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2. 혈후(血后) (2)
이쯤 되니 겉으로 봐서는 설화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우혈랑검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흙이 여기저기 묻어 있는 것이, 지나가는 사람이 본다면 농기구로 착각할 것이다.
“다 망가져 버렸어. 내가 너를 고생시키려고 했던 건 아닌데, 흐으…….”
설화는 우혈랑검을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그때 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들면 청화랑 바꿔 주고…….”
“아, 아니에요. 공자님!”
“힘들면 언제든 말해.”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설화는 고개를 흔들며 우혈랑검에 묻은 흙을 소매에 닦아 냈다.
터벅터벅.
설화는 힘없이 발길을 뗐다.
* * *
가벼운 발소리지만, 땅바닥에 묻혀 있는 자청의 입장에서는 천둥소리보다 더 컸다.
바닥에서 갈대를 통해 겨우 숨을 붙이고 있는 자청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져 왔음을 알았다.
그녀가 죽음을 확신하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것은 바로 공자라는 사람의 입에서 설화와 청화라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설화라……!
자청은 그 이름을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다.
설산신녀라는 이름으로 강호에 얼굴을 드러낸 여고수의 이름이 바로 설화였다.
거기에 청화라는 이름도 들어 봤다.
사천당문의 직계로, 무가지회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고수의 이름이다.
자청이 지금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전에는 이름을 숨기다가 이제는 그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는 점이다.
이렇게 정체를 밝히는 데 거리낌이 없을 때는 딱 한 가지 상황밖에 없다.
그것은 상대의 목숨을 거둘 때였다.
자청이 공포에 떨고 있을 때였다.
“흡.”
갑자기 숨이 막혀 왔다.
자청은 다급하게 호흡을 멈췄다.
모든 게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이건 사파나 마교인보다도 더 악랄한 인간들이었다.
풀어 주지는 않지만 살려 준다고는 했는데, 바로 말을 바꾼 것이다.
가장 악랄한 것은 마지막에 희망을 준 점이다.
갈대를 통해 들어오던 공기를 막음으로 그 희망을 절망으로 바꿨다.
순간, 주마등이 자청의 눈앞에 지나갔다.
척박한 북해에서 지내던 그녀의 앞에 나타난 한 척의 배.
그게 바로 백경이었다.
그 배는 그녀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백경의 무인들은 자청이 사는 마을의 나루터에 사뿐히 내려앉아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마을에 신선의 자질을 갖춘 자를 뽑기 위해 왔다고 했다.
뽑힌 자 중 신선이 되는 데 성공한 자가 나온다면 마을 사람 모두 앞으로는 먹고살 걱정을 할 필요 없게끔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뽑힌 사람이 바로 자청이었다.
수많은 어른과 아이 중 백경의 사람들은 오직 자청만을 뽑아 갔다.
그렇게 백경의 무인으로 뽑혔을 때는 바로 신선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수백 명의 어른과 아이 중 자신이 뽑힌 것은 그만큼 자질이 있는 것이라고 착각했다.
물론 그 착각은 백경에 오른 지 일 년이 지난 후에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자청은 백경의 선원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역할도 할 수 없었다.
선배들의 자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아니 새 발의 피만큼도 존재감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처음으로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게 바로 이번 임무였다.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주마등 속에 북해에 두고 온 가족이 아른거렸다.
그러고 보니 백경에 오르고 나서 가족의 소식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신선이 되면 자신은 영생을 얻고 마을에 남은 가족과 다른 이들은 평생 먹고살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약속을 받았을 뿐이었다.
과연 북해에 남은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 자청은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마을에 남아 있던 가족들에 대한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자신에 대해 놀란 것이다.
‘대체 왜?’
자청은 생각을 끝맺지 못했다.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이 몽롱해졌기 때문에 그 목소리를 정확히 들을 수는 없었다.
그것도 잠시, 갑자기 지축이 흔들렸다.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악물었다.
* * *
설화는 아래에 묻혀 있는 토끼 가면을 쓴 무사들에 대해서는 잠시 잊고 있었다.
