 놓았다.

누가 보면 이해 못 할 상황이지만, 적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호의였다.

* * *

초아의 귓가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 토끼 언니, 정신이 들어요?”

“너, 너는 누구냐?”

“저는 설화 토끼라고 해요. 질문을 던지기 전에 일단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고맙다고 해야 한다니…….”

“다 죽어 가는 언니를 우리 공자님이 힘들여서 살렸거든요.”

“그러고 보니…….”

초아가 말끝을 흐렸다.

그제야 자결을 했던 마지막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초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녀가 복용한 것은 전신 혈맥이 터져 주변 사람까지 녹이는 화열단이었다.

화열단은 선주도 해독 못 하는 독이었다.

화열단을 해독할 수 있는 것은 신선밖에 없다고 들었다.

떨리는 눈빛은 바로 멈췄다.

그녀는 백경의 일원, 그중에서도 수뇌부급의 무사였다.

표정을 수습한 초아가 물었다.

“대체 왜 나를 살린 것…….”

초아는 말을 멈췄다.

돌아선 사내가 갑자기 초아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기 때문이다.

분명히 자신과 마주했던 적룡대협이란 작자였다.

다만, 토끼 가면을 벗은 맨얼굴이었다.

맨얼굴의 사내는 얼굴이 허여멀건 것이, 무사라고 보기에 민망한 정도였다.

그냥 보기에는 서생으로 보일 정도의 외모였다.

“대체 너는…….”

초아는 말을 맺지 못했다.

천천히 초아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는 적룡대협이란 작자의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자의 눈빛은 이전의 기억처럼 끈끈했다.

초아는 바로 저 눈빛 때문에 자결까지 결심했었다.

그 눈빛의 주인공은 한빈이었다.

한빈이 끈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초아의 신체가 아니라 그 위에 뜬 점이었다.

몸을 회복시키니 점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한빈이 의도한 바였다.

물론 초아는 다른 방향으로 그 눈빛을 받아들였다.

초아는 두려움에 뒷걸음치려 했다.

순간 그녀의 눈이 커졌다.

몸이 옴짝달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혈을 당한 것도 아니었다.

분명히 감각은 살아 있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내려 아래쪽을 바라보니 몸의 반이 흙 속에 파묻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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