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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91화 (577/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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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오후.

    화련산 깊숙이 들어간 한빈의 일행.

    앞서 가던 심미호가 손을 들었다.

    “모두 멈추세요.”

    신호를 보낸 심미호는 재빨리 한빈의 앞으로 왔다.

    심미호는 장자명과 함께였다.

    백독문이 있는 백독곡의 길은 미로와도 같아서 장자명의 안내가 필수적이었다.

    심미호와 장자명을 보니 서로 난처한 듯 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심미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길이 끊어진 것 같아요, 주군.”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세 갈래 길이 있었다.

    뒤쪽에 있던 다른 이들은 심미호의 말에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세 갈래의 길 중 어떤 곳으로 갈 것이냐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길이 끊어졌다니?

    누구도 심미호의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세 갈래의 길 모두 막힌 길이라는 거지?”

    “네, 맞아요.”

    “대체 어떤 조짐을 본 거지? 심 부대주.”

    “조짐이라기보다는 너무 조용해요. 보통 이 정도 들어왔으면 산짐승이나 풀벌레 소리 정도는 들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세 갈래 길의 입구는 너무 조용해요.”

    “흠, 우리 심 부대주가 많이 발전했네.”

    “가장 중요한 건 장 의원님이 절 붙잡았어요. 그러니 뭔가 있겠죠.”

    그들의 대화에 팽혁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끼어들었다.

    “뭔가 있다는 건……. 앞에 적이 있다는 말 아닌가? 그렇다면 어서 준비를…….”

    “적은 맞는데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형님.”

    한빈이 답하자 팽혁빈이 고개를 기울였다.

    “사람이 아니라면?”

    “독일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아마 백독지회에 저희가 지각한 것 같습니다.”

    “지각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조금 자세히 말해 보아라.”

    팽혁빈이 목을 길게 빼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백독문이 주최하는 백독지회는 약속된 독인들이 다 도착하면 문을 잠근다고 들었습니다. 단, 정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 아닌 지역을 단절시키는 게 백독문의 방식입니다.”

    한빈이 옆을 힐끔 바라봤다.

    그곳에는 장자명이 있었다. 한빈의 눈빛은 마치 마저 설명하라는 것 같았다.

    이제는 장자명도 눈치 백 단이었다.

    시선을 받은 장자명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다른 문파에서 문을 닫는다는 것과 백독문이 문을 닫는 것은 조금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 주시겠소? 장 의원.”

    팽혁빈이 조심스럽게 장자명을 바라봤다.

    장자명이 어깨를 펴고 말을 이었다.

    “백독문은 진을 구성할 때 독으로 만듭니다. 흔히 독진이라고 하죠. 진법에는 생문과 사문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까지는 이해했소, 장 의원.”

    “여기서 백독문이 문을 닫는다는 것은, 생문을 막는 것을 뜻합니다. 생문을 막게 되면 안쪽에서도 바깥쪽에서도 외부 혹은 내부로 이동할 수 없습니다. 저 세 갈래의 길 중 하나만이 본래 생문인데 그마저도 닫아 놓은 것 같습니다.”

    “생문이라…….”

    “독물을 풀어서 출입을 차단하는 것이죠. 산중에 어찌 산짐승 소리가 들리지 않겠습니까? 모두 독물을 피해 도망간 것이겠죠.”

    “그럼 이 앞을 통과하지 못한다는 말이오? 장 의원.”

    “그건…….”

    장자명이 입술을 달싹이자 팽혁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표정을 보아하니 방법이 없다는 것 같구려.”

    “일단 저는 모릅니다.”

    “백독문 출신인 장의원이 모른다고 하면 대체 누가……. 흠.”

    팽혁빈이 헛기침하자 장자명이 반사적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사실 생문이 닫힐 위험성에 대해서는 한빈에게 얘기했었다.

    하지만 생문이 닫혀도 방법은 있다면서 아무렇지 않게 이곳으로 왔다.

    백독문 출신인 자신도 알지 못하는 방법을 한빈이 알고 있다고?

    한빈을 바라보던 장자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웃었다.

    장자명에게 웃음을 보인 한빈이 이번에는 팽혁빈을 바라봤다.

