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8. 예상 가능한 변고 (3)
적색 안개가 걷히자 문도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신호를 보냈지만, 남은 이들은 그들을 구하러 오지 않았다.
우거진 갈대만이 그들의 몸을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이곳에서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은 문도희와 적혈문주밖에 없었다.
숨을 몰아쉬던 적혈문주가 눈을 크게 떴다.
“미독! 지금 저 소리는 대체 뭐요?”
“무슨 소리가 들리신다고…….”
문도희가 말끝을 흐렸다.
서-걱!
등골이 서늘할 정도의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기 때문이다.
분명히 검을 쓰는 소리였다.
불길한 것은 그 소리에 뒤에 혈향이 바로 따라왔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잠시, 갈대 위로 흐릿한 신형이 나타났다.
사-삭.
이형환위를 펼친 것처럼 다섯 명의 무사가 등장하자 문도희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삼독문의 독공 고수.
독문의 고수라는 위치는 일반 문파보다 강호의 못 볼 꼴을 더 많이 봤다는 말이었다.
어찌 보면 강호의 더러운 꼴을 보고도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이 독문이었다.
독과 관련된 문파는 음지에서 주로 활동하는 곳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 문도희에게도 상대의 모습은 기묘했다.
적색 연기 때문인지 혈향 때문인지, 그들의 몸에서는 자연스러운 살기가 피어올랐다.
억지로 피워 내는 것이 아닌 몸에 밴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추상적인 살기가 아니라 눈에 붉은 기운이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문도희가 더욱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그들이 쓴 토끼 가면 때문이었다.
살기를 풍기고 있지만, 얼굴에는 귀여워 보이는 토끼 가면을 눌러쓰고 있었다.
강호에서의 경험이 제법 되는 그녀조차 저런 이상한 가면을 쓰고 다닌다는 조직은 들어 본 적은 없었다.
더 황당한 것은 그들은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갈대 위에서 초상비(草上飛)의 수법으로 갈대숲 전체를 관찰하고 있었다.
초상비는 말처럼 풀 위를 날듯이 걷는 수법이다.
경공술과 공간 장악 능력이 조화를 이루어야 펼칠 수 있는 초식.
그들은 내공도 소모하지 않는 듯 보였다.
갈대가 휘청이면 그들의 몸도 갈대와 하나가 된 듯 좌우로 흔들렸다.
주변을 둘러보던 토끼 가면을 쓴 무사 중 하나가 움직였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토끼 가면이 천천히 갈대 위를 걸어가며 검을 털어 냈다.
착!
순간 검붉은 피가 수풀 위에 가볍게 흩날렸다.
그것이 피가 아니라 이슬이었다면 아마도 저들을 신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토끼 가면의 무사는 걸어오면서 누군가의 목을 베어 냈다.
같은 동료인지 금지 속의 동물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갈대 사이로 가공할 만한 무위를 뽐내며 걸어오는 토끼 가면의 무리에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서-걱.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순간 문도희는 눈을 감았다.
현재 상태로는 목을 내놓는 수밖에 없었다.
남은 힘을 짜내 후퇴하기도 늦은 상태였다.
처음에 진혈독이라고 진단을 내렸지만, 아무래도 그녀의 판단이 잘못된 것 같았다.
묘하게 진혈독과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독이었다.
이미 혈독은 그녀의 몸을 잠식했다.
독에 대해서 조금 잘 안다고 깝죽거렸던 자신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이건 그녀의 진심이었다.
백독문의 문이 닫혔을 때부터 조금 더 조심하는 것이 맞았다.
그렇다고 그녀는 장자명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독공을 겨루지 않았어도 어느 경로로든지 함정에 빠졌을 테니까!
본래 독인의 삶이 그렇지 않은가?
한 줌 핏물로 녹아내릴 각오 정도는 강호에 나온 독인이라면 누구든지 하는 다짐이었다.
문도희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풉.”
“뭘 그렇게 웃으십니까?”
“내가 웃는 데 뭐 보태 준 거라도…….”
문도희는 말끝을 흐렸다.
