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7. 예상 가능한 변고 (2)
문도희의 말에 적혈문주가 가부좌를 튼 채 이를 부득 갈았다.
“우리가 가지고 왔다면 내가 이러고 있겠소?”
“그래도 이상하잖아요, 적혈문주.”
“뭐가 이상하단 말이오?”
“적사파의 문주가 마지막으로 복용한 것이 적혈문의 독이잖아요. 그럼 당연히…….”
“그 독이 진혈독이면 내가 이러고 있겠냔 말이오!”
말을 마친 적혈문주는 거칠게 헛숨을 토해 냈다.
쿨럭!
그의 입가에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자 문도희가 손을 내저었다.
“믿을게요. 일단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먼접니다.”
“벗어난다 해도 혈독을 제거할 약제가 없잖소!”
“혈독에 대한 해약은 없지요. 대신 모든 문파들의 약제를 모아 보면 혈독이 퍼지는 걸 막을 약제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흠, 대체 누가 이런 일을 꾸몄던 말이오? 혹시 남겨진 자들 중에…….”
“남겨진 자들이라면? 백독문의 장 소협 말인가요?”
“그자와 정파의 인물들 말이오. 뭔가 수상하지 않소?”
“흠, 장자명은 제가 오래 봐 왔지만, 그럴 아이는 아니에요.”
“그 아이는 원하지 않았어도……. 정파의 사악한 혓바닥에 놀아났다면?”
“그것도 가능성은 작아요. 정파가 독문 전체랑 척을 지려 할 리가 없죠.”
“아까 최고의 독인이 백독지회 동안 왕 노릇을 하기로 한 거 말이오. 그자들의 생각 아니오?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다 들었소이다.”
“흠.”
문도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적혈문주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을 엿듣고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은 문도희 자신이었다.
자신이 장단을 맞춰 주지 않았다면?
승부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정파의 인물들이 이런 함정을 팠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문도희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누가 그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죠. 어떻게 살아남느냐가 중요하죠.”
“일단 진혈독부터 차단하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러려면…….”
“밖에 두고 온 약초가 필요합니다. 일단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신호부터 보내죠.”
문도희도 눈짓했다.
진혈독에 대한 첫 번째 대처 방법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우선이었다.
움직이면 신체의 일부가 썩어들어 가니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이 자리에서 늑대 밥이 될 것은 뻔한 일.
지금 그들이 가부좌를 틀고 있는 곳은 갈대가 머리끝까지 솟아오른 갈대밭이었다.
이곳에 그냥 앉아만 있으면 누군가 발견하기도 힘들었다.
여기에서 살아 나갈 방법은 외부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유일했다.
문도희의 뜻을 알아챈 적혈문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정파인들 말인가?”
“그들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 신호탄을 쓰시지요, 적혈문주님.”
“신호탄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그 지팡이에 있는 독탄 말이에요.”
“독탄이라…….”
“왜 모른 척하세요. 지금이야말로 그걸 쓸 때예요.”
“이 독탄을 쓰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적혈문주는 자신의 지팡이를 바라봤다.
푸른빛이 감도는 해골 모양의 장신구가 달려 있는 지팡이었다.
적혈문주는 이를 악물었다.
이것은 문주의 표식이면서 동시에 구명줄이었다.
지팡이에 달린 장식을 발동시키는 순간, 주변에 독연이 피어난다.
본래에는 탈출 용도로 숨겨 놓은 비장의 한 수였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게 아니라 꼬리를 감추고 숨기 위해 숨겨 놓은 독탄이었다.
이걸 여기서 터뜨리면 외부에서 한눈에 알아볼 것이다.
또다른 문제는 독탄이 단순한 연막탄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치명적인 독은 아니지만, 피부에 수포를 발생시키며 가려움증을 유발하는 독이었다.
탈출용 독탄이기에 별도로 해독제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한 번 맞으면 하루 동안 몸의 곳곳을 벅벅 긁어 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진혈독과 적혈문의 독탄이 섞이면?
진혈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적혈문주도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밖에 있는 자들이 이 신호를 보고 적당한 약제를 들고 올 수 있냐는 점이었다.
이곳에 섣불리 왔다가 중독이라도 된다면?
적혈문주가 고민하자 문도희가 말을 이었다.
“진혈독보다 더 강한 독이 있나요? 그리고 지금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밖에 알리는 게 맞아요. 우리가 죽더라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해야죠.”
“좋소.”
적혈문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운기조식을 멈추고 자신의 지팡이를 잡았다.
그러고는 앉은 상태에서 그 지팡이를 반으로 부러뜨렸다.
딱.
그는 반 토막 난 지팡이를 곧게 들었다.
문도희는 부러진 지팡이의 사이로 심지가 타들어 가는 것을 보았다.
문도희도 적혈문주의 신물에 대해서 소문으로만 들었지, 이렇게 사용하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타들어 가던 심지가 갑자기 소음을 냈다.
피슝!
지팡이에서 해골 모양의 장신구가 허공으로 쏘아졌다.
갈대숲 위로 솟은 해골 장신구가 이전보다 더 큰 소음을 내며 터졌다.
파앙!
동시에 붉은색 연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 * *
팡!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올라온 붉은색 연기에, 장자명이 눈을 크게 떴다.
누가 보냈는지는 몰라도 조금 전 이곳을 떠난 독인들에게 변고가 일어났음이 분명했다.
“쓰읍.”
장자명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뒤쪽을 보니 적혈맹호대로 분장하고 있는 사매도 살짝 어깨를 떨고 있었다.
사매의 납치도 백독문의 입장에서는 경천동지할 변고였다.
