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0. 그대들을 믿습니다 (5)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는 말이었다.
학이 눈에 띄는 이유는 간단하다.
닭 무리에 학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학의 무리라면?
이곳 백경은 학의 무리였다.
초아는 눈에 띄는 학이 되고 싶었다.
학이 아닌 토끼라도 좋았다.
그녀는 이곳에서 돋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도 백학의 무리 중에 눈에 띄려고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가면이라도 써서 무리에서 눈에 띄려는 초아의 의도는 이제까지 성공적이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임무를 맡을 수 있었으며 덕분에 많은 공을 세울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녀는 백의 오른팔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유림 서원의 임무도 그녀가 자청했었다.
그녀는 유림 서원에서 적룡대협을 제거하는 공을 세웠다.
백경에서 그녀의 입지는 점점 탄탄해지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백경의 목적은 모른다.
백경의 목적 따위는 그녀와 관계없었다.
최고의 지위에 올라 신선이 되는 무공을 익히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다.
백경의 목적을 모르지만, 단기적인 목표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백경이 통제할 수 없는 무림 인사는 제거하는 것이었다.
통제할 수 없는 집단 혹은 개인은 없앤다는 것이 백경의 단기 목표였다.
아마도 그것은 백경의 먼 훗날의 계획을 위해서일 듯했다.
초아는 그 계획이 뭔지는 모르지만, 끝까지 백경에 충성을 다할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오직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무공만이 중요했으니 말이다.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많은 임무를 맡아야 했다.
빨리 공적을 쌓아서 선주를 뛰어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초아가 가면 뒤로 진지하게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였다.
쪽지의 내용을 확인하던 백이 미간을 좁혔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듯 가지런했던 그의 미간이 처음으로 주름이 잡히는 순간이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쪽지의 내용과는 관계없는 듯 보였다.
초아는 백이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무결점에 흠집을 낸 인간을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백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갑판이었다.
갑판은 눈이 덮인 것처럼 백색이었다.
그러나 백색의 갑판에는 눈에 띄는 한 부분이 있었다.
마치 그을린 것 같은 부분이었다.
청운사신이라 밝힌 자가 이곳에 다녀가며 만들어 놓은 흔적이었다.
결벽증에 가까운 완벽을 추구하는 백이었기에 용납이 안 되는 흔적이었다.
청운사신은 죽었을까?
초아는 아니라고 봤다.
깊은 강물에 빠졌지만, 그마저도 청운사신이라는 인물의 계획으로 봤다.
초아는 별도로 청운사신을 조사했다.
청운사신이 무림에 쌓은 명망은 꽤 화려했다.
하지만 그에 비해 흔적은 별로 남기지 않았다.
그중 가장 큰 흔적은 백경의 갑판 위에 남긴 것이다. 추상적인 의미의 흔적이 아닌 진짜 흔적 말이다.
아마 저렇게 흔적을 남긴 것으로 봐서, 선주인 백의 성격을 알고 있는 자일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청운사신이야말로 백경의 가장 큰 적일 수도 있었다.
초아는 백이 어떤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저 흔적을 본 백은 몇 달 동안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아마 그는 자신이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를 수 있었다.
그만큼 저 흔적은 백에게는 상처였다.
백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 흔적은 안 지워지는군. 저 흔적을 만든 자가…….”
“그때 자신을 청운사신이라고 밝혔지요.”
초아는 반사적으로 답했다.
이제 다음 이야기가 나올 차례였다.
아니나 다를까. 백이 말을 이었다.
“별도로 조사한다고 했었지?”
“네, 맞아요. 제가 따로 조사해 본 바로는 무공의 경지나 특징 모두 강호에 소문난 청운사신과 일치해요.”
“흠.”
“비슷한 자가 있긴 한데, 그자는 유림 서원에서 저세상으로 보냈으니까 딱 한 명이 남죠.”
초아가 토끼 가면을 살짝 들추고 빙긋 웃었다.
