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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87화 (573/621)
  • 587. 그대들을 믿습니다 (2)

    보따리를 들고 있는 각주들의 표정도 제각각이었다.

    적색 보따리를 든 담천호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뽑은 적색 보따리가 최고의 기연을 담고 있다는 표정이다.

    반면 청색 보따리를 뜬 가기군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택은 했지만, 확신은 못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업무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한 조직의 정보를 다루는 것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감정이 바로 의심.

    손에 들어온 정보라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것이 주작각의 책임자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세였다.

    과연 자신의 선택이 옳았을까?

    물론 선택이란 건 애초에 없었다.

    눈치를 보며 선택하려고 했는데 한빈이 발로 차서 보따리를 건넸기 때문이다.

    청색 보따리를 든 가기군은 괜히 아직도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물론 악필승은 마치 뜨거운 감자를 입 속에 넣은 듯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악필승은 본능적으로 이게 복(福)이 아닌 화(火)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한빈의 웃음 때문이었다.

    저 미소를 보일 때면 그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연무장에서 머리를 박을 때도 그랬고.

    천수장에 끌려갈 때도 그랬다.

    물론 ‘악’이라고 구령을 붙이는 바람에 이곳에 동행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였다.

    한빈이 포근한 미소와 함께 외쳤다.

    “각주들은 보따리에 든 의복으로 환복하십시오! 차 한 잔 마실 시간을 주겠습니다.”

    “환복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가기군이 눈을 크게 뜨고 묻자, 한빈이 보따리를 가리켰다.

    “벌써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보따리에 옷을 넣어 놓을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갈아입으라고 넣어 둔 것이죠.”

    “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빈의 말에 가기군이 답했다.

    “존명.”

    그 뒤를 이어 구령이 튀어나왔다.

    “악!”

    그것은 악필승이었다.

    천수장에서의 훈련이 끝났지만, 긴장하면 나오는 구령이었다.

    그들은 재빨리 자리를 옮겼다.

    그들이 보따리를 들고 갈아입기 위해 자리를 피하자, 주변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가만히 보고 있던 현문도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저게 어떻게 된 일인가? 팽 공자가 뭘 하려고 하는 거지?”

    “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르신은 팽 공자한테 직접 물어보시면 될 걸…….”

    광개가 눈을 가늘게 뜨자 현문이 말했다.

    “더는 빚을 질 수 없네.”

    “빚이라니요? 팽 공자와 어르신도 끈끈한 계약서로 묶이지 않았습니까?”

    “계약서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네. 나는 조금 더 큰 빚을 졌지, 허허.”

    현문이 허허롭게 웃자 광개가 입맛을 다셨다.

    개방도 특유의 촉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계약서보다 더 끈끈한 관계라니…….

    광개가 생각하기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한빈과의 관계에서 계약서보다 우선시되는 연결 고리는 있을 수 없었다.

    물론 현문이 말한 빚이라는 것은 한빈 덕에 깨침을 얻은 것이었다.

    현문은 이번 일이 끝나면 무당으로 돌아가 폐관에 들 생각이었다.

    그 깨달음을 정리한다면 무당의 무학은 중원의 최고로 우뚝 설 것이다.

    현문은 추룡산맥에서 한빈 덕분에 만류귀종의 깨달음을 얻긴 했지만, 아직 정리는 못 한 상태였다.

    중요한 것은 그 깨달음을 펼칠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이번 기회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과 그것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 또한 깨달음일 터.

    현문에게 아쉬움은 없었다.

    거기에 미래에는 갚아야 할 빚이 더욱 늘어날 터였다.

    사형을 위기에서 구할 것이 분명했기에 한빈에게 입은 은혜는 늘어날 것이 확실했다.

    이제는 더는 빚을 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현문의 생각이었다.

    물론 광개의 생각은 달랐다.

    빚이라는 단어보다는 ‘조금 더 큰’이라는 말에 신경이 쓰였다.

