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9. 예상 가능한 변고 (4)
지금 상황도 잊은 채 문도희는 청화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계속 호기심이 꿈틀거렸다.
적의 칼이 목전에 와 있는데도 공자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이 먼저였다.
문도희의 표정을 본 청화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많이 불편하세요? 조금만 있으면 편안해지실…….”
“그게 아니에요. 당 소협의 치료 덕분에 몸은 괜찮아요. 다만, 방금 자리를 뜬 공자라는 분의 정체가 궁금해서 그래요.”
“에? 우리 공자님을 모르세요?”
“몰라요. 저런 사람이 강호에 있다는 건 처음 들어 봐요.”
문도희가 어색하게 웃자 청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라고 하면 다 알던데…….”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라고요?”
“네, 맞아요. 우리 공자님이 하북팽가의 넷째 공자님이에요.”
“헉, 대체…….”
문도희는 말끝을 흐렸다.
가끔 들리던 소문이 있긴 했어도 그 소문들은 모두 황당했다.
겁쟁이라느니, 자질이 최악이라느니 하는 말뿐이었다.
덕분에 독문에서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이 하북팽가의 사 공자였다.
그런데 그런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말도 안 되는 경공술을 펼치다니!
거기에 사천당가의 직계를 수하 부리듯 하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광경에 탄성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때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후웁.”
고개를 돌려 보니 적혈문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있다.
문도희는 재빨리 힘을 짜내 물었다.
“괜찮으세요? 적혈문주.”
“이, 이제야 정신이 듭니다. 미독.”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대체…….”
“이분은 저희를 돕기 위해서 나온 사천당가 고수분이에요. 그리고…….”
문도희는 고개를 돌려 한빈이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자신들을 이곳으로 대피시키고 사라진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궁금해진 것이다.
“그럼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님은 어디 가신 거예요?”
“저한테는 수금한다고 하면서 가셨어요.”
“수금이요?”
“나머지는 저도 잘 몰라요. 우리 공자님은 비밀이 좀 많아서요. 헤헤,”
뒷머리를 긁적이며 해맑게 웃는 청화의 모습에 문도희의 눈이 보름달만 하게 커졌다.
* * *
한빈과 설화는 기척을 숨기며 멀리서 백경의 무사들을 관찰하고 있다.
혈독을 푼 것은 백경의 무리가 맞았다.
하지만 갈대숲 앞에 푯말을 붙여 놓은 것은 바로 한빈이었다.
한빈이 그곳에 금지라는 푯말을 붙여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함정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잘못해서 애먼 사람이 갈대숲 안으로 들어온다면, 한빈이 만들어 놓은 덫이 모두 무용지물이 될 게 뻔했다.
한빈이 이렇게 함정을 만들어 놓은 이유는 한 가지였다.
바로 안쪽까지 이어진 백경의 냄새 때문이었다.
한빈은 전에 백경의 배에 오르면서 천리추종향을 뿌려 놨다.
희미하지만, 그때의 냄새가 풍겨 왔다.
백경의 인물이 아니라면, 최소한 관계가 있는 자가 백독문의 안에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미리 준비하는 것이 맞았다.
덕분에 이중 삼중으로 덫을 만들어 놨다.
물론 그곳이 착각이라는 것을 안 것은 일각 전이었다.
한빈은 유림 서원에서 헤어졌던 음양쌍마를 만났었다.
유림 서원에서 한빈은 음양쌍마에게 배경의 뒷조사를 맡겼었다.
근묵자흑의 임무로 통제받는 음마혈녀는 제법 세세하게 조사를 한 것 같았다.
그 정도의 조사를 하려면 아마도 목숨을 걸었을 것이다.
음양쌍마가 마지막에 조사한 것은 백경에게 쫓기는 인물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 인물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백경과의 대결 이후 북해를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동한 것이 바로 백독문이라고 한다.
그들이 백독문으로 들어간 지는 일주일 정도.
한빈은 그 대목에서 쾌재를 불렀다.