적혈문주가 비꼰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들어 보니 목소리의 주인공이 달랐다.
문도희는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허여멀건 얼굴의 부잣집 도련님이 활짝 웃고 있었다.
세상의 희로애락과는 관계가 없다는 듯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대체 누구…….”
“쉿, 그건 비밀입니다.”
“비밀이라니, 그게 무슨 말…….”
픽!
문도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상대가 그녀의 마혈을 제압했기 때문이다.
그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독 기운이 퍼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
문도희는 입을 벌린 후 멀뚱거리며 상대를 바라봤다.
상대는 벌써 자신에게 시선을 떼고 다른 이를 살피고 있었다.
사삭!
그사이에 갈대밭을 누비는 토끼 가면 일행은 점점 가까워졌다.
대충 보니 의술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저렇게 대책 없이 중독된 독인들을 만졌다가는 토끼 가면의 손에 죽는 게 아니라 핏물로 녹아내릴 수도 있었다.
그들이 중독된 혈독은 그만큼 독한 것이었다.
의술은 알아도 독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장자명이 데려온 정파인들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정파인이 독인을 위해 목숨을 내놓다니!
문도희는 이제까지 강호의 경험 중 가장 색다른 체험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죽음을 앞둔 그녀에게 주는 천지신명의 선물일지도 몰랐다.
문도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였다.
문도희는 몸이 끌리는 느낌이 들었다.
사사-삭.
뒤쪽으로 가 보니 중독된 독인들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가만 보니 몸을 주체 못 하고 널브러져 있던 독인들도 보인다.
모두가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문도희의 맞은편에는 적혈문주가 앉아 있었다.
그때 흰색 무복의 소녀가 그의 뒤쪽에 나타났다.
적혈문주의 뒤쪽에 나타난 소녀는 장침을 적혈문주의 정수리에 박아 넣었다.
푹!
그러고는 눈을 감고 침을 놓은 부위에 집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소녀가 침을 뺐다.
동시에 적혈문주가 토혈을 해 댔다.
쿨럭!
시커먼 피가 그의 입술을 타고 바닥에 흘러내렸다.
바닥에 흩어진 갈대 위에 피가 닿자 잎이 그대로 녹아내린다.
치지직.
문도희는 그제야 그들이 독인들을 치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소녀가 힐끔 옆쪽 눈치를 봤다.
소녀가 바라보는 곳에는 아까 봤던 부잣집 도련님처럼 생긴 젊은이가 빙긋 웃고 있었다.
“잘했다, 이제 제법 늘었구나.”
“공자님, 침을 꼭 써야 해요?”
뒷말은 작게 속삭였기에 다른 이들은 들을 수 없었다.
그 모습에 얼굴 하얀 공자가 말했다.
“독술이 아닌 의술이잖니.”
“아.”
소녀가 입을 벌리며 돌아섰다.
이제 하나 남은 여자 고수를 치료해야 할 때였다.
소녀는 조용히 그녀의 백회혈에 침을 꽂았다.
그 침에 문도희가 벼락을 맞은 것처럼 부르르 떨었다.
그것도 잠시, 문도희는 온몸의 불순한 기운이 정수리를 통해 빠져나가는 느낌에 눈을 크게 떴다.
이 느낌은 분명히 해독되는 과정이었다.
그것도 말도 안 될 만큼 빠른 속도였다.
백회혈에 박힌 장침은 그녀의 몸에 있는 혈독을 모두 뽑아내고 있었다.
문도희에게 이건 환골탈태와도 같은 경험이었다.
바로 이렇게 독이 제거되는 것은 문도희도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했다.
독이 만약에 암기라면 가능할 수 있었다.
몸에 박힌 암기는 뽑으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독이 몸의 어느 곳에 있는지 정확히 말할 수 있을까?
정확히 안다고 해도 그것을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을까?
해약이란 독을 중화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이지, 완벽하게 무(無)의 상태로 돌려놓지는 못한다.
그런데 소녀의 치료는 독을 완벽하게 무의 상태로 돌려놓고 있었다.