“그럼 무림삼존과 청운사신만 처리하면 십 년간은 무료하겠군. 아니, 내부 단속이 남아 있으니 심심치는 않겠군.”
“전해 드릴 말이 있어요.”
“뭐지?”
“백룡의 쥐가 화련산으로 숨어들었다고 해요. 어떻게 할까요?”
“너는 어떻게 하면 좋겠나? 의견을 말해 보아라.”
순간 토끼 가면 속 초아의 눈이 커졌다.
선주인 백이 그녀의 의견을 물어본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재빨리 답했다.
“쥐새끼를 잡는데 기다릴 필요가 있나요? 바로 잡아야죠.”
“어떻게 잡을 거지?”
“빠져나오는 통로에 덫을 놓고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죠. 저 같으면 그냥 쥐구멍에 불을 지피겠어요.”
“쥐구멍에 불을 지핀다…….”
“그럼 지네들이 알아서 고개를 내밀겠죠. 그때 사삭!”
초아는 못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세 번을 끄덕이고 난 백이 말을 이었다.
“그 일을 맡겠나? 원한다면 네게 맡기겠다.”
“정말로요? 맡겨만 주신다면 흔적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지울게요. 쥐새끼의 털조차도 남기지 않게요.”
“몇 명이나 필요하지?”
“그깟 쥐새끼 처리하는 데……. 그냥 저 혼자도 가능할 것 같아요.”
“자만!”
“네?”
“자만이다.”
“그럼 몇 명이나 데려가는 게 좋을…….”
초아는 슬쩍 백의 눈치를 봤다.
이렇게 상관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그녀가 잘하는 일의 하나였다.
초아가 고개를 조아리자 백이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저곳을 감시할 최소 인원만 남겨 두고 화련산에 숨어든 쥐새끼를 처리하고 오게.”
백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곳은 무당파였다.
“잊지 않고 있습니다.”
“잊으면 안 되지. 가장 중요한 거래가 이루어질 곳이다.”
“존명.”
초아가 깊숙이 포권하자 백이 손을 내저었다.
“그럼 빨리 출발하도록!”
얼른 가라는 신호였다.
초아가 뒤로 물러서며 주변에 턱짓했다.
인원을 뽑으라는 신호였다.
초아의 신호에 따라 백의 무복을 가진 백경의 무사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은 초아를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소식을 확인했다.
탁자 위에 떨어진 소식들은 꽤 많이 남아 있었다.
개방과 하오문 그리고 수많은 상단에서 올라온 소식들로,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되는 소식들을 추린 것이었다.
백경은 이 배를 뜻하기도 하지만 백이 속해 있는 부족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의 문파였다.
어찌 보면 중원의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조직이었다.
하지만 재미있게 중원의 어디에도 있는 조직이 바로 백경이었다.
암제조차도 백경의 하수인에 불과했으니까.
백은 무료한 표정으로 다 읽은 쪽지를 가루로 만들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
탁자에 쌓인 쪽지는 점점 숫자가 줄어들었다.
그렇게 쪽지가 바닥을 드러낼 때였다.
백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그때 인원 선별을 마친 초아가 백의 앞으로 돌아왔다.
그때 백이 손바닥을 보이며 외쳤다.
“잠깐!”
한마디였지만, 그 억양이 묘했다.
묘한 억양은 초아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몸을 돌린 초아가 조용히 백의 표정을 확인했다.
백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손에 든 쪽지와 초아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하지만 백의 주변의 공기가 변했다.
마치 대기가 백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는 것 같았다.
그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던 흐름이 멈췄다.
초아가 황급히 뒤쪽으로 물러났다.
백의 몸에서 가공할 기세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초아가 감당할 수 있는 기세가 아니었다.
마치 거미가 먹이를 잡기 위해 거미줄을 치듯, 백은 갑판 위를 자신의 기세로 덮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초아를 바라봤다.