백경과 홀로 맞서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적의 적이 아군이 될 확률은 십 할, 아니 백 할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한빈은 떠나는 음마혈녀의 머릿속에 있는 근묵자흑의 수법을 거두었다.
이번에 근묵자흑의 수법을 누군가에게 써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잠시, 자신이 만들어 놓은 함정을 생각하고는 잠시 넋을 놨었다.
반나절 동안 숨도 쉬지 않고 만들어 놓은 덫이 무용지물이 될 판이였다.
한빈은 안쪽에 있는 적을 유인해서 함정으로 몰아넣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안쪽에 있는 인물은 한빈의 아군이 될지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낙담하고 있던 차에 마침 토끼 가면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천급 구결로 보이는 점을 주렁주렁 달고 말이다.
이건 천지신명이 내려 준 선물이었다.
현재 보이는 토끼 가면은 다섯 명.
그중 하나는 유림 서원에서 만났던 친구였다.
그 친구의 이름은 한빈도 알고 있었다.
‘초아라 했던가?’
하지만 알은척을 할 수는 없는 것이, 당시에는 청운사신으로 변복한 상태에서 만났었다.
지금은 본래 신분 그대로 토끼 가면의 무리와 대결해야 했다.
초상비의 수법으로 갈대숲 위를 치고 달리는 토끼 가면 무리를 보면서 한빈은 입맛을 다셨다.
“쩝, 이게 웬 떡이냐!”
“공자님, 저들의 무위가 만만치 않은데 왜 그렇게 좋아하세요?”
“설화야, 내가 항상 말하지만, 싸움에서 승패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계약서가 중요한 건가요?”
“싸움에서 중요한 건 보상이지. 솔직히 싸움에서 한 번 진다고 해서 그게 인생에서 뭐 그리 중요하겠느냐.”
“…….”
“몰리면 튀면 되고, 질 것 같으면 숨으면 되는 게 싸움의 최고 법칙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튀면서도 상대방의 주머니를 터는 것이지.”
“주머니를 털어요? 쟤들 부자예요? 아니, 돈은 공자님이 제일 많잖아요.”
“주머니가 가득 찼다고 생각하는 건 위험하단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주머니를 가득 채웠다고 생각하는 순간 가난해지기 시작하는 법이다.”
“앗, 그거 조금 의미심장한 얘기 같은데요.”
“설화야!”
“네, 공자님.”
“그건 안 적어도 된다.”
한빈의 말에 설화가 조그만 붓을 재빨리 숨겼다.
한빈은 다시 토끼 가면을 주시했다.
초아라는 무인 말고 다른 무인들의 경지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경지는 관계없었다.
유림 서원에는 부딪쳤을 때는 적이 짠 판 위에서 놀았다.
이번에는 한빈이 짠 판에 그들을 올려놓고 싶었다.
싸움에서 반드시 이길 필요는 없다.
한빈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천급 구결이다.
한빈은 조용히 허공을 바라봤다.
[천급 – 대(大), 비(非), 만(晩), 사(似)]
[알 수 없는 구결 : 삼(三)]
남아도는 구결은 네 개.
초식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구결이 필요했다.
한빈은 최선을 다해서 그들로부터 구결을 긁어 와야 했다.
한빈은 월아를 잡은 왼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설화를 바라봤다.
“설화야, 여기 있는 옷으로 갈아입어라.”
“알았어요.”
“불편한 곳 없게 잘 준비하고.”
“네, 공자님.”
한빈은 설화에게 보따리 하나를 던졌다.
설화는 아무렇지 않게 옷을 꺼냈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다 갈아입고 난 설화는 고개를 갸웃하며 갈대숲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다시 자신의 복장을 봤다.
“아, 이건…….”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는 설화의 앞에 한빈도 나타났다.
한빈도 마찬가지로 옷을 갈아입었다.
정확히는 완전히 갈아입은 것이 아니라 위쪽에 덧입은 것이기에 표시는 조금 났다.
하지만 설화가 입고 있는 의복이랑 똑같은 것은 사실이었다.
설화는 토끼 가면의 무리가 입고 있는 옷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고 말이다.