    “방법은 제가 알고 있습니다, 형님.”

    “네가 알고 있다고?”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한빈은 팔짱을 끼고 뒤쪽을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장삼과 조호가 거대한 관을 끌고 왔다.

    독각서우의 뿔이 들어 있는 그 관이었다.

    그 모습에 팽혁빈이 마른침을 삼켰다.

    무림인들도 두려워하는 특급 위험물이 바로 독각서우의 뿔이 아니던가.

    만약 저것이 터진다면 이곳은 남아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본래 독각서우가 있는 관은 행렬의 중간에 뒀다.

    하지만 그 위험성을 아는 팽혁빈은 그 관을 맨 뒤쪽에서 운반하도록 했다.

    장삼과 조호가 낑낑대며 관을 끌고 오자 심미호가 가슴을 탁탁 치며 달려갔다.

    “그러기에 평상시에 근력 운동 좀 하라고 그렇게 일렀거늘…….”

    심미호는 둘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고는 둘이 쥐고 있는 밧줄을 빼앗았다.

    심미호는 표정의 변화 없이 관을 끌고 한빈을 향해 걸어갔다.

    장삼과 조호가 끌 때는 천 근의 무게를 지닌 짐을 끄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심미호는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힘 하나 안 들이고 관을 옮겼다.

    뒷모습을 바라보던 조호가 한숨을 쉬었다.

    “휴. 부대주님이 장삼 아저씨한테 뭐라 하시잖아요. 그러게 평소에 근력 운동 좀 하시라니까.”

    “에이, 부대주님이 나보고 그런 거겠어? 너보고 그런 거지.”

    그때였다.

    앞쪽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둘 다한테 한 말이에요. 한가하게 있을 시간 있으면 기마 자세라도 취하세요.”

    심미호의 말에 장삼과 조호는 조용히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들에게 일침을 가한 심미호는 조심스럽게 관 뚜껑을 열었다.

    “준비됐어요, 주군.”

    “잠시만 기다려, 심 부대주.”

    심미호가 뒤쪽으로 한 발 물러서자 한빈은 관의 안쪽을 바라봤다.

    독각서우의 뿔이 담긴 상자를 옆으로 치운 한빈은 그곳에서 상자 몇 개를 꺼냈다.

    한빈은 먼저 꺼낸 상자를 열었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붉은색 구슬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옆으로 다가온 팽혁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다 무엇이더냐?”

    “피독주입니다, 형님.”

    “보석이 아니라 이게 피독주라는 말이더냐?”

    팽혁빈의 눈에 의문이 피어났다. 피독주는 독기를 막아 주는 구슬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피독주는 본 적이 없었다.

    피독주는 독을 몰아내는 기능을 넣는 과정에서 기괴한 색깔을 띠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피독주는 보석이 아니라 독환(毒環)과 비슷하게 생겼다.

    보석과 구분이 안 될 정도의 피독주.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한다는 피독주.

    팽혁빈이 알기로 그런 피독주는 딱 하나였다.

    그것은 바로…….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짐작하시는 피독주가 맞을 겁니다. 사천당가의 만독주를 생각한다면 말이죠.”

    “마, 만독주라고? 어찌 이 많은 양을…….”

    “청화 덕분이죠.”

    한빈이 청화를 가리켰다.

    한빈은 이번 임무를 위해서 사천당가에 남아 있는 만독주를 싸그리 털었다.

    대신에 만독주를 만들 재료를 사천당가에 넘겼다.

    어찌 보면 서로 기분 좋은 거래였다.

    돈 주고도 못 구하는 피독주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천당가는 만독주를 흔쾌히 한빈에게 넘겨줬다.

    피독주라는 것이 술처럼 오래 숙성될수록 좋은 것은 아니었다.

    피독주는 시간이 흐르면 기능이 점점 떨어지는 물건 중 하나였다.

    사천당가는 피독술이 외부에 유출될까 봐 만독주를 외부로 유출한 적이 없었다.

    사실 해독술보다 한 단계 더 중요시하는 것이 바로 피독술이었다.