그 시선만으로도 초아는 얼굴이 따끔거렸다.
가면을 뚫고 들어오는 백의 기세는 가공스러웠다.
초아는 일단 감정을 숨기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감정을 수급하고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왜 그러세요?”
“직접 확인하거라.”
말을 마친 백이 쪽지를 던졌다.
획.
접혔던 쪽지가 펼쳐졌다.
펼쳐진 쪽지의 가장자리에 투명한 강기가 일렁였다.
내공을 담아서 뿌린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종이였지만, 백의 기세가 담겨 있는 쪽지는 그 어떤 명검보다도 날카롭게 보였다.
쪽지가 멈추지 않고 초아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마치 단검이 초아를 향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순간 갑판 위에 있던 다른 이들이 움찔했다.
아찔한 이 상황에 나서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들어서였다.
다른 이들이 고민할 정도의 상황에도 초아는 공손히 손을 모은 채 기다리고만 있었다.
방어할 생각은 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게 벌이라면 달게 받겠다는 듯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맹렬한 기세로 날아오던 쪽지가 초아의 눈동자 한 치 앞에서 멈췄다.
초아는 그제야 손을 들어 쪽지를 잡았다.
쪽지를 확인한 초아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재빨리 백에게 다가갔다.
몸을 찌르는 듯한 기세를 그대로 받으면서 말이다.
그의 앞에 다가간 초아가 물었다.
“적룡대협이란 작자가 나타났다고요?”
“거기 나와 있지 않으냐?”
“그것도 비무행이라고요?”
“너는 아마 그자가 가짜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
초아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적룡대협을 처치한 것은 그녀가 내세우는 큰 공적 중 하나였다.
그런데 적룡대협이 살아 있다니.
그것도 자신과 대결할 자는 모이라면서 공개적으로 선포했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때 백이 쪽지 하나를 더 내밀었다.
“이것도 확인해 보아라.”
“이건…….”
초아가 다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자신이 찾으려 해도 꼭꼭 숨어서 나오지 않던 청운사신이 흔적을 드러냈다는 소식이었다.
갑자기 몇 개월의 공적이 봄날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초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확인해 볼게요. 다시 맡겨 주세요.”
“너는 화련산의 일이나 잘 처리하거라. 인원 중 삼분의 이만 데려가거라. 그리고…….”
백은 뒤쪽에 있는 다른 자를 바라봤다.
“주아는 청운사신을 쫓고, 황아는 적룡대협을 맡거라. 만약에 가짜라면 사로잡아 그 이유를 밝혀내고, 그자들이 진짜 청운과 적룡이라면 그 자리에서 죽여도 좋다. ”
그의 말에 두 명의 여인이 앞으로 나와 포권했다.
“존명.”
마치 한 명처럼 그들의 목소리가 갑판에 울려 퍼졌다.
주아와 황아라고 불린 여인은 생김새가 비슷했다.
둘은 동시에 입꼬리를 살짝 올린다.
그러면서 초아 쪽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초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입술을 잘끈 깨물며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지시를 내린 백은 쪽지를 마저 살피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소식이 하나 있었다.
요즘 떠오르는 상단이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백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 상단까지 조사할 여력이 없었다.
그는 쪽지를 비벼 먼지로 만들었다.
바스러지는 쪽지의 한쪽에는 ‘진룡’이라는 글자가 얼핏 보였다.
백이 지금 확인한 내용이 바로 진룡 상단에 대한 내용이었다.
진룡 상단은 최근 떠오르는 상인 집단이었다.
만금 전장과 끈끈한 유대 관계를 바탕으로, 막대한 자본을 앞세워 중원 전역을 공략하고 있는 상단이었다.
그 상단의 수뇌부는 하얀 옷에 금색 용이 새겨진 옷을 입고 다닌다고 들었다.
이것은 일종의 과시였다.
그리고 자신감이기도 했다.
백은 임무를 위해 떠나는 수하들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무당산으로 시선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