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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88화 (574/621)
  • 588. 그대들을 믿습니다 (3)

    황제를 만나려면 거쳐야 할 단계는 과연 얼마나 될까?

    당장 황성의 입구에서부터 걸러질 것이었다.

    구파일방 중 최고 세력이라는 소림도 마찬가지였다.

    고수가 즐비한 소림사에서 일지 대사를 대체 어떻게 만난다는 말인가?

    어찌 보면 황제를 만나는 것보다 소림의 일지 대사를 보는 것이 더욱 힘들 수도 있었다.

    악필승이 슬며시 고개를 떨구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그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아마 황제를 만나는 게 더 빠를 겁니다. 소림의 방장은 벌써 이 년째 폐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지 벌써 십 년이 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제게 그런 일을…….”

    “악필승 각주만이 만날 수 있습니다.”

    “저만 만날 수 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악필승 각주가 아니면 안 됩니다.”

    “왜 제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시는지…….”

    “거기 적혀 있는 대로만 하십시오. 잘 보시면 악필승 각주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

    악필승은 말없이 지도를 살폈다.

    방법이 나와 있긴 했다.

    그곳에는 소림사의 주요 인물들에게 바쳐야 할 뇌물들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 뇌물들의 목록을 본 악필승의 표정은 더욱 떨렸다, 그들에게 바쳐야 할 뇌물은 모두 음식들이었다.

    그때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거기 나와 있는 방법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악필승 각주가 유일합니다.”

    “그야…….”

    악필승은 다시 지도에 나와 있는 방법을 살펴봤다.

    지도에 나와 있는 뇌물이란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악필승이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는 요리들이었다.

    갑자기 자신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사 공자에게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는 느낌도 들었다.

    그것도 잠시, 악필승은 고개를 갸웃했다.

    음식을 뇌물로 바치라고?

    그럼 무사통과라니!

    이건 말도 되지 않았다.

    악필승은 한빈이 소림사를 너무 만만히 보는 것으로 생각했다.

    차라리 금은보화를 뇌물로 바치면 모를까?

    아무리 봐도 이것들을 가지고 될 일이 아니었다.

    악필승이 살짝 고개를 떨구니 한빈이 말했다.

    “제가 악필승 각주를 믿는 만큼, 각주도 자신에게 믿음을 가졌으면 합니다.”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악필승의 어깨를 토닥였다.

    악필승을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사 공자.”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그의 손에서 지도를 빼앗았다.

    그러고는 그 지도를 현문에게 넘겼다.

    “이 지도를 지워 주시죠, 어르신.”

    “오호, 내게 부탁하는 것인가?”

    얼굴 가득 미소를 피워 낸 현문이 손바닥 위에 진기를 끌어올렸다.

    화르륵.

    지도는 그의 손바닥 위에서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이제 동선과 그의 임무는 한빈과 악필승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현문이 삼매진화의 수법으로 지도를 태우자 악필승은 이를 악물었다.

    왠지 임무를 받는 상황 자체가 경건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가슴속에서 요리에 대한 자존심이 끓어올랐다.

    한빈이 자신에게 요구한 것은 무공이 아니었다.

    여기에 나와 있는 요리는 악필승이 누구보다 자신 있게 선보일 수 있는 음식들이었다.

    일련의 과정이 악필승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의심을 지운 것이다.

    그러나 물러가던 악필승이 멈칫하며 한빈을 바라봤다.

    보따리는 분명히 무작위로 고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딱 맞는 임무를 맡을 수 있단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악필승은 등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그때 담천호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지도는 다 외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 제가 입은 복장이 진짜 적룡대협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정말입니까?”

    악필승은 눈짓으로 장삼과 조호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한빈이 웃었다.

    “비슷한 게 아니라 똑같은 복장입니다.”

    “흠, 제가 왜 이 복장을 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강호인들이 가장 흥미를 끌 만한 인물이 누군지 아십니까?”

    “그건…….”

    담천호가 말끝을 흐리자 한빈이 빙긋 웃었다.

    “바로 현 강호의 신진 영웅 중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적룡대협입니다. 적룡대협은 영단산에서 사파인들을 구하며 떠오른 영웅이지요. 거기에 더해 외모도 출중하다고 전해집니다. 그 인품은 어떠한가요? 그리고…….”

    한빈은 적룡대협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얼마나 빠르고 신속 정확하게 칭찬을 늘어놓는지 남들이 보기에는 한빈의 입에서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듯 착각할 정도였다.

    물론 조용히 뭔가를 받아 적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은 설화였다.

    설화는 몰래 한빈의 말에서 핵심만을 뽑아서 적었다.

    그녀가 적은 것은 적룡대협의 칭찬이 아니었다.

    간단하게 자화자찬이라고 적혀 있었다.

    설화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자화자찬을 하는 한빈의 모습이야말로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설화의 이런 속마음을 아는 이는 없었다.

    그때 담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저도 동감합니다. 비록 사파의 영웅이라고 하지만 저도 적룡대협을 존경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죠. 그래서 담천호 각주를 적룡대협으로 꾸민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처음 출발할 때 저는 모두에게 한 가지 중요한 정보를 주었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정체를 모를 적과 싸울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적은 우리의 적일 뿐만 아니라 강호인 모두의 적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한빈의 말에 담천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오면서 한빈이 했던 말이었다.

    그래서 무당으로 향하는 한 걸음 한 걸음에 사명감을 느꼈던 것이었다.

