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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95화 (58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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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자명이 아무리 둘러봤지만, 한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 누군가 장자명의 앞으로 걸어왔다.

    선이 세 줄 그어진 흰색 무복을 입은 여인이었다.

    그녀를 보자 장자명이 재빨리 포권했다.

    “삼독문의 미독, 문도희 대협을 뵙습니다.”

    “호호, 대협은 무슨 대협? 그냥 누나라고 하라니까. 안 본 지 한 오 년 정도 되었던가? 그사이에 많이 컸네.”

    “흠, 엄연히 배분이 있는데 그러면 안 되죠.”

    장자명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상대는 이곳에 모인 독인 중 독술이 뛰어난 다섯 명 중 하나였다.

    사실 삼독문이라는 문파는 사천당가와 백독문 다음가는 독문이었다.

    그중에서도 문도희는 가장 출중하다는 독인.

    어릴 때 문주 몰래 술을 훔쳐 먹다가 걸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술이 아니었다.

    한 방울만 먹어도 오장육부가 그대로 녹아내린다는 칠장산을 열두 살 소녀가 아무렇지 않게 먹은 것이다.

    물론 삼독문은 발칵 뒤집혔다.

    아까운 인재 하나가 그대로 세상을 뜰 상황이었다.

    일반인이 아니기에 발작이 늦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문도희는 멀쩡했다.

    한 달이 지나도 멀쩡하자, 삼독문은 그녀를 만독불침의 체질이라고 판단했다.

    사람들은 열두 살에 칠장산을 먹은 다음 성격이 괴팍해졌다고 하지만, 장자명의 생각은 달랐다.

    열두 살 소녀가 문주가 숨겨 놓은 술을 훔쳐 먹었다는 자체가 떡잎부터 글러 먹었다고 확신했다.

    그도 그럴 것이 스무 살이나 많은 여인이 자꾸 동생, 동생 하면서 친한 척하는 게, 장자명은 몹시 불쾌했다.

    그런데 대놓고 뭐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한번 찍히면 상대가 피똥 싸는 것을 봐야 돌아선다는 것이 미독 문도희였다.

    여기서 미독(味毒)이란 항상 독을 즐기기에 쓰는 별호였다.

    문도희가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누나한테 겁먹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

    “제가 언제 겁을 먹었다고 그러십니까? 문도희 대협.”

    “그래그래. 그나저나 백독지회에 참석해서 노숙해 보기는 처음이네.”

    “문주님이 손님을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다고요?”

    “그래. 우리는 백독지회에 맞춰서 정확히 도착했는데 문을 안 열어 주는 거야. 딸랑 쪽지 하나 남기고 말이야.”

    “쪽지 좀 볼 수 있을까요?”

    “쪽지를 왜 보여 달라는 거야? 직접 들어가서 물어보면 되잖아.”

    “제가 사정이 있어서요.”

    “꼭 백독문에 오랜만에 오는 사람 같네. 진짜 안쪽 사정을 모르는 거야?”

    문도희가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귀밑머리를 돌돌 만다.

    장자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 맞아요. 한 삼 년 만이니…….”

    “짧은 시간에 성취를 이뤘구나. 축하해.”

    “성취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백독문은 성취가 없으면 강호로 나가지 못하는 거로 아는데.”

    문도희가 장자명을 바라봤다.

    그녀의 말대로 백독문의 규율은 엄해서 일정한 단계의 성취를 이루지 못하면 강호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런데 장자명은 그 규율을 어기고 사문에서 나온 것.

    장자명은 힐끔 주변의 눈치를 봤다.

    문도희의 목소리가 컸는지 다른 독인들도 모여들었다.

    장자명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게…….”

    “혹시 가출한 거야? 뭐, 외출이나 가출이나 한 자 차이지. 그러고 보니 성취가 있는 게 맞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규율을 깰 수 있다는 게 성취가 아니고 뭐겠어? 낡은 것을 깨야 새로운 게 나오는 법이지.”

    문도희는 장자명의 어깨를 탁탁 쳤다.

    그러고는 조용히 쪽지를 건넸다.