그런데 천하 독인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이건 생존의 문제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현문은 침착하게 팔짱을 끼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적혈맹호대도 제자리를 지키며 경계하고 있다.
가장 안절부절못하는 이들은 의외로 남아 있는 독인들이었다.
독인들의 제자 중 독공의 수행이 낮은 몇몇은 이곳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으로 뛰어가려다가 멈칫하기를 반복했다.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
장자명은 이곳의 최고 책임자는 자신임을 깨달았다.
최소한 독인 중에서는 말이다.
사 공자도 서찰에 이곳을 장악하라고 부탁하지 않았던가?
아마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알고 보낸 서찰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장자명은 모두를 향해 외쳤다.
“모두 멈추시오! 지금 즉시 각 문파에서 가지고 온 약제를 정리하시오. 약제는 해독제에 쓰이는 재료부터 챙기시오. 그리고 남은 독문들은 약재를 가지고 이쪽으로…….”
장자명은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몇몇은 짐을 들고 장자명의 앞으로 걸어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은 독인들은 당황한 목소리로 웅성대기 시작했다.
“해약에 쓸 재료가 없어졌다!”
“헉, 우리도 없어졌어.”
“대체 누가…….”
“이상하네그려. 여기 미송파의 독인이 안 보이는데…….”
“잠시만, 미송파의 독인들은 하나도 안 보인다고?”
“그럼…….”
“함정이다!”
“함정이면 일단 자리를 떠야 하는 게 맞잖아.”
“문주님은 어떻게 하고?”
“어르신들도 구조 요청을 보낸 걸 텐데 우리가 어떻게 해!”
남은 독인들의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장자명은 일단 그들에게 걸어갔다.
터벅터벅.
주먹을 불끈 쥔 장자명은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외쳤다.
“영웅은 아니지만……!”
그는 뒷말을 삼켰다.
지금의 상황을 수습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장자명은 그들에게 다가가 손을 들었다.
“모두 진정하시오!”
하지만 장자명의 말을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장자명은 그들이 한심했다.
적이 원하는 모양이 있다면 딱 지금과 같은 상황일 것이다.
물론 이들을 수습 못 하는 자신도 한심했다.
제법 많은 경험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린 독인들 하나 단속 못 하다니!
그때였다.
장자명의 뒤쪽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흠.”
갑작스러운 기척에 장자명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노고수가 푸른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서 있었다.
사실 그의 등장에 다른 독인들도 놀랐다.
그가 장자명의 뒤에 나타나기까지 그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자명의 앞에 있던 젊은 독인 중 하나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저분은 뉘신가?”
“저분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장자명은 살짝 말끝을 흐렸다.
푸른 도포를 펄럭이는 것을 보면 누군가로 변장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수염 뒤에 있는 인물이 누군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는 바로 팽혁빈이었다.
대체 누구로 변장한 것일까?
누군가로 변장했다는 건 그 누군가로 인식되길 원한다는 것.
장자명은 그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때 푸른 도포의 노고수가 답답하다는 듯 한 발 나오며 말했다.
“나는 청운사신이라 하오.”
순간 젊은 독인이 눈을 크게 떴다.
“처, 청운사신이라면……. 하남정가에서 가문의 기둥뿌리를 뽑았으며 고생하는 민생을 위해 무인의 도리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버렸다는 진정한 영웅이 아닙니까?”
“뭐, 그런 일이라면…….”
청운사신으로 분장한 팽혁빈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팽혁빈이 청운사신으로 변장한 것은 한빈의 부탁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청운사신이 갑자기 여기 나타난다는 것도 이상했다.
푸른 도포로 바꿔 입고 수염 하나 달았다고 상대가 믿어 줄까?
이 모든 의문이 무색해질 정도로 독인들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인들은 사파의 영웅인 적혈대협보다도 정파의 영웅인 청운사신을 더욱 신뢰했다.
그것은 청운사신의 행보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청운사신이 민생을 구했다는 것은 위씨세가의 식량을 털어서 굶주린 백성들을 도와준 것을 뜻한다.
정파의 인물이 어찌 십대세가의 주머니를 털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청운사신에게 정파는 그저 허울에 불과했다.
거기에 하남정가에서의 활약 또한 정파의 인물이 벌인 짓치고는 너무 잔인하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독인들의 입맛을 자극했다.
그때 적혈문의 어린 제자 하나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양 갈래 머리를 질끈 묶은 여자아이였다.
질끈 묶은 머리만큼이나 입을 굳게 닫고 있었던 여자아이는 팽혁빈의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는 그의 소매를 잡았다.
“구해 주세요, 대협.”
그 말이 시작이었다.
모든 독인들이 팽혁빈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털썩, 털썩.
뒤쪽에서 그들을 보던 장자명은 눈을 크게 떴다.
모든 것이 한빈의 뜻대로 되어 가고 있었다.
이 무리를 왜 장악하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남은 독인들을 장악하는 것에는 성공했다.
그때 누군가 장자명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적혈맹호대 대원 중 하나였다.
정확히는 적혈맹호대의 대원으로 변장한 그의 사매였다.
그녀가 입 모양으로 물었다.
“괘, 괜찮을까요?”
“당분간은 괜찮을 테니……. 신분을 숨기는 데 주력하시오, 사매.”
말은 근엄하게 했지만, 장자명은 가슴이 뛰고 있었다.
그의 사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자명은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사라진 한빈은 아직 그림자조차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설화와 청화도 마찬가지였다.
소군만이 남은 보따리를 소중하게 지키고 있었다.
“대체 어디 간 걸까?”
장자명은 한빈이 이렇게 절실하게 보고 싶은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