즉, 한빈과 설화는 토끼 가면의 무리로 완벽하게 변복이 끝났다는 말이었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설화야, 너도 가면을 써라.”
말을 마친 한빈이 가면을 쓰자 설화도 썼다.
이제 갈대숲에는 토끼 가면이 둘 늘었다.
한빈은 토끼 가면을 쓴 설화를 보며 빙긋 웃었다.
“제법 어울리네.”
“공자님도 잘 어울려요.”
“이제부터 한판 놀아야지?”
“그런데 토끼 가면에 하얀 무복까지……. 대체 어디선 난 거예요?”
“이건 그 친구들이 알아서 준비해 왔더라고. 알고 보면 귀여운 놈들이야.”
“풉.”
설화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한빈이 말하는 귀여운 놈들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이 옷과 가면은 백경에 대해서 조사를 이어 나가던 음양쌍마가 준비한 것이 분명했다.
험악한 마두를 보고 귀엽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아마도 한빈이 최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화의 입꼬리가 가면 안에서 보기 좋게 말렸다.
한빈이 그 마음을 안다는 듯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토끼 가면 무리를 향해서 몸을 날렸다.
사사-삭.
* * *
주변을 살피던 초아는 손을 들어 수하들을 멈춰 세웠다.
“잠시 대기!”
“존명.”
백경의 무사들이 복창하며 자리에서 멈췄다.
초아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잔챙이들이 보이지 않지?”
“그러게요. 그냥 백독문으로 쳐들어가서 백룡의 수뇌부를 제거하는 게 어때요?”
“그건 우리 백경의 방식이 아니야. 우리는 항상 완벽함을 추구해야 해. 그게 선주님이 원하는 바이기도 하고.”
“그런데 어디로 자취를 감추었을까요? 조장님 말씀대로 밖에 있는 잔챙이를 완전히 제거하고 백독문으로 돌입하는 것이 좋을 것 같긴 한데……. 이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숨어 버렸으니.”
“진법.”
“네?”
“이건 진법이야. 누군가 진법을 구축하고 잔챙이들을 숨겨 놓은 것이 분명해.”
“대체 누가 이렇게 완벽한 진법을 구축했다는 거죠?”
“그건 모르지. 하지만 중요한 건 하나지.”
“그게 뭔데요? 초아 조장.”
“중요한 건 겁을 먹고 숨은 거라는 거지.”
“그건 맞아요.”
“들키면 죽는 숨바꼭질이니 꼭꼭 숨을 수밖에 없지. 그 얘기는 저들 중 우리의 적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지.”
“그래도 찾아야 진도를 나가죠.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는 없잖아요.”
“일단 흩어져서 찾아보자. 내가 중앙을 맡을 테니 나머지 네 명은 동서남북을 각각 맡아서 수색하도록. 실시.”
“실시!”
그들은 초아를 중심으로 재빨리 자리에서 흩어졌다.
초아는 이를 악물었다.
이번 임무는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그래야 자신의 체면을 세울 수 있었다.
청운사신이니 적룡대협이니 하는 신진 영웅들은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렸다.
청운사신이나 적룡대협은 다른 선원이 맡았으니, 초아는 백룡의 잔당만 처리하면 되었다.
그런데 왠지 모를 이 불길함은 무엇일까?
그 불길함은 이곳 화련산에 들어오면서부터 느꼈다.
이번 임무는 닭 모가지를 비트는 것과도 같았다.
닭 모가지를 비틀면서 긴장한다는 것은 이상했다.
묘하게 등골을 스쳐 지나가는 불길한 감정은 대체 무엇일까?
팔팔 끓는 가마솥에 넣으면 어쨌든 국물은 우러난다.
그 맛을 걱정하는 것은 닭 모가지를 비튼 후였다.
그런데 닭 모가지를 비틀기도 전에 이런 묘한 기분이 드는 게 이상했다.
* * *
초아의 명을 받고 서쪽을 샅샅이 뒤지는 토끼 가면의 허리에는 청색 띠가 묶여 있었다.
매듭은 하나.
백경의 일반 선원을 나타내는 표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