누군가 불안에 떨고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못 했다.
지금 설화에게 중요한 것은 구덩이를 파는 것이었다.
그것도 우혈랑검이 상하지 않게 주의하면서 파야 했다.
몇 번 구덩이를 파 보니 설화에게도 요령이란 게 생겼다.
바닥이 고운 곳을 찾는 것이 바로 구덩이를 파는 요령이었다.
설화는 분주히 주변을 살폈다.
살짝 모래가 섞인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백이면 백, 손만 뻗어도 바닥이 파일 땅이었다.
설화는 희미하게 웃으며 우혈랑검을 들고 걸어갔다.
몇 걸음 걷던 설화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발끝에 걸리는 감각이 미묘했기 때문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굵직한 갈대가 낫 모양으로 꺾여 있었다.
“아.”
생각해 보니 백경의 무사들을 묻어 두고 목숨 줄로 연결해 준 갈대였다.
설화는 조심스럽게 발을 뗐다.
물론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건 실수였다.
적을 공포 속에 몰아넣어야 하지만, 끝까지 목숨은 붙여 놓으라는 것이 한빈의 명령이었다.
설화는 힐끔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허허로운 표정으로 먼 산을 보고 있었다.
설화는 안도의 한숨을 넘기며 조용히 구부러진 갈대를 폈다.
아마도 이 갈대의 밑에는 자청이란 무사가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실수라지만, 생명 줄을 이렇게 꺾어 놓고 나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갈대를 똑바로 편 설화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밑에 있는 토끼 가면 언니,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구덩이가 살짝 흔들렸다.
화가 났다는 것인지 아니면 당황했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감정은 설화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다음 구덩이를 팔 장소 앞에 섰다.
그러고는 파혼검을 펼쳤다.
팡!
그 소리와 동시에 파혼검의 초식이 적중한 바닥에 일 장가량 움푹 들어갔다.
* * *
설화가 펼친 파혼검의 초식은 대지를 울렸다.
쿠룽.
마치 지진의 전조 현상처럼 주변 사람들이라면 못 느낄 수 없었다.
소리보다 진동이 더욱 강렬했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초아는 검을 들고 사방을 경계했다.
수하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그때 귓가에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뿌웅!
그 뿔피리는 수하 중 하나의 소리가 분명했다.
뿔리피를 불었다는 것은 위기지만, 상급자인 초아가 감당할 수 있는 적이라는 신호였다.
초아는 검에 진기를 불어 넣었다.
언제라도 상대를 벨 수 있게 준비한 것이다.
시퍼런 검날을 앞으로 세운 초아는 천천히 뿔피리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옛날에 떡장수가 호랑이가 나오는 고갯길을 넘어갔지…….”
“흠.”
초아는 침음을 삼키며 기척을 최대한 죽였다.
지금은 유리한 상황이었다.
적은 목소리를 냈지만, 자신은 기척을 숨기고 있었다.
단번에 기분 나쁜 목소리를 베어 버릴 심산이었다.
초아는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숨을 죽이고 걸어갔다.
그때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호랑이를 만난 거야. 호랑이는 말했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겠다고. 그 후 어떻게 됐을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떡장수의 가장 큰 실수는 호랑이가 있는 고개를 넘어가려고 했던 거지.”
“…….”
초아는 아무 말 없이 이를 악물었다.
묘한 시점에서 목소리가 나는 방향이 바뀌었다.
초아는 천천히 다시 방향을 바꾸었다.
스륵.
마치 갈대숲을 스치는 바람처럼 초아는 발길을 옮겼다.
그때였다.
발목 아래에서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헉.”
초아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발목 아래를 보니 누군가 천잠사를 길게 늘어뜨려 놨다.
이건 적의 함정이라는 말이었다.
초아는 검을 빼서 앞을 막고 있는 천잠사를 베어 냈다.
백경의 무공 앞에서 천잠사 따위는 그저 보통 실에 불과했다.