    한빈은 개방이 주시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사파와 정파의 연결 고리이자 동시에 모든 정보가 지나가는 통로였다.

    그것이 바로 개방이 바라보는 한빈의 가치였다.

    사실 홍칠개가 한빈의 오성에 탄복해서 제자로 삼았을 때 개방의 분위기는 완전히 초상집이었다.

    무제자라는 별호까지 얻을 정도로 홍칠개의 눈은 깐깐했다.

    그 깐깐한 눈은 개방의 자랑거리였다.

    그런데 하북팽가의 겁쟁이를 제자로 들였으니, 개방의 수뇌부는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 연달아 터지는 사건의 중심에는 한빈이 있었다.

    거기에 더해 한빈이 개방에 흘린 이권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개방이 거지들의 집단이기는 해도 수뇌부는 만일을 대비해서 비자금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가끔은 거지들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상황이 닥친다.

    예를 들어 수해가 난다든지 가뭄이 계속되는 상황 말이다. 무공을 아는 거지들은 어디든 빌붙어서라도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무공을 모르는 거지들은 살아날 방법이 없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개방의 수뇌부는 그들의 목숨을 연명할 자금을 마련해 둬야 했다.

    말은 거창하게 비자금이라고 했지만, 한마디로 입에 풀칠할 돈이었다.

    물론 중원의 거지들이 입에 풀칠할 돈이라면 큰돈이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개방의 수뇌부는 유난히 돈을 밝힌다.

    홍칠개도 그중 하나였다.

    그 돈에 대한 갈증을 풀어 준 것이 바로 한빈이었으니, 날마다 업고 다니라고 해도 들어줄 것이었다.

    뭐, 한빈이 마다할 테지만 말이다.

    그런데 묘하게 무당과 더 친한 것처럼 보이자 광개는 자신도 모르게 질투심을 피워 냈다.

    물론 질투심을 겉으로 표현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질투심 대신에 반짝이는 눈으로 한빈의 옆에 다가갔다.

    “팽 공자, 목이 컬컬하지 않나? 이것 좀 들지 않겠나? 그리고 말도 전처럼 편안히 하지. 갑자기 요즘 들어 서먹해진 느낌도 들고…….”

    “갑자기 친한 척하고 그러지? 왠지 수상한데?”

    “우리 사이에 수상할 게 뭐가 있다고 그러나? 앞으로 더 친하게 지내자는 의미지.”

    “혹시 술병 안에 침 뱉은 거 아니야?”

    “허허, 무슨 그런 벼락 맞을 소리를…….”

    “됐고, 일단 내가 부탁한 것만 좀 잘 처리해 줘.”

    “허허, 알았네. 친구.”

    이제는 호칭까지 바꾸는 광개의 모습에 한빈은 의심의 눈빛을 지우지 않았다.

    그때였다.

    적혈맹호대 대원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변복한 세 명의 각주를 보고 놀랐기 때문이었다.

    조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작게 속삭였다.

    “장삼 아저씨, 저 모습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요?”

    “흠, 어디서 봤더라……. 저 복장은 눈에 익긴 한데.”

    “저도 분명히 본 것 같기는 한데…….”

    그들은 미간을 좁히며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때였다.

    장자명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거 하남정가에서 봤잖습니까?”

    “하남정가에서라면…….”

    “청운사신이요. 저 푸른 도포 자락 하며, 닳고 닳아서 누더기가 된 저 소맷자락도 그렇고 그때 본 복장이 분명합니다.”

    “아, 맞아요. 청운사신.”

    조호가 손뼉을 치자 장삼이 다른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럼 저건 혹시…….”

    “적룡대협의 복장이겠죠.”

    장자명이 다른 쪽을 가리켰다.

    그의 말에 장삼이 손뼉을 치더니 엄지를 들어 올렸다.

    “역시 장 의원의 기억력은 최고입니다.”

    “별말씀을요.”

    “그런데 저 하얀색 옷은 누구의 복장이죠?”