    물론 한빈이 베푸는 기연도 한몫했지만 말이다.

    담천호는 의문이 풀리지 않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세 명의 각주 중에서도 가장 직설적인 인물이었다.

    담천호는 못 참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적과 싸우는 것과 적룡대협의 복장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사 공자님.”

    “뭐, 이유는 간단합니다. 만약에 적이라면 누굴 가장 경계하겠습니까?”

    “사 공자가 말씀하고 싶으신 게…….”

    “네, 맞습니다. 떠오르는 영웅을 가장 경계하겠지요. 적룡대협의 복장을 하고 지도에 적힌 곳으로 향하면 적들이 현무각주를 쫓을 겁니다. 물론 이건 제 추측입니다. 그래도 적의 이목 정도는 끌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적룡대협은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하지 않습니까?”

    “영단산에서도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죠. 하지만 그다음에 여기저기서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죽었다는 소문은 어찌 보면 기회입니다. 죽은 자가 깨어났으니 강호의 이목이 쏠리겠지요.”

    “그럼 제 역할은 무엇입니까?”

    “시선 분산입니다.”

    “흠.”

    “지금의 구걸십팔보의 수준과 추룡산맥에서 얻은 깨달음이면 아마도…….”

    한빈은 말끝을 흐리며 담천호를 바라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모습이 마치 그의 경지를 평가하려는 것 같았다.

    매의 눈으로 담천호를 바라보던 한빈이 말을 이었다.

    “도망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도 잡을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맞서 싸운다면 살아남을 확률은…….”

    한빈이 다시 말끝을 흐렸다.

    담천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한빈의 말 한마디는 이제까지의 고생에 대한 성적표였다.

    물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한빈의 입이 다시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주변의 풀벌레들까지 소리를 죽이는 듯했다.

    고요함이 절정에 달했을 때 한빈이 입을 열었다.

    “삼 할입니다.”

    “헉, 지금 삼 할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건 조금…….”

    무인에게 삼 할이라는 숫자는 자존심에 상처가 될 만했다.

    담천호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순간 담천호의 눈이 커졌다.

    적혈맹호대 대원들이 적잖게 놀라고 있어서였다.

    그들 대부분은 실망의 눈빛이 아닌 경탄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보면 대충 ‘현무각주가 저 정도였어?’ 하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자존심에 금이 갈 정도의 숫자인데 저렇게 탄성을 내지르고 있으니 담천호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현무각주는 화경의 고수와 맞짱 뜨면 살아남을 자신이 있습니까?”

    “네?”

    담천호가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날아온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나는 그 확률을 삼 할로 보고 있는 겁니다.”

    “화경의 고수라니…….”

    “강호에는 말입니다, 주변에 널린 고수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조용히 검을 뽑았다.

    스릉.

    햇빛을 받은 월아가 부끄럽게 검신을 드러내자 모두가 탄성을 토해 냈다.

    월아가 아름다워서는 아니었다.

    한빈이 검을 뽑는 모습에서 현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월아를 뽑은 한빈은 빠르게 구걸십팔보를 펼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빈은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바위 앞에 도착했다.

    한빈은 조용히 진룡파혼검을 떠올렸다.

    한빈의 의도는 현재 그들의 무공 수준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였다.

    사실 진룡파혼검은 화경의 초식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빈의 용린검법 중 가장 화려한 초식이었다.

    그런 면에서 진룡파혼검은 딱 적당한 초식이었다.

    순간 한빈을 중심으로 풀잎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퍽!

    포대 자루를 던지는 듯한 소리와 더불어 모두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한빈의 앞에 있었던 바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동시의 한빈의 신형이 사라졌다.

    사사-삭.

    담천호의 눈이 커졌다.

    한빈이 숨겨 놓은 힘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경지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저런 초식은 듣도 보도 못했다.

    정확히 경지를 논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눈높이로는 평가할 수 없는 무위였다.

    그때였다.

    담천호의 어깨에 가벼운 촉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그의 어깨를 토닥이고 있었다.

    담천호가 놀란 듯 입을 벌리자 한빈이 포근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피하실 수 있겠습니까?”

    “…….”

    담천호는 한빈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한빈의 경지를 논할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한빈이 마음만 먹으면 그의 목을 언제든 벨 수 있다는 말이었다.

    아군이 아니라 적이었다면…….

    그의 목은 벌써 바닥에 나뒹굴었을 것이다.

    담천호가 겨우 표정을 수습했을 때 한빈이 말했다.

    “삼 할이면 제법 높이 평가한 겁니다.”

    “알겠습니다.”

    “이 임무에는 판단이 중요합니다. 저는 담천호 각주의 판단을 믿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무사히 살아서 무당에서 만나리라 봅니다.”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이 일이 끝나면 제가 말한 확률이 아마 오 할 정도로 올라갈 겁니다.”

    한빈의 말에 담천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화경의 고수를 적으로 만나서 살아남을 확률이 오 할이라?

    이건 기연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화경을 눈앞에 둬야 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다.

    담천호가 포권하며 물러섰다.

    그때 가기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 사 공자. 혹시 제 복장은 청운사신의 복장입니까?”

    “역시 주작각주님이십니다. 안목이 날카롭군요.”

    한빈이 그 어느 때보다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불길한 예감이 한계까지 다다른 가기군이 손이 있는 지도를 다시 보며 말했다.

    “제 역할도 비슷한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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