    쪽지를 건네받은 장자명이 내용을 확인했다.

    내용은 문도희가 말한 대로였다.

    이곳에 모인 독인들에게 미안함과 함께 잠시 기다려 달라는 뜻을 전했다.

    합당한 이유도 있었다.

    행사를 준비하면서 중요한 독충을 넣어 놓은 항아리가 깨졌다고 했다.

    그 독충을 모두 수거한 후 손님을 받을 거라고 했다.

    독충의 종류에 대해서는 적지 않았지만, 다른 독인들은 모두 수긍하는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잘못해서 독충이 밖으로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손님이 그 독충에 해를 입기라도 하면 백독지회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된다.

    독인의 사정은 독인이 가장 잘 안다고, 백독문이 합당한 이유를 대자 성격이 괴팍한 독인들도 여기에서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있었다.

    “이상하네요. 저희 사부님이 백독지회를 앞두고 이런 실수를 하실 분이 아닙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이 쪽지는 내가 대표로 받은 것이 아니야. 모든 문파에 개별로 뜻을 전달한 걸 보면, 시간은 넉넉했다는 거니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알겠습니다, 대협.”

    장자명은 그녀에게 고개 숙이고 뒤돌아섰다.

    알아볼 건 다 알아봤고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문제였다.

    그 지시를 내릴 사람은 당연히 한빈이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한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조금 전까지 있던 팽혁빈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이쯤 되자 장자명은 더욱 불안해졌다.

    어찌 보면 여기에서 돌아가는 것이 맞을 수도 있었다.

    사매를 구해 냈다지만, 그건 밝히지 말라고 했다.

    그렇다면 백독문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돌 맞은 개구리처럼 뻗을 수도 있었다.

    사부의 독은 그만큼 무서웠다.

    그리고 그는 문파의 규율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정들을 한빈에게 몇 번씩 털어놨다.

    그때마다 한빈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어라?

    장자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한빈과 팽혁빈뿐 아니라 이제는 설화와 청화 그리고 소군까지 보이지 않았다.

    다들 어디로 간 것일까?

    이쯤 되니 장자명은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했다.

    장자명이 불편한 것은 안 보이는 이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독인들의 시선도 장자명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어떤 독인들은 장자명을 배신자 보듯 쏘아보고 있었다.

    장자명도 이 부분은 이해할 수 있었다.

    백독지회에 외부인을 데려왔으니 곱게 볼 리는 없었다.

    문도희와 대화를 나눈 직후에도 대다수의 독인들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독인들에게 정파인들은 이방인이었다.

    아마도 무당의 현문이 이 자리에 없었었다면, 쫓겨났을 것이 분명했다.

    독인들의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가 따갑게 느껴질 때였다.

    팽혁빈이 어디선가 걸어왔다.

    장자명은 반가움에 재빨리 달려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대공자, 잘 오셨습니다.”

    “안색이 왜 그럽니까? 장 의원.”

    “마음이 불편해서 그럽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그러지 않아도 아우가 이걸 부탁하고 갔습니다, 장 의원.”

    그는 오른손에 서찰 하나를 들고 있었다.

    장자명이 고개를 갸웃하며 팽혁빈의 오른손에 들린 서찰을 바라봤다.

    “그게 팽 공자의 계획이 담긴 서찰입니까?”

    “맞습니다.”

    “제가 봐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봐도 됩니다. 내 아우가 이 서찰은 장 의원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마시고 확인하시지요.”

    팽혁빈이 서찰을 건네자 장자명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미미한 웃음이 장자명의 입가에 맴돌았다.

    그것도 잠시, 장자명의 표정이 어둡게 변해 갔다.

    장자명은 고개를 돌려 독인들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다시 서찰을 확인했다.

    몇 번이고 같은 동작을 확인하던 장자명은 마지막에는 울상이 되었다.

    “이건 제가 할 수 있는 임무가 아닌 것 같습니다, 대 공자.”

    “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그렇게 당황하십니까? 장 의원.”