쿨럭.
문도희가 피를 토해 냈다.
혈독 때문에 굳었던 핏덩이가 나온 것이다.
문도희는 멍하니 상대를 바라봤다.
소녀는 빙긋 웃고 있었다.
그 뒤에서 얼굴 하얀 공자가 앞으로 나와 말을 이었다.
“대협이 당한 혈독은 백 년 전에 사라진 진혈독과는 조금 다릅니다. 아마도 천독이라는 자가 쓰던 독이 더 비슷할 겁니다. 다들 위기는 넘겼으니 조심해서 금지를 빠져나가십시오.”
“천독이라니…….”
문도희는 말끝을 흐렸다.
독인들 사이에 알음알음 퍼진 이야기 중에 천독이란 자의 행적이 있었다.
얼굴을 맞닥뜨린 자는 누구든 한 줌의 핏물로 녹여 버린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런 자가 진짜 존재했다니!
문도희가 물었다.
“지금 쫓아온 자들이 천독의 무리입니까?”
그녀의 말투는 정중했다.
독인이든 의원이든 상대가 자신의 아랫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는 한빈이었다.
그때 소녀가 손을 내저었다.
“천독이란 자는 죽었어요. 그러니 안심하셔도 돼요.”
“안심할 일은 아니지 않으냐? 청화야.”
“그래도…….”
청화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슬쩍 돌렸다.
사실 청화는 치료하며 한 가지 연기를 펼쳤다.
그것은 바로 독인들에게 침을 놓는 과정이었다.
한빈의 말대로 그들이 당한 독은 천독의 것이었다.
물론 공독지체를 이룬 청화는 아무렇지 않게 독을 제거할 수 있었다.
모두의 혈독을 제거하고 나니 숨이 차기는 했지만, 그래도 손을 대 상대의 독을 흡수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한빈은 그들의 몸에 가장 고통스러운 침을 놓으라고 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공동지체에 대한 능력은 독인들에게 숨기는 게 맞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힘들게 치료했다고 상대가 느껴야 차후에 받아 낼 보상도 넉넉하다는 것이 한빈의 주장이었다.
치료를 끝낸 청화가 뭔가 기억났는지 기침을 했다.
쿨럭.
청화는 입 안에 고인 선혈을 쏟아 냈다.
물론 청화의 피는 아니었다.
이 정도는 해 줘야 그들도 감복할 것이었다.
청화는 뜨거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독인들의 시선에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그녀의 옆에서 다른 소녀 하나가 검을 뽑았다.
그 소녀는 설화였다.
눈이 시릴 정도의 예기를 뿜어내는 조그만 단검.
그 기세만 보면 단검이 아닌 장검처럼 보일 정도였다.
설화가 뽑은 것은 우혈랑검이었다.
“준비됐어요, 공자님.”
“그래, 가자꾸나. 참, 청화는 이 사람들 잘 보살피고. 만약에 지킬 수 없다면…….”
“알았어요.”
청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킬 수 없다면 포기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라는 건 한빈에게 배운 교훈이었다.
청화의 어깨를 토닥인 한빈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사-삭.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진 그들의 모습에, 문도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저는 당청화예요.”
“혹시 사천당가…….”
“네, 맞아요. 아까 잠깐 인사드렸었죠. 장 의원과 같이 온 일행이에요.”
“사천당가라니……. 구명지은에 감사드립니다.”
문도희가 휘청이면서도 주먹을 모으자, 청화가 손을 저었다.
“과한 예는 받지 말라고 우리 공자님이 그러셨어요.”
“공자님이라면…….”
문도희는 고개를 돌려 방금 사라진 공자가 있던 곳을 살폈다.
그녀는 일련의 모든 대처가 청화가 사천당가라고 밝히면서 이해되었다.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청화의 의술이나 독공을 봐서는 사천당가에서도 결코 아래에 있는 자가 아니었다.
굳이 말하면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독술과 의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도희의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사천당가의 직계에,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인물일 터.
그런 독인이 말끝마다 공자님, 공자님 하니, 문도희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