서걱.
앞에 얽혀 있던 천잠사가 도끼가 지나간 실타래처럼 두 동강 났다.
초아가 희미하게 웃고 있을 때였다.
귓가에 기분 나쁜 파공성이 꽂혔다.
슝!
그 소리에 초아는 재빨리 움직였다.
그녀가 엎드린 자리에 통나무 하나가 지나갔다.
“덫?”
이건 사냥꾼이 설치해 놓은 덫이 분명했다.
다만, 사냥꾼의 목표가 맹수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했다.
초아는 눈을 감고 기감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백경에서 배운 것 중 하나가 눈보다 감각이 더 빠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신선은 신체의 눈이 아닌 마음의 눈을 뜨는 자라고 했다.
눈을 감고 기감을 끌어올리자 주변의 덫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슝!
함정이 하나 더 날아왔다.
기척이 없고 움직임만 있는 것으로 봐서 단순한 함정이 분명했다.
초아는 그 함정을 쳐 냈다.
팍!
묵직한 통나무가 빙글 돌더니 방향을 바꾸었다.
그때였다.
허벅지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초아는 힐끔 고개를 돌려 자신의 허벅지를 살폈다.
허벅지에는 작은 은침이 하나 꽂혀 있었다.
초아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날아오는 함정을 쳐 냈는데 이 은침은 대체 어디에서 날아왔다는 말인가?
어디선가 쏘아 낸 암기라면 자신이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그때 다시 통나무 하나가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슝!
초아는 검을 횡으로 그었다.
팍!
통나무가 힘없이 방향을 바꾸었다.
그때였다.
초아는 방향을 바꾼 통나무 아래에서 손 하나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손이 초아를 향해서 날아왔다.
길게 뻗은 손에는 은침이 들려 있었다.
슝!
초아는 뒤쪽으로 물러나며 손을 향해서 검을 뻗었다.
획!
초아의 검이 손에 닿으려 할 때였다.
손은 자라가 목을 집어넣듯 재빨리 자취를 감추었다.
초아는 그제야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공격을 받았는지 알아챘다.
상대는 날아오던 통나무 밑에 숨어서 몰래 공격을 한 것이다.
순간 지금 상황을 깨달은 초아는 재빨리 검지로 허벅지의 혈도를 찍었다.
픽!
그러고는 끝으로 허벅지를 묶었다.
“비겁한 놈, 독을 쓰다니!”
“그건 너희도 비슷하지 않아? 혈독을 먼저 쓴 사람이 누구지?”
토끼 가면을 쓴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상대의 정체는 한빈이었다.
초아는 상대가 누군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
“걱정하지 마. 어떤 상황이 와도 살려는 줄게.”
“…….”
“왜 대답이 없어? 어차피 네 수하는 모두 처리했어.”
“뭐라고?”
“처리했다고. 아마도 지금쯤이면 모두 늑대 밥이 됐을걸.”
“대체 넌 누구냐?”
“그건 비밀이라고밖에 할 수 없네.”
“흠.”
초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바라봤다.
상대도 백경의 무사처럼 토끼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한참을 보던 초아가 말을 이었다.
“대체 어떻게 나와 똑같은 가면을 쓰고 있지?”
“원래는 조금 모양이 달랐어. 비슷하게 만든다고 만들었는데, 토끼 귀가 약간 모양이 다르더라고. 그런데 지금은 네 수하가 쓰고 있던 것을 빼앗아 썼으니 똑같다고 볼 수 있지.”
“…….”
초아는 아무 말 없이 상대를 살폈다.
묘하게 속을 긁는 듯한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정확히는 목소리보다는 말투였다.
말투를 떠올린 초아의 눈이 커졌다.
“너, 나랑 본 적 있지?”
“어디서?”
“유, 유림 서원에서……. 설마 네가?”
“유림 서원에서만 본 것 같아? 우리는 다른 곳에서도 봤을 텐데?”
“유림 서원 말고 다른 곳에서 너를 봤다고?”
초아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