    “직접 보시죠. 저보고 저 독인들을 통솔해서 하나를 만들라니 그게 말이 됩니까? 귀신이 와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장자명은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아직도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독인들이 있었다.

    사실 여기에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사매가 납치당한 일을 털어놓고 위기를 알려서 저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다.

    그런데 서찰에는 절대 사매의 귀환을 밝히지 말라고 쓰여 있었다.

    그럼 저 독인들을 언변으로 회유하든지 힘으로 누르라는 것인데…….

    그때 팽혁빈이 물었다.

    “불가능하십니까? 제 아우가 장 의원에게 부탁한 것을 보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제가 사 공자 밑에서 구르면서 많이 배우긴 했어도 저 노독괴들을 누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도끼눈을 뜨고 저를 보는데 제 말이 먹히겠습니까? 휴.”

    장자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지시였다.

    저들을 회유하거나 힘으로 누를 능력이 있다면 애초에 사부에게 맞아 죽을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장자명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그때 장자명의 뒤쪽에서 하얀색 신형이 나타났다.

    하얀 옷깃만 보고 장자명이 반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순간 장자명이 놀라 뒤로 물러났다.

    “헉.”

    “아니, 조금 전에도 봤는데 왜 그렇게 놀라?”

    문도희가 팔짱을 끼고 묻자 장자명이 솔직하게 답했다.

    “저는 팽 공자의 시녀, 설화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대협이 거긴 왜?”

    “이 자리를 전세 낸 거야? 내가 여기에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거기 계속 서 있으십시오, 대협.”

    “왜 또 삐지고 그래? 뒤에서 살짝 들었는데, 저 친구들을 휘어잡아야 한다면서? 그러고 보면 자명이는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것 같아.”

    문도희가 피식 웃으며 장자명과 팽혁빈을 번갈아 바라봤다.

    말은 장자명에게 했지만, 머리가 안 돌아간다는 범위에는 팽혁빈도 있다는 뜻이었다.

    팽혁빈은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며 장자명에게 눈짓했다.

    팽혁빈이 봤을 때 문도희라는 여인은 독인들을 휘어잡을 방법이 있는 것 같았다.

    대충 이곳에 모인 자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독인이라고 들은 것 같았기에 기대감은 더욱 컸다.

    팽혁빈의 시선을 받은 장자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문도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협,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누나라고 불러.”

    “네?”

    “누나라고 부르면 가르쳐 줄게.”

    “…….”

    장자명은 잠시 말문을 잃었다.

    뭔가 중요한 일에 하찮은 요구를 하니 장난처럼 느껴졌다.

    문도희가 장자명의 속마음을 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장난 같아? 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 싫으면 말고.”

    “자, 잠시만요……. 누나,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호호, 그렇게 나와야지. 잠시만 기다려 봐.”

    문도희가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독인들이 모인 장소로 걸어갔다.

    그녀의 모습에 장자명과 팽혁빈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래도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닌 듯 보였다.

    그때였다.

    문도희가 있는 자리에서 상상도 못 할 커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중원의 독인 여러분! 나 미독 문도희가 한 가지 제안할 게 있어요!”

    마치 사자후의 수법으로 외치는 것만 같았다.

    제각기 볼일을 보던 독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모두의 시선을 모은 문도희가 다시 외쳤다.

    “문이 열리려면 아직 시간도 많이 남은 것 같은데. 재미있는 놀이를 하나 하는 게 어떻겠어요?”

    문도희의 외침에 바로 반응이 튀어나왔다.

    “어떤 놀이요? 문 소저.”

    “놀이 중에 가장 재미있는 건 바로 싸움 아니겠어요? 구경하는 사람도 그렇고 참가하는 사람도 그렇고…….”

    “싸움이라?”

    “우리 독인들도 다른 강호인처럼 비무 한번 해 보죠.”

    “흠, 조건은?”

    “승자는 백독지회 동안 이곳의 왕이 되는 겁니다. 그럼 당연히 나머지는 신하가 되겠죠.”

    “오호, 나는 좋소. 문 소저는 항상 호탕하구려.”

    “이건 제 생각이 아니에요.”

    피식 웃은 문도희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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