    “글쎄요. 저 하얀색 옷은 처음 봅니다. 아니,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장자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말한 하얀색 옷은 악필승이 갈아입고 온 옷이었다.

    하얀색에 황금색 실선이 지나가는 것이 꽤 고급스럽게 보이는 복장이었다.

    조호가 각주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굉장히 불편해 보이시는데요.”

    “그러게. 꼭 안 맞는 옷을 입은 것 같네.”

    장삼도 맞장구쳤다.

    그들의 말대로 각주들은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사실 옷은 최고급 포목점에서 맞춘 것처럼 몸에 딱 맞았다.

    그런데 마음이 불편했다.

    이 옷을 왜 입혔는지 하는 점이 가장 큰 의문이었다.

    당당하던 담천호도 눈에 띄는 붉은색 옷이 상당히 신경 쓰였다.

    보따리를 풀어 보기 전까지는 영약이라도 들어 있을까 기대하고 있던 그였다.

    하지만 보따리 안에는 가기군의 말대로 옷가지와 변장용 도구들만 들어 있었다.

    물론 지도도 있었다.

    불편한 기색을 겨우 숨긴 담천호가 한빈의 앞에 섰다.

    다른 두 명의 각주들도 한빈의 앞에 보따리를 들고 섰다.

    그들의 보따리에 남아 있는 것은 한 장의 지도와 변장용 도구들이었다.

    그때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순간 설화와 청화 그리고 소군이 달려왔다.

    설화는 담천호 앞에 섰고 청화는 가기군 앞에 섰다.

    그리고 소군은 악필승 앞에 섰다.

    셋은 준비가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외쳤다.

    “실시!”

    “네, 공자님.”

    설화부터 남은 변장 도구를 들었다.

    설화는 가발과 수염으로 담천호의 얼굴을 꾸몄다.

    변장용 풀로 표시 안 나게 수염을 붙이고 나니, 담천호는 완벽한 노고수로 보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담천호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설화야,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냐?”

    “잠시만요. 각주 아저씨, 변장하는데 말씀하시면 수염이 울어요. 그러니까 질문은 나중에 해 주세요.”

    “…….”

    담천호는 질문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물론 다른 이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각주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설화와 청화 그리고 소군의 손재주에 탄복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변복이 끝났다.

    젊은 각주 대신 그 자리에는 세 명의 노인이 서 있었다.

    한빈은 그들에게 다가가 마지막으로 눈을 빛냈다.

    그러고는 흩어진 곳이 있으면 직접 변장을 다듬어 주었다.

    마지막 점검이 끝나자 한빈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세 분은 보따리에 남아 있는 지도를 외우십시오.”

    “존명!”

    담천호는 일단 외치고 지도를 살폈다.

    가기군도 마찬가지였다.

    악필승도 지도를 외우기 시작했다.

    지도를 본 악필승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도에는 자신이 거쳐야 할 경로가 상세히 나와 있었다.

    그리고 가면서 해야 할 일도 적혀 있었다.

    중요한 것은 만나야 할 사람이었다.

    지도를 외우던 악필승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만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악필승은 조용히 한빈을 바라봤다.

    그 표정에 한빈이 작게 말했다.

    “저는 악필승 각주를 믿습니다. 그리고 잘해 주리라 믿습니다.”

    “제, 제가 어떻게 소림의 일지 대사를…….”

    악필승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이름은 입 밖으로 내도 되는지 확신이 들지 않아서였다.

    말끝을 흐린 그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봤다.

    그의 예상대로 모두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예상 못 한 인물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편하게 말해도 됩니다.”

    “네, 제가 어떻게 무림의 삼존 중 한 명을 뵐 수 있겠습니까?”

    악필승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십대세가의 각주이기는 해도 구파일방의 최고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소림사였다.

    그런 소림사의 일지 대사를 만난다라?

    황궁의 위치를 가르쳐 줄 테니 황제와 만나고 오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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