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1. 혈후(血后) (1)
설화를 바라보는 자청의 눈은 토끼 가면 뒤에서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황당함이 더 컸다.
자신이 이렇게 당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백경의 무공이 그렇게 호락호락하던가?
자신이 백경의 막내라고는 하나, 조직의 상징인 뿔피리를 받은 어엿한 무사였다.
그런데 상대에게 이렇게 힘없이 꺾인다고?
자청은 지금의 상황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당황하는 자청의 모습에 설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참을 바라보던 설화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직 정신 못 차렸네요. 원래 포로는 묻는 말에만 답해야 하는 게 법칙이라고 우리 공자님이 말씀하셨어요. 포로가 묻는 말에 대답 안 하면 이렇게 하라고 하셨어요.”
“뭐라고…….”
자청을 말을 맺지 못했다.
설화가 흙을 한 움큼 던졌기 때문이다.
파팍.
설화가 털어 넣는 흙이 자청의 입에도 들어갔다.
자청이 본능적으로 입 속으로 들어오는 흙을 뱉어 냈다.
“푸.”
설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흙을 퍼부었다.
주르륵.
자청의 머리 위로 털어 넣은 흙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청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상대의 손이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자 자청은 상대의 정체에 대해 의심이 들었다.
상대가 누구이기에 백경의 정체를 알고 있단 말인가?
혹시 백독문 안으로 도망간 백룡의 잔챙이?
자청은 고개를 흔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이들이 백룡의 일원일 리는 없었다.
백룡은 적이긴 해도 품격이라는 게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상대는 품격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상대는 사파일 가능성이 컸다.
그것도 아니라면 마교의 인물일 가능성도 조금은 있었다.
어쨌든 상대는 정파의 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사악할 수는 없었다.
흙을 머리 위로 뿌리는 상대보다도, 옆에서 팔짱을 낀 채 흐뭇하게 웃고 있는 공자라는 인간이 더 사악해 보였다.
백경이 피도 눈물도 없는 조직이라고는 하나!
저 인간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고 할 수 있다.
백경은 최소한 망자에 대한 예의는 있었다.
거기에 비해 저들은 죽은 자까지 모독할 인물들이었다.
흙이 자청의 목덜미에 찼을 때야 설화가 손을 멈췄다.
“이 정도면 됐네요. 참, 우리 공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적이 반항하면 바로 묻으라고요.”
“아.”
자청은 탄성밖에 지를 수 없었다.
여기에서는 어떤 말을 해도 바로 파묻힐 것만 같았다.
그때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상체를 기울였다.
한참 동안 자청의 눈빛을 보던 설화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까 궁금하다고 한 게 뭔데요?”
“어…….”
자청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질문을 던진 죄로 목까지 파묻히지 않았던가?
그런데 궁금한 것이 뭐냐고 묻자 자청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난감했다.
자청의 표정을 본 설화가 물었다.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래요. 파묻지 않을 테니 물어봐요, 토끼 가면 언니.”
“파묻지 않는다는 말, 진짜냐?”
“그럼요. 저 이제까지 거짓말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정말 파묻지 않을 거지?”
“왜 사람 말을 못 믿어요, 토끼 가면 언니.”
“그럼 믿고 물어볼게. 대체 우리가 온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우리 공자님이 그러는데, 충분히 예상 못 할 적과 변고는 없다고 했어요. 지금 이 일도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죠…….”
“대체 어떻게 그걸 알았다는 말이냐?”
“방귀가 잦으면 똥은…….”
말을 이어 나가려던 설화는 재빨리 입을 막고 한빈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공자님이 천기를 아시기 때문이죠.”
설화가 뿌듯한 표정으로 뒤쪽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의 눈동자가 살짝 반짝이다가 멈췄다.
설화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키고 다시 상대를 바라봤다.
“그럼 지금부터 질문할 테니 대답하세요.”
말을 마친 설화는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그러고는 그것을 아래위로 훑어봤다.
그 모습에 자청이 물었다.
“대체 그것은 무엇이냐?”
“다른 토끼 가면 언니한테 자백을 받아 낸 진술서예요. 여기랑 내용이 다른 게 있으면 바로 묻어 버릴 거예요. 물론 먼저 진술한 언니가 있는 구덩이로 가서 마저 처리해야겠죠. 뭐, 머리 위로 떨어지는 건 흙이 아니라 펄펄 끓는 기름일지도 몰라요.”
“기름…….”
“구덩이에 묻어 놓고 펄펄 끓는 기름을 부어 버리면 산짐승에게는 그보다 맛난 고기가 없는 법이에요.”
“너희는 마교인이냐?”
이건 진심이었다.
저런 협박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으로 보아 사파인이 아니라 마교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제는 예상하는 것이 아니라 결론을 냈다.
떨리는 자청의 목소리에 설화가 답했다.
“그건 비밀이에요.”
말을 마친 설화가 피식 웃었다.
물론 설화가 오늘따라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모두가 한빈의 명이었다.
상대방의 감정 상태를 완벽하게 무너뜨려 놔야 했다.
설화가 한쪽에는 두루마리를, 한쪽에는 우혈랑검을 들고 눈을 반짝였다.
순간, 자청은 그것이 거짓말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단검을 손에 쥔 모양이나, 눈빛 모두 사람을 죽여 본 자의 것이었다.
자청은 침을 꿀꺽 삼키고 설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설화는 바로 묻지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확인했다.
그 모습이 생각보다 진지해 보였다.
눈이 아래위로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은 무슨 질문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 모습을 살피던 자청은 두루마리의 진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했다.
자신이 상대에게 사로잡힌 것은 무공이 낮아서였다.