    독을 당한 후 해독하는 것과 독을 당하기 전 피하는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누구나 후자를 선택할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사천당가의 피독술은 그들에게 특급 기밀이었다.

    그런데도 만독주를 한빈에게 준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것은 사천당가가 한빈을 식구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사정을 아는 장자명은 한빈이 만독주를 나누어 주는 동안 입을 벌리고 있었다.

    대충 상황을 알고 있지만, 하북팽가의 사 공자를 사천당가에서 가족으로 느끼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정을 아는 장자명이 놀라는 반면,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신기한 듯 만독주를 살폈다.

    한빈이 상자에 있는 만독주를 모두에게 건넸을 때였다.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동시에 만독주를 입 속에 넣었다.

    마치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말이다.

    만독주를 입에 문 이들에게 한빈은 피독의를 나누어 주었다.

    장운현에서 천독과 싸울 때 사용했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그들은 피독의를 걸치고 독을 막아 주는 천으로 입을 꽁꽁 둘렀다.

    누가 이들의 복장을 본다면 사막을 건너는 상인의 무리로 오해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적혈맹호대 대원들이 낮은 목소리로 상황을 보고했다.

    “준비 끝났습니다, 주군.”

    “준비 완료.”

    모두가 준비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한빈이 팽혁빈을 바라봤다.

    “이름은 만독주지만, 세상의 모든 독을 막아 주진 못합니다. 한마디로 약간의 과장이 섞여 있는 거죠. 그러니까 백독문의 내부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제가 심 부대주와 함께 앞장서겠습니다. 그러니 형님이 나머지 인원을 통솔해 주시죠.”

    “그러마.”

    “어떤 일이 있어도 대열을 이탈해서는 안 됩니다. 한 명이라도 이탈하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그냥 두고 가시면 됩니다.”

    “좋다, 뒤쪽에 대한 경계는 내게 맡겨라.”

    팽혁빈이 자신의 도를 가슴 높이로 올리며 눈을 빛냈다.

    한빈은 이번에는 장자명을 바라봤다.

    “이 정도면 되겠지요? 장 의원은 심 부대주의 뒤에 바싹 붙으십시오.”

    “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한빈이 앞을 바라보자 뒤쪽에 서 있던 청화가 다급하게 나왔다.

    “저는 같이 안 가요?”

    “너는 설화와 함께 적혈맹호대를 돌보거라.”

    “네, 알았어요. 그런데 뭐 잊으신 거 없으세요?”

    청화가 서운한 표정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마치 새벽밥을 거른 강아지와도 같은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잊은 거라니? 거기에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지?”

    “저는 안 주시냐고요? 공자님.”

    청화는 한빈이 손에 들고 있는 남은 만독주를 가리켰다.

    “흠.”

    헛기침한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공독지체인 청화에게 과연 천독주가 필요 있을까?

    한빈의 표정을 본 청화가 손을 내밀었다.

    “가지고만 있을게요. 저만 안 받으니까 조금 기분이 이상해서 그래요, 공자님.”

    “자, 여기 있다.”

    한빈이 피식 웃으며 만독주를 건넸다.

    천독에게 납치당해서 독인으로 길러지면서 청화는 감정이 거세된 상태로 세상에 나왔다.

    한빈이 구하고 나서도 감정이라는 걸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청화는 감정을 표현한다.

    소심한 질투 같은 깊이가 얕은 감정이지만, 한빈은 정상인으로 돌아가고 있는 청화가 대견스러웠다.

    청화가 콧노래를 부르며 뒤쪽으로 이동하자, 한빈이 한 걸음 앞으로 들어갔다.

    한빈은 힐끔 심미호를 바라봤다.

    “남은 시간은?”

    “해가 산등성이에 딱 걸쳐져 있는 것으로 봐서, 한 시진 정도 남아 있네요.”

    “갈 수 있을까? 심 부대주.”

    “충분해요.”

    “그럼 출발하자고, 심 부대주.”

    한빈이 세 갈래의 길 중 한 곳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휘적휘적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 모습에 뒤쪽에 있던 장자명이 외쳤다.

    “팽 공자! 그쪽은 생문이 아니네. 오른쪽으로 가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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