자신 말고 다른 동료의 경우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사로잡힐 인물은 없었다.
하지만 만약 상대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자청은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대화지만, 지금 이 모든 것이 고도의 심리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적이 자신의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해 거짓을 꾸미는 것으로 생각했다.
동시에 자청은 등에 소름이 돋았다.
만약 정말로 먼저 사로잡힌 동료가 있다면, 여기에서 살아 나갈 확률은 희박했다.
그때 설화가 말을 이었다.
“토끼 가면 언니, 일단 가면은 벗겨 줄게.”
말을 마친 설화가 우혈랑검을 뻗었다.
휙.
자청의 귓가에 찬 바람이 스치면서 토끼 가면이 풀렸다.
순간, 자청의 머리가 아래로 출렁거렸다.
그 모습에 설화가 말을 이었다.
“우리 공자님이 적의 얼굴은 기억해 놔야 한다고 했어요, 토끼 가면 언니. 아, 그러고 보니 토끼 가면이 없으니 그냥 언니네요. 그럼 지금부터 질문할게요. 잘 대답한다면 살려 줄게요. 그러니까…….”
설화는 쉴 틈 없이 질문을 던졌다.
대부분이 백경의 조직에 관한 질문이었다.
한빈은 팔짱을 낀 채 자청의 자백을 들었다.
자청은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답을 이어 나갔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전부다. 그러니 어서 풀어 줘라.”
“잠시만요.”
설화는 조용히 한빈에게 다가갔다.
“저 언니가 아는 건 다 분 것 같은데요.”
“뭐, 그럼 그만 정리해.”
“네, 공자님.”
설화가 재빨리 자청에게 다가왔다.
자청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풀어 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제가 언제 풀어 준다고 했어요?”
“그럼 아까 한 말은 무엇이냐?”
“살려 준다고 했지, 풀어 준다고는 안 했거든요. 일단 이것부터…….”
설화가 자청의 입에 갈대를 물렸다.
갑자기 갈대가 입 안으로 들어오자 자청이 화들짝 놀랐다.
“이, 이게 대체 뭐냐?”
“이게 생명 줄이니까 일단 물고 계세요. 다시 뱉으면 그냥 모른 척할 거예요.”
“그, 그게 무슨 말…….”
그때 다시 갈대가 자청이 입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머리 위로 다시 흙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자청은 갈대의 용도에 대해서 알 것 같았다.
살려는 주되 풀어 주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그때 자청의 눈에 두루마리가 들어왔다.
순간 자청은 입에 문 갈대를 놓칠 뻔했다.
두루마리는 텅 비어 있었다.
자청은 그제야 모든 것이 상대의 연극임을 깨달았다.
먼저 사로잡힌 동료 따위는 없었다.
정확한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해서 상대가 이런 판을 꾸민 것이 분명했다.
대체 어떤 조직이기에 백경을 상대로…….
자청은 정확히 일각 후 자신의 결론을 다시 버려야 했다.
입에 갈대를 물고 겨우 생명을 이어 나가고 있는 그녀의 귓가에 동료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백경의 무사 하나가 외쳤다.
“대체 네놈들은 누구냐?”
“좀 가만히 있어 봐. 이거 비싼 함정이란 말이다. 요즘 천잠사가 얼마나 비싼지 일아? 네가 두른 천잠사만 해도 일반 백성들이 십 년 치 먹고살 돈이야. 그거 끊어지면, 바로 죽는다.”
“대체 정체가 뭐기에…….”
“그건 비밀이라서 알려 줄 수가 없네. 설화야, 시작해.”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빈이었다.
설화와 함께 백경의 무사 하나를 함정으로 유인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한빈의 눈앞에 있는 백경의 무사는 아예 누에고치가 되어 있었다.
천잠사에 둘둘 말려 있는 상태.
설화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는 한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몰랐던 백경의 비밀을 어느 정도 밝혀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빈은 나지막이 외쳤다.
“속전속결!”
“네?”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빨리 처리해야 할 것 같아서.”
이 말은 진심이었다.
적을 처리하든 먼저 이곳을 벗어나든 빠른 판단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밝혀낸 사실 중 가장 놀라운 것은 백경이 한 척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한빈이 마주했던 우두머리는 선주 겸 선장이라 불리는 인물로, 반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가장 섬뜩한 부분은 장자명의 사매를 가둔 무리가 이들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세력 하나가 더 있다는 것이었다.
그 세력이 만약 백경의 다른 배에서 나온 자들이라면?
목숨을 장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니 구결과 정보를 완벽하게 빼앗은 후 후퇴하는 것이 순리였다.
* * *
반 시진 후.
한빈은 팔짱을 끼고 구덩이를 바라봤다.
구덩이는 모두 네 개였다.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적을 찾고 있던 백경의 무사들이 모두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묻힌 것이다.
마지막 무사를 묻고 난 한빈은 설화에게 말했다.
“구덩이 하나만 더 파 놓고 있어. 잠시 다녀올 테니.”
“그런데 크기는 어떻게 할까요?”
“앞에 친구들과 똑같이 하면 돼.”
“알았어요, 공자님.”
고개를 끄덕인 설화가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것도 잠시, 설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
한숨을 길게 내쉰 설화가 우혈랑검을 잡았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초식 써도 돼요, 공자님?”
“뭐, 막판인데 쓰려무나.”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설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설화가 가장 힘들어한 부분은 다름 아닌 땅을 파는 것이었다.
초식을 쓰면 힘들이지 않고 구덩이를 파낼 수 있지만, 한빈은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
이 기준에 맞추다 보니 내공이 아닌 순수한 힘으로 구덩이를 파야 했다.
거기에 설화가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우혈랑검도 이제는 흙 범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